49화
검은 안개가 주변을 가득 가렸다. 그 속에서 산박은 이상하리만치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고양이가 상자 속에 들어간 것처럼, 굉장한 안정감이 스며들어 왔다. 그건 일종의 행복감이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야생을 주름잡고 누구보다도 자연의 어둠을 누비고 다니는 호랑이의 강력한 장점이 몸을 부풀리며 검은 안개를 끌어안았다. 마치 왕이 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산박의 영혼에 소름이 돋았다. 주변이 자신을 떠받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 주변 공간이 오로지 자신을 칭송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게 어둠 속에서의 호랑이.’
경계해야 할 적을 상대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수의 적을 맞이했고 위태로운 상황에 내몰렸으며 적은 위협적이다. 그렇기에 곤두선 감각이 선사해 주는 선물이었다. 걱정도, 불안도, 상처에 대한 불안함도, 훅 다가올 수 있는 죽음의 숨결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최강이 된 기분.’
어째서 몰랐을까. 그것은 분명, 산박이 인간이라서일 것이다. 자연을 벗 삼기보다 잉여 노동력을 확보해서 밭을 가는 드루이드는 괴짜 중 괴짜다. 그렇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호랑이로 살아가지 않았기에 호랑이의 강점을 활용할 방법을 전혀 몰랐다.
호랑이의 귀가 180도 돌아갔다. 정확하게 소리의 방향을 짚어냈다. 왼쪽과 오른쪽은 구분해도 디테일함이 사라진 인간의 청각과는 달랐다.
산박은 발걸음을 옮겼다. 육중한 체중에도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안개를 비추고 있는 온화한 자수정의 빛이 산박의 눈에 보였다. 그는 곧바로 앞으로 도약했다. 뛰어들었다.
덮치고 나서야 근위 곧개미의 측면을 덮쳐 넘어뜨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이 근위 곧개미에게 박혔다. 다리의 연골에 균열이 났고, 산박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물기 위해서 체중을 싣자 뒷다리가 그대로 뜯겨 나갔다.
콱!
단번에 근위 곧개미의 몸통을 아가리로 물어뜯고 갑각 피부를 박살 낸 뒤에 산박은 물러났다. 6.5cm에 달하는 송곳니는 400kg이 넘는 힘을 낼 수 있었다. 그게 송곳니의 뾰족한 부분에 집중된다. 곧개미의 갑각 피부나 가죽 갑옷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발악하는 근위 곧개미가 버둥거렸다. 산박은 그걸 보지는 못했다. 검은 안개는 굉장히 어두웠다. 마법 안개였기 때문에 매우 인위적이라서 절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마녀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주문이었다.
‘딱딱한 피부가 뜯겼기에 오래 살 수 없고, 전투도 불가능하다. 놈에게 더 신경 쓰는 건 체력이 아깝다.’
다리가 호랑이의 발톱과 힘으로 뜯겨 나갔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설 수도 없을 터였다. 또 놀라운 투지로 일어서더라도 조금 걷고 넘어지는 게 고작일 터다.
“샤아아악!”
대장삵의 소리가 났다. 분명 어둠 속에서 근위 곧개미들의 시선을 열심히 끌고 있을 것이었다. 집중성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대장삵은 물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어둠 속에서 울음소리를 내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자잘한 피해는 줬다. 다리를 얕게 물고 괴롭히는 등의 일이었다. 적으로서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산박은 대장삵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의 앞에서 안개의 일부분을 밝게 만드는 자수정의 빛이 일어났다. 산박은 바로 입을 쩍 벌렸다. 용솟음치는 근육의 활력이 그를 포효하게 하였다.
“커헝!”
돌진하는 속력을 이용하며 산박은 두 앞발을 일으켜 세웠다. 단번에 쌍귀싸대기를 후려갈겼다. 근위 곧개미가 인형처럼 휘청거렸다. 124.8kg에 달하는 호랑이였다. 덩치 큰 고양이의 냥냥 펀치는 흉악했다. 오로지 기습으로만 호랑이의 육신을 사용했던 산박이 심장이 덜컥 크게 내려앉을 정도로 놀라운 파괴력을 보여줬다.
퍼벅!
갑각 피부가 함몰되고 내려앉았다. 피가 살짝 사방으로 튀었다. 같이 달려갔기에 서로 몸이 뒤늦게 부딪쳤지만 곧개미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산박은 어벙벙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무조건 선공권을 갖는 호랑이의 강력함은 비정상적일 정도였다. 특히 도구를 사용하는 괴물인 곧개미들은 더더욱 초근접전에 약했다. 무기로 어떻게든 밀어내고 먼저 상처를 준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어둠이 호랑이를 지켜주고 있었다. 소름 돋을 정도로 조용한 발걸음도 한몫하고 있었다.
