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270)
  • 47화

    습기를 머금은 흙벽. 땅에 있는 걸 파내서 만든 것이 분명했다. 교묘하게 진짜 벽처럼 되어 있었지만 촉촉한 흙은 숨길 수 없는 증거였다.

    ‘하루 이틀만 늦게 이걸 봤어도 벽이라고 꼼짝없이 속았겠지.’

    기회가 찾아왔다. 곧개미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곳이 이 너머에 있었다. 그건 식량 창고일 수도 있고, 여왕개미의 흔적이 보이는 도주로일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제단으로 가는 길일지도 몰랐다. ‘야만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제단이 필수적이었다. 그걸 두 개나 부쉈으니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가기는 가야 합니다.”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제법 중요도가 높았다. 팀 옥시모론은 많은 피해를 곧개미에게 입혔고, 그 경계심은 최고 수준으로 높아져 있었다. 중요한 것이 있는 곳은 이처럼 일꾼 곧개미를 통해서 숨기고 있었다.

    일행은 가장 먼저 외곽 쪽을 무기로 팠다. 흙벽은 얇지는 않았지만 두껍지도 않았다. 금방 파낼 수 있었다. 아직 단단히 굳어지지 않아서 더더욱 쉬웠다.

    “아무도 없다.”

    대장삵이 머리를 집어넣고 쑤우욱 들어가더니 이내 엉덩이를 좌우로 움직이며 몸을 뺐다. 시은은 저 바둥거리는 엉덩이를 걷어차고 피로 물들 정도로 잔혹하게 괴롭히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귀여울수록 죽이고 싶어지는 건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해 충동이었다.

    시은은 고개는 대장삵에게로 향했지만 눈은 기이하게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모두 대장삵의 재롱 잔치에 힐링하고 있는데 초를 칠 수는 없었다.

    “통로에 뭐가 보이던?”

    “온화한 자수정이 제법 박혀 있지만, 특별한 건 없다.”

    팀원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구멍을 넓혔다. 그러고서 한 명씩 벽을 지나갔다. 큰 통로에 난 조그마한 통로로 바람 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이런 상황에 그런 소름 돋는 바람 소리는 괜히 간을 쫄게 만들었고 피부에 닭살을 돋게 했다. 괜히 불길했다.

    ‘벽’을 넘는 건 그런 기분을 선사해 줬다. 마치 전혀 다른 공간에 들어선 기분이 들게 했다. 심해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모험심이 자극되었다.

    ‘제발, 제발.’

    산박은 기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만날 수 없었다.

    코너를 돌려던 충호가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그는 한 호흡 늦게 신호를 보냈다. 횃불이 서둘러 뒤로 넘어갔다.

    너도나도 머리를 내밀었다. 산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둠 속에 있었고 적들은 온화한 자수정의 빛 속에 있어서 일행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벽이 크게 뚫려 있었다. 마치 괴수가 지나간 것처럼 거대했다. 일꾼 곧개미들이 그곳을 메우고 있었다. 수백 마리가 우글거렸다. 이곳을 지키는 근위 곧개미는 열 마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산박의 팀에게는 너무 많은 숫자였다.

    ‘여왕 곧개미가 지나갔구나.’

    허리를 곧게 편 근위 곧개미들이 철통처럼 그곳을 지켰다. 온화한 자수정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그들은 혹한의 던전에서도 오랫동안 가만히 있을 수 있었다. 장기간 군사 활동이 가능한 것이다.

    “물러납시다.”

    산박은 그렇게 말하며 뒤로 몸을 뺐다. 도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여왕 곧개미를 죽이는 일도 지난할 것 같았다. 전투 능력이 없어도 덩치 큰 존재를 죽이는 일은 힘들고 어렵다. 총총 도망치는 황소를 쫓아가서 맨손으로 죽이는 것과 같았다. 매우 힘들 터였다. 가죽이라도 뜯을 수 있을까 싶었다. 도망만 쳐도 저런 거대한 구멍을 통해서만 도망칠 수 있는 여왕 곧개미였다.

    ‘화염 물약 하나로 피부를 태우고 그곳을 공략해서 죽여야겠지.’

    여왕 곧개미를 죽인다면 그렇게 할 터였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저 근위 곧개미들조차도 상대할 수 없었다. 모든 아이템을 운용한다면 가능했지만,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엄청난 놈이었어요.”

    “그 통로를 메우는 거 봤어요? 여왕개미는 미친 괴물인가 봐요.”

    너무 공포스러웠다.

    “덩치만 큰 놈이에요. 전투 능력은 없어요.”

    산박이 객관적인 정보를 입에 담았지만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걸 본 산박은 자신들의 팀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여왕 개미의 도주로,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너진다.’

