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270)
  • 36화

    검은색 옷을 입은 장굉려(章宏藜)는 볼일을 마쳤기에 몸을 일으켰다. 장 노인이 혀를 찼다.

    “뭘 벌써 가려고 해? 하룻밤 자고 내일 가도 늦지 않았다.”

    “아이고, 그럼 저는 놉니까?”

    “해 봤자 0레벨 던전만 돌잖아. 그러지 말고, 어떠냐? 다시 1레벨 던전을 공략해 보는 게.”

    “…그 산박이라는 놈의 팀 속에서 말입니까?”

    “그 정도면 상급이다. 난놈이지. 서로 사업 같이하는 사이라 추천도 쉽다.”

    “하지만 어르신, 전 암살자입니다. 던전 공략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척후뿐입니다. 기습이 전부고요. 모두 목숨을 거는데 저 혼자 치사하게 구니 어느 사람이 좋아합니까?”

    “그러니 안면 있는 사람한테 가라는 거잖아. 응? 그렇게 몇 년 허비했으니…….”

    “기울어 가는 연기 장가(家)의 힘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괜히 미움받을까 걱정이기도 하고요.”

    장 노인은 두 번 제안하지 않았다. 그것도 자기 복이었고 업보였다.

    “알았다. 3년 전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죄송합니다.”

    쯧쯧.

    장 노인은 혀를 찼다. 잘난 것 없는, 세종시가 들어오기 전에 연기군에 자리 잡고 있던 씨족에 불과한 성씨를 지키려고 하는 모습은 실로 대단했지만 자신의 미래에 투자하지도, 투자받기도 싫어하는 모습은 소인배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푹 쉬거라.”

    “늦은 밤, 편안히 주무십시오.”

    굉려가 물러났다.

    다음 날, 장 노인은 당산 부동산을 운영하는 함희두를 불렀다. 그는 총알처럼 튀어 왔다.

    “부르셨습니까.”

    “너 산박 던전 사용자가 기르고 있는 사과나무에 대해서 좀 알아 와라. 땅은 괜찮은지 물으러 가는 김에 적당히 듣고 와.”

    “예. 혹, 제가 알아야 하는 게 있습니까?”

    “사과나무로 사업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와. 돈이 되는지 보라고.”

    “예, 알겠습니다.”

    함희두는 명상에 잠겨있던 산박과 잠깐 대화를 나눴다. 홍삼 엑기스를 한 첩 선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덕에 몇 가지 질문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나무 생육은 확실하게 좋긴 좋습니다. 보통 사과는 3년이나 5년은 걸려야 하잖아요. 근데 이 주문을 쓰면 바로 열매를 맺는 사과나무를 키울 수 있습니다. 나중에 힘에 여유가 있으면 과수원을 크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산박 또한 현재 돈줄이 말랐기에 장 노인이 도와주면 좋겠다는 뜻을 은근슬쩍 내비쳤다.

    함희두는 이를 다시 장 노인에게 전하였고, 장 노인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산박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사과나무를 관리할 놈을 추려 내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힘을 돈을 버는 데 많이 할애하고 있는 산박은 과수원에 많은 힘을 부여할 수 없었지만 장 노인이 일단 일을 시작하라며 산박을 부추겼다.

    ‘지금 하지 않으면 다른 놈이 채가기 쉽다.’

    사과 농원에서 그냥 사과만 따면 되는 일이었다. 드루이드의 주문을 받아서 큰 나무였다. 잡초 속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는 신기한 나무였다. 꾸준히 관리해 주면 더욱 금상첨화일 터였다.

    항상 그렇다. 이미 성공한 사람에게 들러붙으면 그가 눈이나 깜짝할까? 바닥부터 올라가려는 자와 함께해야 했다. 그래야 동반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산박이 지금 그러한 상태였다. 그는 당장 사과 과수원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장 노인이 추진력을 빵 터트렸다.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고아원에 비료를 가져다줬던 장지건이 장 노인의 연락을 받고 아내와 함께 본가에 왔다. 둘 다 한복을 다소곳하게 챙겨 입고 왔다. 장 노인은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음, 확실히 풀로 다리미질했군.’

