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시은이 깊은 사고력으로 산박의 의중을 미리 파악한 반면에 다른 이들은 곧이곧대로만 듣거나 흘려버렸다. 그러나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일단은 되돌아가죠. 제단을 미리 파괴해야 하니까요.”
“예. 언제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올지 모르니까요.”
모든 팀원이 찬성했다.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사람 일이라는 건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일을 미리 해놔야 했다.
“혹시 미리 제단을 파괴하면 곧개미들이 다른 제단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가능성은 있었다. 그렇기에 산박조차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의심은 응당 가져야 했다. 아무리 야만 종족이라고 해도 도구를 다루는 곧개미들이었다. 생각할 줄 알았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놈들은 음흉한 짓은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제단을 전력으로 지키려고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거랑 음흉함이랑 뭔 상관이에요.”
탕만의 핀트가 엇나간 말에 시은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아, 그런가요.”
산박은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제단을 미리 파괴시켜 놓는 게 나을 듯했다. 지성 종족이라면 더더욱 아직 모를 때 부숴놔야 했다. 또한 그는 적들의 시간을 끄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제단으로 가는 통로의 천장은 끝도 없이 높지만 폭이 좁으니 거길 어떻게든 무너뜨려 놓으면 될 것 같은데…….”
“그러면 시간만 더 잡아먹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시간이 문제였다. 고민해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 종류의 문제였다. 미래를 알 수 없었기에 뭐든지 불확실했다. 고로, 이런 종류의 문제는 산박이 결정해야 했다.
“…부수겠습니다.”
적의 숫자가 많다. 제단을 부술 수 있을 때 부수는 게 그나마 나은 판단으로 여겨졌다.
되돌아가는 길은 힘들지 않았다. 적이 뭉쳐 다니는 만큼 만날 확률이 적었고 무엇보다도 보급품을 적재한 구덩이 야영지의 상태만 봐도 이곳은 확실하게 후방 취급을 받고 있었다.
결정을 한 그들은 마른 벌레가 담긴 보급 상자를 전부 다 태웠다. 상자가 밧줄로 만들어져 있어서 장작으로 쓰기 안성맞춤이었다. 부싯돌로 탁탁 해주기만 하면 끝이었다.
구덩이 야영지에 쌓인 보급품을 태우고 그들은 서둘러 제단으로 향했다.
깡! 깡!
제단 철거 작업은 고될 수밖에 없었지만 속이 비어있는 철 구조물이라 부서지는 과정이 눈에 보여서 더욱 열정을 태울 수 있었다.
“헉헉. 이거 언제까지 부숴야 합니까?”
키메라상은 이미 찌그러뜨린 지 오래였다. 가장 그럴듯해 보여서 부쉈지만 파괴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고, 뭔가 특별한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휴식을 취할 때도 땀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했다. 체온을 순식간에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던전은 매우 추웠다. 덕분에 산박의 제단 파괴 선택은 실로 탁월한 선택이 되었고, 큰 믿음과 팀에서의 영향력을 강하게 움켜쥘 수 있었다.
‘뭘 해도 안 되었을 거다.’
그들은 1레벨 던전을 상대로 만용을 부렸다. 제법 그럴듯하게 잘 구했다고 생각했던 팀원도 정답이 아니었다. 장비가 빠져있기 때문이었다. 1레벨 장비로 전부 다 도배하고 소모품도 줄줄이 달고 와야 진짜 1레벨 던전을 공략할 만했다.
‘어리석었지.’
산박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단을 파괴해야 했다.
총 세 시간에 걸친 파괴 행위 끝에 변화가 찾아왔다.
퍼석!
그때, 수박이 갈라지는 듯한 경쾌한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제단의 가장 아랫부분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콸콸콸.
피는 석실을 얕은 물가로 만들 정도로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미친.’
실로 공포스러운 현상이었기에 산박은 괜히 속으로 욕을 했다.
“이걸로 파괴된 듯하네요.”
시은이 자신도 모르게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충격적인 장면을 앞에 두고 그녀의 말투와 감정에 관심을 갖는 이는 없었다. 썩은 피 냄새는 지독했다.
“바로 가겠습니다.”
“예.”
반대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가져온 보급품은 이제 3일 치만 남은 상태였다. 아낀다면 5일을 먹을 수 있었지만 전투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아끼는 짓은 하기 힘들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게 옳았다. 자신보다 힘이 더 강한 괴물과 싸우는데 배가 든든하지 않는다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터였다.
‘무리를 해야 한다.’
힘을 제법 소모했지만 일행은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제단을 찾아서 파괴해야 했다. 곧개미들이 언제 알아채고 수비 태세에 들어갈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유사시에는 화염 물약을 쓰면 됐다. 본래는 식량 창고를 모두 턴 다음 바짝 약이 오른 곧개미를 처리하는 데 쓰려고 했지만 목표가 달라졌다. 그렇다면 용도도 달라지는 법이었다.