    신념을 지닌 산박과는 달랐다. 산박도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그 눈은 다시 빛났다. 이시은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겁먹지 않은 그녀의 눈동자가 횃불의 일렁이는 주홍빛 불꽃과 맞물리며 반짝거렸다. 그 눈에는 두려움 한 점 없었다. 강함에 대한 갈망? 모른다.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마음속에 뭔가가 있다. 던전을 통해 강한 힘을 손에 넣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게 뭔지 산박은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시은은 고레벨 던전으로 데려갈 훌륭한 인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충호는 갈등하는 듯했다. 그런 ‘거대함’을 봤으니 당연했다. 호전성이 없다고 해도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 여왕개미가 덜할 것 같지는 않았다. 충호는 암담함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1레벨 던전 중 절반은 도망쳐야 하는 던전일지도 몰랐다. 산박은 새롭게 잡은 기준조차도 애매하다고 느꼈다.

    ‘정보가 가려진 게 너무 많다.’

    돈을 써도 이 정도다. 다른 대책이 절실했다.

    그들은 서둘러 도망쳐 벽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나왔다. 대장삵이 가장 먼저 벽 너머를 확인하고 몸을 욱여넣었다.

    그다음에는 다시 구멍을 메꾸었다. 완벽하게 메꿀 수는 없어서 들킬 수도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들켰는데 뭔 소용이냐는 식이었다. 대충 메꾼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싸웠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팀장님의 판단이 옳았어요.”

    시은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 갈림길로 향하면서 산박에게 말했다.

    “아니요. 내가 얻은 정보도 반쪽짜리였어요. 1레벨 던전은 생각보다 심각한 곳인 것 같네요.”

    1레벨 공략 팀의 전력 설계부터 잘못되었다. 1레벨 던전은 괴물과 인간의 전쟁터였다.

    후두둑!

    갈림길에 들어서고 10분. 천장에 있는 구멍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정 곧개미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숫자가 제법 되었다. 다섯 마리? 여덟 마리? 열한 마리? 몰랐다.

    “달려요! 섬광!”

    산박이 고함을 질렀다. 돌파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천장이 꽤 높은 탓에 놈들은 아래로 빠르게 뛰어내리지 못하고 벽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번―쩍! 번쩍번쩍!

    섬광 단검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너도나도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순서를 정해서 몇몇만 쓸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눈에 안 머는 놈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 때문에 한 번에 터뜨리기로 하고 방향만 결정했다. 서로 조금만 방향을 미리 조정해도 큰 섬광이 일어날 수 있었다.

    위기는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방금 지난 곳은 병정 곧개미들의 병영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온화한 자수정 갑옷을 입고 다니지 않는 병정 곧개미들을 위해 곳곳에 천장 병영이 존재했다. 그곳은 온화한 자수정으로 장식한 공간이었고 병정 곧개미들은 거기서 따뜻하게 쉴 수 있었다.

    병영을 지나고, 보급을 운반하는 일꾼 곧개미를 산박의 팀이 급습했다. 지키는 놈은 고작 근위 곧개미 두 마리에 불과했다. 무시할 수 있었지만, 산박은 여기서 탕만의 각오를 보고 싶었다.

    ‘그가 해낼 수 있을까?’

    해낼 수 있다면 전방에 설 전력이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이는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수확 중 하나였다.

    벌레,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산짐승의 시체가 쌓여있는 밧줄을 잔뜩 끌고 가던 일꾼 곧개미들이 호다닥 도망쳤다. 반면 근위 곧개미 두 마리는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끄라르라락!”

    서로 소통하는 모습도 보였다. 상대의 숫자가 많으니 뭉칠 법도 했는데, 오히려 대범하게 나왔다. 거침없이 돌진하며 서로 흩어져 버렸다. 적들을 그냥 반반 나눠서 상대하겠다는 대단한 용기였다.

    “탕만 씨가 혼자서 한 마리 맡아요! 나머지는 다른 놈한테 집중!”

    산박이 고함을 크게 지르며 단번에 명령을 내렸다. 상황이 바뀌자 그에 맞춰서 움직였으며, 탕만이 자신의 정신적 상처를 극복했는지 시험했다.

    ‘크윽!’

    탕만은 입술을 악물었다. 피가 새어 나왔다. 고통 속에서 정신이 맑아졌다.

    반대로 배가 아파졌다. 몸이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의 나약한 정신이 꾀병을 만들었다.

    하지만 진짜로 배가 아팠다. 다른 팀원에게 서둘러 도와 달라 하라고 몸이 신호를 보냈다. 배가 아프니까 어쩔 수 없다. 신경통과도 같이 송곳 같은 감각이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다시 한번 받고 싶지 않은 뇌가 발악하는 내면의 발버둥이었다.

