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270)
  • 46화

    * * *

    산박의 팀은 3일째에 두 번째 제단을 볼 수 있었다. 제단은 똑같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통로는 매우 좁았고, 통로의 천장은 끝도 없이 높았다. 초월적인 공간으로 들어감을 암시했다.

    제단은 석실에 있었다. 석실에는 결코 야만 종족이 만들 수 없는 노력과 기술이 들어가 있었다. 틈 하나 없이 맨들맨들했다.

    제단은 철로 되어 있었지만 속은 텅 비어 있었다. 키메라가 있었던 첫 번째 제단과 달리 두 번째 제단의 꼭대기에는 포효하는 짐승이 있었다. 산박의 팀은 그 상을 부수고 제단을 파괴했다.

    거친 철거 소리가 울려 퍼졌고, 철거하는 모습을 벽에 들러붙은 채 보고 있는 병정 곧개미가 있었다. 이미 곧개미들의 피해 사실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침입자에 대한 위협도는 굉장히 높았다. 어둠 속에서 병정 곧개미가 사라졌다.

    “흐으, 춥다.”

    모두는 땀을 쫙 빼고 그 땀을 닦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땀이 식으면서 체온을 삽시간에 빼앗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땀을 최대한 제거하고 다시 옷을 입었다.

    “보면 죽일 거예요. 대장삵아! 돌아보는 새끼 있으면 나한테 반드시 말해줘야 해!”

    시은이 매섭게 말했다.

    “아무도 안 본다니까요.”

    “전 예뻐서 정신 놓은 사람이 하나 있을 수 있죠. 남자의 본능이잖아요.”

    “안 본다니까요.”

    “왜 이렇게 못 믿는 겁니까.”

    “한 발 빼고 뒤돌아 계시면 믿어 드릴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충호는 그 개그가 재밌는지 웃음을 꾹 참았다. 산박이 너무 진지했기에 웃을 수가 없었다. 시은은 분명 농담을 하고 있었는데 산박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긍지 높은 대장삵이 시은을 대신해서 꼼꼼히 그들을 확인했다.

    휴식을 취하면서 충호는 탕만에게 말을 걸었다.

    “석궁을 제법 잘 쏘던데요.”

    “예? 아, 예.”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그도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충호가 먼저 손을 내밀었기에 어떻게든 잡고 싶은 마음이 컸다. 곁에서 함께 싸웠기에 알 수 있었다. 이 곰 같은 사내는 믿음직한 전사였다.

    “충호 씨도 항상 든든하시던데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탕만 씨는 장무가 두 개나 있지 않습니까. 몸을 조금 더 카르마의 시스템에 맡겨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까 보니까 장무를 전혀 쓰지 않더군요. 훈련 때는 못 알아차렸는데…….”

    “아!”

    서로 칭찬으로 시작한 대화로 서로에게 쌓였던 마음을 털어낼 수 있었다. 충호는 또 조언도 해주었다. 탕만은 생각보다 요령이 없었다. 그 큰 조언에 탕만이 감탄했다.

    “전 그냥 적용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까?”

    “본능적으로 적용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탕만 씨의 장무는 모두 장기전으로 상대를 끌고 가는 수법 아닙니까. 그런데 아까 돌진이나 싸움을 보면 전혀 그런 스타일이 안 나와서 장무가 쓸모가 없는 겁니다.”

    장탄박투와 유원족역은 모두 장기전을 유도한다. 방패 전사라는 직업에 걸맞은 장무였다. 그러나 탕만은 처음에는 너무 저돌적이었고, 그 이후에는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아하…….”

    몇 번 충호와 손을 섞어본 탕만이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싸우는 게 굉장히 수월해진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용기를 가진다면, 적어도 근위 곧개미 한 마리는 잡아둘 수 있을 겁니다.”

    “예.”

    충호는 그에게 용기를 부여해 줬다. 전과 다르게 만들었다. 고로 전에 생긴 공포심은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공포를 뛰어넘기 위한 도움닫기 판을 제공해준 것과 같았다.

    ‘선택은 그가 하겠지만…….’

    그 이상으로는 해주지 않았다. 그도 남자고, 탕만도 남자였다. 사다리를 올라가고 점프하는 데 크게 도와주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 * *

    퍼석! 콸콸콸!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곳에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석실은 얕은 물가가 되었고, 팀은 밖으로 나가야 했다.

    ‘제법 지친다. 쉴 곳을 찾아야 해.’

    산박이 곳곳을 훑었다. 땅을 파서 은신처를 만들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처음 팀원들의 말처럼 빠듯한 일정이었다. 곧개미의 굴은 도망치는 게 상책인 던전이었다.