‘더 많은 범위를 돌아다닐 수 있어야 한다.’
최단기간 내에 제단을 확보하고 파괴해야 했다. 적어도 4일 이내에 던전 붕괴를 유도해야 했다. 그게 산박의 주목표였다. 하루만 지체돼도 곧개미들의 대응은 달라질 터였다. 반대로 단 하루만 던전 붕괴를 앞당길 수 있어도 팀은 매우 안전하게 던전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하루의 차이는 유의미했다.
“단 하루만 앞당기면 됩니다.”
“저희는 단 4일 만에 던전에서 도망쳐야 합니다.”
“조금은 무리를 해야 합니다.”
산박의 거듭된 설득도 필요 없이 일행 또한 조금 모험을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제단을 두 개만 더 부수면 된다는 것이 매우 희망적이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검은 피로 가득한 석실을 빠져나와서 던전을 이동했다.
벽에 들러붙은 슬라임 같은 물질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곳곳에서 시체가 뽑혀져 있었다. 야만의 제단에 공양하거나 보급으로 쓰고 있을 터였다. 곧개미가 제대로 활동을 시작하고 그들을 노리고 있다는 반증이었기에 절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곧개미가 몇 마리나 되는지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더 불안했다. 다행이라면 복잡한 던전 구조 덕분에 곧개미들도 그들을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다는 점이었다.
‘놈들은 잘못짚고 있고, 우리는 뒤에 있다.’
산박의 팀은 곧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은 그 누구도 지키지 않고 있었다. 다만 제단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는데, 통로 자체가 넓었기 때문이었다.
대장삵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훌륭한 척후병이었다. 인간보다 아주 작아서였다.
“믿어라.”
근엄하게 말하며 대장삵이 통로로 힐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매우 느릿느릿하게, 마치 나무늘보처럼 움직였다. 뒷모습은 꼬리가 위로 바짝 서있었고 X꼬가 매우 발랄하게 보였다. 곧 대장삵이 서둘러 달려왔다.
“어때?”
“일꾼 곧개미들이 작업하고 있다. 특이하게 안에 병정 곧개미가 지키고 있다.”
곧개미들의 입장에서는 통로로 들어오는 놈만 보면 되기에 편했다. 매우 수동적이었다. 독특한 방위 체계이기도 했고, 버티기가 쉬워 보였다.
산박은 곧 내부를 확인했다. 그곳은 밧줄을 만드는 작업장이었다.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였지만, 적어도 곧개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대부분의 운반이 밧줄을 엮어서 만든 상자나 밧줄 자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개미의 모습으로는 밧줄같이 딱딱하지 않은 상자가 필수적이었다. 딱딱한 상자를 잘못 거칠게 움직였다가는 갑각 피부가 부서지거나 균열이 날 수 있었다. 스크래치라도 나면 전투에서 불리했다. 게다가 부피가 있는 딱딱한 상자는 좁은 통로에서 끌고 다니기에 불편하기도 불편했다.
“병정 곧개미가 고작 두 마리…….”
“혼란을 유도하려면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요.”
“밧줄 상자를 생각하면, 저걸 다 태우면 보급에도 차질이 있을 수 있어요. 밧줄 상자가 부족해지니까요.”
타격하는 게 좋다고 여기는 팀원들이 많았다. 허나 산박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시간 싸움입니다. 저희는 제단만 찾습니다. 지키는 곧개미도 근위 곧개미가 아닙니다. 저희를 찾기 시작했고, 중요한 시설을 지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산박은 단호했다.
“제 말을 따라 주세요.”
거듭 말하자 모두 산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딴소리를 낼 사람은 없었다. 그간 산박이 베푼 것도 있고, 그가 가진 카리스마와 던전 공략에 대한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었다. 당장 아까의 전투에서만 해도 두 마리를 죽였다. 그 덕에 그의 판단력은 더더욱 가치 있게 여겨졌다. 믿고 따르는 것이었다.
밧줄 작업장을 공격한다면 혼란스러워하기보다는 독이 오를 것이다.’
곧개미의 호전성, 밧줄의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혼란보다는 분노를 느낄 게 분명했다.
한 시간을 걸어가고, 잠깐 야지에서 휴식을 취했다. 보통이라면 땅을 조금이라도 파서 몸을 반엄폐 하며 적의 방심을 기대했겠지만 병정 곧개미의 눈은 매우 좋았다. 반엄폐를 하나 안 하나 똑같았다.
‘대장삵의 귀로도 간파하기 쉽지 않다.’
또한 곤충은 다리 개수가 많아서 체중이 분산되고 자연스럽게 소음이 줄어들었다. 매번 적을 먼저 알려줬던 대장삵도 여기에서는 무력했다.
“…….”