산박은 놈의 등을 짓눌러 목을 물어뜯었다. 개미라서 목이 아주 얇은 게 매우 큰 약점이었다.
“으아아아아!”
조금 멀리서 탕만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들렸다. 시은이 무차별 석궁 사격에 들어갔다. 검은 안개에 모든 힘을 쏟아붓고, 그다음에는 석궁으로 최대한 탕만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탕만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텅!
‘으윽!’
방패의 울림만으로도 공포가 섬뜩하게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장무가 든든하게 몸을 보정해 주고 있었지만 탕만은 공격 하나 하지 못했고, 반대로 상대 근위 곧개미는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두르기 바빴다. 상대가 공격하지 않으니 마치 벽을 상대하는 것과 같았다. 공격에 온 힘을 다할 수 있었다.
종종 쏘아지는 석궁 또한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맞아도 가죽 갑옷과 갑각 피부 때문에 깊게 박히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는 쫄면 안 돼요! 놈도 똑같이 아무것도 못 본다고요!”
충호가 벌벌 떠는 탕만의 두려워하는 목소리를 듣고 응원했다. 가장 뒤에 있는 그였다. 또, 혹시라도 나타날 병정 곧개미 때문에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체력과 힘을 아껴둬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응원뿐이었다.
정론을 말하는 충호의 조언은 썩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스펙과 피지컬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시은은 확실하게 탕만에게 동기를 부여했다.
“시체 하나만 쌓아요. 그럼 적들이 불편한 자세로 공격할 수밖에 없어요.”
시은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탕만의 귓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과 같았다. 이것만, 이것만. 한 걸음만, 한 걸음만.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숨도 못 쉴 늪 속에 목까지 잠기게 된다.
‘시체 하나만 쌓으면 편해질 수 있다. 조금 더……!’
그 말에 용기를 얻은 탕만이었지만 재수가 없었다.
탕, 사악……!
“아악! 내 눈!”
방패에 튕긴 투박한 검이 탕만의 눈을 긁고 지나갔다. 피가 났고, 끔찍한 고통이 뒤따라왔다. 하지만 그래도 탕만은 물러나지 않았다. 뒤에 시은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쁜 여자만큼 보호 심리를 일으키는 것도 없었다.
석궁이 쏘아지고, 볼트가 지나가는 파공성이 탕만의 귓가로 들려왔다. 그녀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졌다.
지하철에서 하이힐에 짓밟혀도 예쁘면 괜히 웃으며 괜찮습니다 하는 게 남자라는 생물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자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당해보면 자신도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었다.
탕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자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자다. 돌고 돌아서 던전 사용자가 되었다. 목숨 걸고 칼 밥 먹고, 괴물을 도축해서 돈을 벌고 살아가는 자다. 백정을 좋아하는 미녀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시은에게 큰 호감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같은 업종이라 일말의 희망은 있기 때문이었다.
“제 뒤로 빠지세요!”
“괜찮습니다.”
탕만은 괜히 겉멋을 부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고통 속에서 몸을 움직인다는 건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숨이 고통 때문에 턱턱 막히기도 했고, 쉬고 싶어도 못 쉴 때도 있었다.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허나 탕만은 그 하찮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리를 지켰다.
시체가 쌓이고, 숨통이 조금 트였다. 탕만은 상대의 앞다리를 하나 잘라내고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런 탕만의 머리 위에 시은이 지니고 있던 드루이드 빛 무리 치료수가 쏟아져 내렸다.
“버틸 수 있어요!”
“예!”
그가 용맹하게 대답했다. 이번 던전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성장한 건 탕만이었다. 좋은 때를 만났고, 좋은 사람을 만났다.
산박이 마지막 놈의 후방을 덮쳐서 물어뜯어 죽였다.
“그르르…….”
그의 입에서 지친 그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진득한 침이 흘러내렸다. 항상 돌진해야 하고 덮쳐야 하는 호랑이의 공격법상 체력의 안배를 할 수가 없었다. 전력으로 죽이고 날뛰어야만 했다. 그게 야수였다. 검은 안개 속에서의 곧개미 전투는 산박이 호랑이를 크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산박은 인간으로 변하지 않았다. 병정 곧개미가 언제 나타날지 몰랐다. 체중이 인간일 때보다 늘어난 상태에서 제단 철거를 빨리 끝내는 게 먼저였다.
탕만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했다. 온몸이 진땀으로 가득했고 전신의 근육에서 힘이 빠져 버렸다.