    ‘씨앗이라도 몇 개 들고 올걸.’

    금방 자라는 넝쿨 식물 같은 작물 씨앗을 가져왔다면 자리를 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씨앗은 가진 게 없었다. 보급품은 대부분 육류였다. 칼로리를 높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소주도 있었다. 소독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술은 칼로리도 높았다. 특히 소주는 당도가 대단했다.

    던전을 걷던 산박은 벽에 있는 기어갈 만한 통로를 볼 수 있었다. 사람이 기어 다니기에는 제법 넓었다. 일꾼 곧개미들의 지름길인 듯했다.

    워낙 복잡하게 뚫어놓은 게 곧개미의 굴이었다. 일꾼 곧개미로서는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따로 벽에 그들만의 이동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더욱더 빨리 일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여길 사용한다면, 식량 창고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산박은 벽 굴의 바닥을 더듬었다. 밧줄로 만든 포대기를 끈 흔적이 제법 깊게 나있었다. 짐을 옮길 때도 쓰는 듯했다. 다용도 벽 굴이었다.

    “일꾼 곧개미는 공격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겁쟁이들이죠.”

    살아남아야지 일을 할 수 있다. 단순한 논리였다. 죽는 것보다 병정, 근위, 여왕 곧개미들을 위해서 보급을 준비하는 게 더 이득이었다. 허무하게 죽더라도 전투력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일꾼 곧개미는 워낙 많아서 죽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들어갑시다.”

    충호가 앞장섰다. 탕만이 가장 마지막이었다.

    내부로 들어갔을 때 답답함이 있을 거라 여겼지만 생각보다 여유로웠다. 엉덩이를 조금 내리면 앉아서 쉴 수도 있었다. 다리가 조금 불편했지만 이 정도면 양반이었다.

    ‘빛도 있다.’

    온화한 자수정이었다. 곧개미 굴에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이기도 했다.

    일행은 제법 깊게 탐험을 했다. 혹시 몰라서였다. 하지만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복잡하다, 복잡해.”

    산박이 중얼거렸다. 천장에 구멍이 뚫려있는 경우도 있었고, 바닥이 훅 꺼지기도 했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길이었다. 바닥이 꺼진 곳은 반드시 온화한 자수정이 존재하지 않는 매우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다른 통로는 온화한 자수정이 곳곳에 존재해서 시야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일행은 되돌아와서 자신들이 아는 곳에서 굴을 무너뜨리고 숨구멍을 내놓은 뒤 잠을 청했다.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름길 굴 곳곳에 박혀있는 온화한 자수정을 회수해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각자 다섯 개씩 챙기고도 남아돌 정도였다.

    * * *

    산박은 꿈을 꿨다. 황금빛이 가득했다. 그냥 그런 꿈이었다. 개꿈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꾸준히 공적을 올리는 산박을 빛의 신 팔라딘이 주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수많은 이들 중에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

    눈을 뜬 산박은 개운함을 느꼈다. 미약한 도움이었다. 그래도 산박은 신과의 관계를 깊게 다지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산박은 모든 팀원이 일어나길 기다리며 몸을 풀었다. 그러던 중 탕만이 고민하다 이내 산박에게 다가왔다.

    “저, 팀장님.”

    “예. 말씀하세요.”

    산박은 최대한 부드럽게 굴었다. 이 던전에서만큼은 결코 팀원을 압박해서는 안 되었다. 다른 팀원이 압박하더라도 산박은 팀장이다. 그만큼은 아군이 되어줘야 했다. 싫다면 팀장을 하면 안 되었다.

    그게 아니라면 돈을 많이 줘야 했다. 어찌 되었든 산박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던전이라는 곳에서는 모두가 목숨을 걸고 있었고, 팀장이라서 돈을 더 가져갈 수는 있었지만 그 끝은 썩 좋지 않았다. 실력 있는 전사는 떠나고, 전사는 더욱 구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당장 산박의 팀만 해도 팀에 큰 불행이 있었을 때 같은 전사에게 돈을 줬다. 죽는 사람은 전사가 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다.

    “다시 전방에 서고 싶습니다.”

    “…….”

    산박이 굳은 표정을 했다.

    ‘미쳤나?’

    의욕만 앞선 멍청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잘 돌려서 설명하고 설득해야만 했다.

    “저… 탕만 씨, 많이 힘든 거 압니다. 하지만 이제 제단을 하나만 부수면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고가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이를 인지하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예. 제 실수를 제가 바로잡고 싶습니다. 절 믿어 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강합도 큰 부상을 입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바빴다. 정신이 다친 사람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근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충호처럼 천성적으로 무덤덤한 정신을 갖고 있거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그래도 회복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혹, 제가 들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탕만은 자신의 장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번에는 다르다고 말해 주었다. 산박은 눈을 잠깐 감았다.