모두 눈을 감고 체력을 비축하기 바빴다. 던전의 추위 때문에 더더욱 많은 열량이 소비되고 있었기에 겨드랑이에 양손을 넣고 몸을 웅크렸다. 산에서도 살아남는 보온 방법이었다.
시은은 너무 대놓고 산박의 옆에 들러붙었다. 어차피 모두 꽁꽁 뭉쳐 있었지만, 심하긴 심했다. 충호와 탕만은 입이 근질근질했다. 당장이라도 놀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약간 그런 거 있지 않아요?”
“어떤 거요.”
“이번 던전에서 안전하게 벗어나면 식사 같이해요. 이런 거 있잖아요.”
“말한 사람은 곱게 못 죽던데요.”
산박은 시은의 잡담에 어울려 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지금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굴렸다.
“시은 씨, 그 해골 곧개미를 좀 이용해야겠어요.”
“어떤 식으로요?”
“시체처럼 있다가 뒤를 덮치는 거죠. 그럼 관심이 확 끌릴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더라도 한 놈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겠죠.”
“그렇죠.”
제법 그럴듯했다. 시은이 그렇게 생각하자 해골 곧개미가 움직여서 시체처럼 늘어졌다. 그들이 온 방향에 쓰러져 있었다. 만약 적이 온다면 그곳에서 올 공산이 컸다. 제단에서 크게 한바탕했고, 거기에 이어서 구덩이 야영지를 급습했기 때문이다.
‘놈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휴식을 끝내고 몸을 푸는 그들의 앞에 추격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온화한 자수정을 박은 가죽 갑옷을 입은 근위 곧개미들이었다. 그들을 추격대라고 생각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순찰을 도는 곧개미는 병정 곧개미들이다. 그들은 다분히 표적화가 끝난 적을 노리는 놈들이었다.
일행은 전투 준비를 했다. 탕만은 전방에서 빠졌다. 그는 시은 대신에 석궁을 들고, 시은이 환도를 뽑은 채 충만의 옆에 섰다.
“괜찮겠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시은이 충만의 말에 짧게 대답했다. 호불호가 확실한 여자는 실로 매력적이었다. 물론 싹수도 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아까 말했던 대로 갑니다.”
해골 곧개미의 후방 치기에 맞춰서 단번에 수비 태세에서 공세를 전환하여 돌격하는 전술을 준비했다. 실패해도 괜찮았다. 후방 기습 때문에 적은 뭉쳐있을 것이고, 화염 물약을 써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만큼 적의 숫자가 많았다. 열 마리에 달하는 근위 곧개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척 봐도 정상적인 전투는 할 수 없었다.
“헉. 헉. 흐윽.”
탕만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숨이 헐떡거려 왔다. 공포. 그는 조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눈을 감고 차분하게 심호흡을 했다.
‘뭐라도 해야 한다. 해야 해.’
탕만은 눈을 뜨고 기회를 노렸다. 산박이 몇 번 슬링질을 했지만 상대가 쳐내서 썩 좋은 효과는 보지 못했다. 반면 제법 장력이 강한 석궁은 매우 빨랐고, 산박의 슬링 때문에 산만해진 상태에서 몇 놈을 다치게 하였다.
“까다라라락!”
병정 곧개미와는 다르게 근위 곧개미들은 소리를 내며 서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산박은 입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근위 곧개미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거 안 되겠다.’
산박이 시은에게 말했다.
“놈들이 중간에 왔을 때, 바로 일어나서 난동을 부리게 하세요. 그들이 해골 곧개미를 노릴 때 맞춰서 화염 물약을 슬링으로 쏠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부했다.
“최대한 투척 단검을 많이 쏴주세요. 허공에서 터트려야 잘 퍼집니다.”
“예.”
모두 오른손에 단검을 쥐고 탕만 또한 석궁을 고쳐 잡았다. 실패할 수 있었기에 여러 개를 쏴야 했다.
서른 걸음 내로 들어온 곧개미들은 무기를 부딪치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쓰러져 있던 해골 곧개미가 몸을 일으켜서 두 개의 앞다리를 닥치는 대로 휘두르며 곧개미들을 노렸다. 평범한 일꾼 곧개미처럼 생겼기에 근위 곧개미들은 순간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멈칫거리는 사이에 해골 곧개미가 양손에 쥔 창이 휘둘러졌다.
“꽈르륵!”
깜짝 놀라며 근위 곧개미들이 덤벼들었다. 동시에 산박이 슬링을 휘두르며 단번에 화염 물약을 투척했다. 투척 단검이 쏴졌다. 물약을 맞힌 건 탕만이 쥔 석궁이었다.
화르르르!
다섯 마리가 넘는 근위 곧개미가 화염에 휩쓸렸다.
“튀어요!”
산박이 소리쳤다. 싸우는 척을 한 것은 그저 기만에 불과했다. 상대가 느리게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경계심을 갖도록 하며 이동 속도를 줄여 명중률을 높였다. 모두 언제 싸울 것처럼 굴었냐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려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