    “우, 아아아아!”

    탕만은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돌진을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전에 돌진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달려들었는데 눈 깜짝하는 사이에 엎어졌고, 등판을 난도질당했다. 입었던 소가죽 갑옷도 형편없이 찢겼다. 그 걸레짝이 된 피 묻은 가죽 갑옷도 입고 있지 않은 게 지금의 탕만이었다.

    그는 방패를 쭉 내밀고 환도를 하단으로 내렸다. 근위 곧개미가 덤벼들었다. 기본 방패술의 묘리로 방패가 곧개미가 무기를 휘두르는 방향에서 조금 비켜섰다. 충격은 전달되었지만 탕만이 버틸 수 있게 해줬다.

    기본 검술은 수비 태세를 취한 탕만의 방패에 가려진 검을 보지 못한 근위 곧개미의 맹공 이후를 노렸다.

    촤악!

    피가 튀었지만 아주 얕았다. 리치가 부족했고, 수비 태세를 취해서 체중을 검에 담아내지 못했다. 전력을 다하거나, 충호처럼 덩치가 커야 했다. 그는 그러지 못했을 뿐이었다.

    휙!

    탕만의 발이 교묘한 곡선을 그렸다. 근위 곧개미가 휘두르는 도끼가 탕만을 스쳐 지나갔다. 반면 탕만은 오히려 앞으로 나아간 위치에 있었다. 교묘했다.

    휙! 캉!

    환도를 휘둘렀지만 앞다리를 잘라내지 못했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쳤다. 탕만은 그 거친 부딪침에 심장이 덜컥거리는 걸 느꼈다.

    그가 뒷걸음질 쳤다. 보통이라면 뒤로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유원족역이 이를 방지했다. 직선으로 움직이던 발이 원을 그렸고, 돌과 튀어나온 땅이 뒷걸음질을 방해하지 않게 만들었다. 송곳처럼 툭 튀어나온 발뒤꿈치는 옆으로 비켜서며 넓게 변했다. 자연스럽게 발이 곳곳에 치여도 균형을 갖추게 하였다.

    뒤로 빠지면서도 근위 곧개미는 진득하게 따라왔다. 다리가 더 많았기에 짧은 보폭이 가능했고, 보폭을 이용해 리치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것도 자주 수정이 가능했다.

    “악!”

    탕만이 악 소리를 내며 살짝 팔을 굽혀 당기고 있던 방패를 앞으로 내지르고 환도로 상단을 찔렀다. 근위 곧개미는 뒷다리 네 개를 이용해서 순식간에 물러났다.

    ‘이런 개같은.’

    탕만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쾅!

    방패가 신명 나게 두들겨 맞았다. 탕만은 허릿심으로 겨우 버텨냈다. 그 격전 속에서 탕만은 오로지 근위 곧개미의 공격을 막는 데에만 집중했다.

    언제든지 난입할 준비를 하던 충호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산박의 사인에 석궁이 발사되었다. 남은 놈도 금방 처리되었다.

    “잘했어요.”

    산박이 탕만을 칭찬했다. 훌륭했다. 충호 또한 그를 거칠게 안아주고 금방 떨어져 나가며 어깨를 강하게 두 번 쳤다. 겁쟁이처럼 굴었던 자가 용감하게 시간을 끈 것만으로도 인간 승리 같은 감동을 줬다.

    탕만은 조금 거리를 두려는 충호의 손을 잡고 크게 악수하며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잘할 수 있었습니다, 형님!”

    “어, 엉. 그래요. 멋졌어요.”

    “예, 형님!”

    탕만이 형님 소리를 내뱉자 충호가 제법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호형호제하기에는 좀 그랬다.

    몇 번의 위기를 뒤로하고 충호가 주먹을 크게 들어 올렸다.

    “제단입니다.”

    통로에 깃발과 섞인 듯한 제단이 떡하니 있었다. 그곳에 있는 협소한 통로를 지나가면 제단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통로는 조용했지만 누구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곧개미들은 시설을 지킬 때 통로 밖이 아닌 안에서 지킨다. 가보고 나서야지만 알 수 있었다. 밧줄 작업소를 통해서 안 사실이었다. 내부에 몇 마리가 지키고 있을지 몰랐다.

    산박은 통로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바닥을 내려다봤다. 눈이 좁혀졌고, 암담함이 밀려왔다. 곧개미들의 작은 발자국이 다다다다닥 찍혀서 무수히 존재했다. 몇 마리가 안에 있을지 보기가 겁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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