시은은 서둘러 제단을 철거하기 시작했고 충호는 통로를 막았다. 그는 곧개미들의 부산물을 취득해 배낭에 대충 쑤셔 넣고 시체를 옮겨서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다리가 여러 개이기 때문에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하단을 보호할 수 있으면 전투에서 버티기 좋다. 특히 곰 같은 충호는 눈앞에 시체를 쌓아 자신의 하단을 방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이점을 취할 수 있었다.
‘지구력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호랑이 상태에서는 쉽게 체력이 회복되지 않는 것 같아.’
산박은 인간으로 돌아왔다. 호랑이 때와는 다르게 숨이 금방 진정됐다. 그건 실로 이상했다. 마치 호랑이보다 인간이 신체적으로 우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모순은 산박을 재밌어하게 만들었다.
휴식을 취하는 상황에서 충호가 고함을 내질렀다.
“왔다! 개새끼들!”
흉포하게 욕을 지껄였다. 혼자서 이들을 상대해야 했기에 적을 깎아내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시에 팀원, 정확히는 탕만이 고통받으면서도 버텨낸 그 용기에 충호의 마음에 불이 지펴졌다. 그의 남성성이 거세게 타올랐다.
산박은 몸을 일으켰다. 제단을 부숴야 했다. 탈진한 탕만조차도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조금이라도 파손을 도와야 했다. 체중을 최대한 기울이는 식으로 몸을 기대어 지렛대처럼 쓰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림자 기사 서충호의 체중은 97kg이다. 살육 병기나 다름없는 체중이었다. 기술을 단련하지 않아도 97kg이나 되는 남자는 무서운 근력을 지니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사람 여럿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달리는 폭주 기관차에 비교할 수 있었다.
충호가 중단세를 취했다. 다른 전사들보다 확실하게 하체가 두툼했고 하체의 균형이 대단했다. ‘전사의 하체’ 기술이 더더욱 충호의 신체 스펙을 드높였다.
제법 기(技)를 단련한 자가 충호를 마주한다면 최대한 싸우고 싶지 않을 것이다. 체(體)의 단련도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심기체(心技體) 중에서도 가장 말단에 존재하는 것 같은 육체는 무(武)의 하체라 불린다. 상체가 아무리 좋아도 하체가 형편없으면 시작도 할 수 없다. 육체는 그만큼 중요했다.
병정 곧개미가 덤벼들었다. 동시에 충호도 움직였다. 그는 거침없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밀려나는 건 충호였고, 방패가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단단한 하체가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 했다.
뒤로 물러나면서 충호의 환도에 어느새 병정 곧개미의 피가 살짝 묻어 나왔다.
‘칠난균은 사용할 수 없다.’
뒷다리가 너무 많아서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공격을 해도 신체 구조상 버틸 수 있었다. 그럼 역공을 맞을 뿐이었다.
‘잔상처를 주며 최대한 버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병정 곧개미들은 무식하게 밀고 들어왔다. 앞에 놈이 무기를 휘두르지 못할 정도로 밀어대서 쓰러지기까지 했고 뒤에 있는 병정 곧개미는 벽을 타려고 헛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충호와 병정 곧개미가 방패 하나를 두고 힘 싸움에 들어갔다. 그냥 줄다리기처럼 되어 버렸다.
“으, 아아아아아!”
충호가 발악했다. 그 소리에 산박이 후다닥 달려와서 닥치는 대로 튀어나온 앞다리나 뒷다리를 치기 시작했다. 피가 튀었다.
충호 또한 곳곳에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다행이라면 방패를 상단에 둬서 목과 같은 급소는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양팔에 온갖 상처가 만들어졌다. 다리는 시체를 쌓아둬서 그나마 안전했다.
“흡! 합!”
산박은 충호의 등에 바짝 밀착해서 환도를 내려치고 찌르고를 반복했다. 가지를 치는 것마냥 앞다리가 잘라지고 무기가 떨어졌다.
머리를 무식하게 들이밀고 그냥 어떻게든 통로를 지나가려고 하는 병정 곧개미도 있었다. 지독했다. 다행이라면 충호가 정말 듬직하게 버텨 줬다는 것이었다. 병정 곧개미들의 전술은 지독할 뿐,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엉망진창으로 밀고 들어올 뿐이라 제대로 힘을 확실하게 낼 수가 없었다. 자세가 엉망이라서 제대로 밀지를 못했다.
“헉! 헉! 헉헉!”
시체가 제법 쌓이자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간간이 느껴지는 미는 힘을 받아치면 그만이었다.
퍼석! 콸콸콸!
제단이 파괴되는 신명 나는 소리가 들렸다. 던전이 붕괴하며 새하얀 공간이 산박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