    ‘1:1 싸움에서는 제법 그럴듯하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상황이 악화되면 전과 똑같이 무너질 거다. 아니, 더 심하게 무너지겠지. 그게 정상이다.’

    충호가 집어넣은 건 씨앗이고 불씨다. 화려하게 타오르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냉풍이 불면 꺼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봐주지 않을 것이었다. 불씨가 활활 타오르기 전에 꺼질 가능성은 결코 제로가 아니었고, 낮지도 않았다.

    인간보다 강한 개체가 등장하는 1레벨 던전부터는 모든 게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탕만은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극복할 수 있는 씨앗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되면 좋겠지만, 안 되면 붕괴가 일어난다.’

    “좋습니다. 단, 제가 앞에 서라고 할 때만 서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그는 좋아했지만 산박은 그를 앞에 세울 생각이 없었다. 던전의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나서 탕만은 씁쓸함을 느끼겠지만 팀의 안전이 더 중요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트라우마 극복을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생명이 걸린 일이었다. 반항하는 일꾼 곧개미라도 있었으면 탕만을 시험해 보고 결정했겠지만 일꾼 곧개미는 도망만 치는 놈이었다.

    “힘이 다시 회복되어서, 기회가 된다면 일꾼 곧개미의 시체를 해골로 일으켜서 가고 싶어요.”

    시은이 의견을 냈다. 일꾼 곧개미가 돌아다니는 벽 굴에서 시체를 얻기를 원했다. 전력이 되고 머릿수가 하나 추가되는 일이었기에 조금 시간을 소모하더라도 허락하는 게 좋았다.

    막아 두었던 곳을 파다가 충호가 멈췄다. 반대편에서도 무너진 굴을 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꾼 곧개미다.’

    굴이 무너졌으니 수복하러 온 게 틀림없었다. 몇 마리가 작업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시체 하나는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시은은 충호와 자리를 바꿔 검을 찌를 준비를 했다. 굴이 좁았기에 서로 몸이 강하게 닿을 정도로 교차해야 했다.

    충호는 기분이 야릇해졌다. 시은의 몸은 육감적이고, 파괴적이었다. 특히나 석궁을 당길 수 있게 훈련을 꾸준히 해왔기에 허벅지가 탱탱했다. 여성으로서 던전 사용자가 되기 위해서 단련한 노력의 증거였지만 남자에겐 모든 게 성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시은은 환도를 찌를 준비를 했다. 단번에 찔러 머리를 취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험해도 무너진 곳에 몸이 바짝 닿아야 했다. 리치가 상대 머리에 안 닿으면 실패하기 때문이었다.

    사박, 후두둑.

    흙이 반대편의 움직임에 떨어져 내렸다. 곧, 일꾼 곧개미의 앞다리가 흙을 당겼다. 막혔던 공간이 뚫렸다. 자수정의 빛에 일꾼 곧개미의 머리가 보이기도 전에 시은은 이미 환도를 찌르고 있었다.

    콰득!

    갑각 피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일꾼 곧개미의 머리통에 시은의 환도가 박혔다. 눈썰미가 좋고 관찰력이 뛰어난 시은은 그저 소리와 앞다리의 움직임, 그 길이의 수준과 접혀있는 모습만을 보고 머리가 어딨는지 파악했고, 때려 맞혔다. 뒤에 있던 일꾼 곧개미들은 혼이 빠지게 도망쳤다.

    시은의 손이 부르르 떨며 사지를 움직이는 일꾼 곧개미의 앞다리에 닿았다.

    꿀럭, 꿀럭.

    갑각 피부의 관절 부분에서 피와 갈기갈기 찢기고 분해된 것처럼 보이는 살 찌꺼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곳에 담겨있던 생명력은 시체 마력으로 전환되고 갑각 피부에 모여들었다. 해골 곧개미에게 무기를 쥐여주고 팀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제단을 찾으러 움직였다.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늘 반드시 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고, 불필요한 짓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 시간을 거의 쓰지 않고 아끼고 아꼈다.

    “통로를 막아놨네.”

    급조된 흙벽을 보며 산박이 혀를 찼다. 메마른 벽이 아니라 조금 습기가 묻어나 있는 흙벽이었기에 최근에 만든 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식량 창고가 있어서 막아 놨을까요?”

    “여왕개미일 수도 있죠.”

    “돌아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 한마디씩 했다. 산박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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