    아내의 정성이 한복에 보였다.

    “앉아라.”

    “예. 절 받으십시오.”

    “절 받으세요.”

    지건의 아내인 윤다연(允多然)도 똑같이 말하며 큰절을 올렸다.

    “오냐. 남편 때문에 많이 힘들지?”

    “아니에요. 얼마나 노력하는데요.”

    그 뒤로 상투적인 말들과 근황이 오갔다.

    “일을 한다고?”

    “예. 야쿠르트 아줌마가 되었어요. 짬짬이로 시간을 낼 수 있고, 네 시간만 하면 되거든요.”

    “그것 참 고생이 많다. 내가 미안해질 지경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복장 잘 갖춰 입고 오라고 하셨습니까?”

    그 말에 장 노인이 봉투를 하나 꺼내서 지건에게 건네줬다.

    “열어봐라.”

    지건이 봉투 안에 있는 문서를 꺼냈다. 땅문서였다.

    “이게……?”

    “공부 못한다고 대학도 안 보내지 않았느냐. 너 사업 하나 해야겠다. 트럭 몰고 이 친척, 저 친척 물건 가져다가 옮기는 일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가, 감사합니다.”

    지건이 순수하게 감사를 표했다. 족히 5만 평이 넘는 땅이었다.

    “농사를 짓든 뭘 하든 해라. 농기구 대여하는 건 걱정 마라. 농협에 우리 가족이 있지 않느냐. 기름값만 내면 될 것이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가진 재능에 따라서 하는 일이 달라진다. 공부 못하는 애에게 수억을 들여서 연봉 좋은 직업에 놓는 건 그들 집안으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옛날이면 달랐겠지만 ‘판타지 쇼크’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대한 제국이 한순간에 대한민국이 되어 버렸다. 그 차이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일본이 크게 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백제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그들이었지만, 판타지 쇼크로 서울이 송두리째 뜯겨 나가자 마음속에 숨겨오던 야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사과나무를 심을 곳도 작게 마련해 놔라. 차근차근 넓혀가게 될 거다.”

    “예.”

    지건은 그 어떤 의문도 품지 않았다. 장 노인은 산박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다른 농사보다 손쉬울 수밖에 없다고 누누이 언급했다.

    모든 땅이 드루이드의 사과나무로 가득 차기 전까지 남는 땅에는 다른 농사를 지으며 고아원을 도와주라고 했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산박은 그가 살았던 고아원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그를 이용해서 산박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었다.

    “잘 알아들었느냐?”

    “예.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지건이 확답했다.

    “고아원이 대리 운영 하는 밭에도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봐줘라.”

    “예.”

    몇몇 주의해야 할 일들을 언급하고 장 노인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평범한 드루이드들은 산에서 살고 집도 움막이다. 어떤 놈은 굴에서 살기도 한다. 종종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환경 파괴를 하는 이들에 대한 파괴적인 충동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

    지건은 이를 꼼꼼하게 들었다.

    “직업의 특성에서 벗어나 있는 산박은 중히 여겨야 하는 자다. 드루이드의 힘으로 사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돈독이 오른 게 멋지지 않느냐? 클클.”

    장 노인이 섬뜩하게 웃었다. 그리고 담배 연기를 입에서 길게 뿜어냈다.

    ‘직업의 특성보다 더 큰 놈에게 잡아먹혀 있다는 뜻이지.’

    그런 놈은 돈이 된다. 꿈이라는 것만큼 허황된 것도 없지만, 사람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건 확실했다. 앞으로도 산박은 달려 나갈 것이다. 장 노인은 그와 협력하며 콩고물을 주워 먹으면 그만이었다. 완벽한 협력 관계였다.

    * * *

    아주 작은 힘으로도 ‘나무 생육 주문’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하며 산박은 창고의 사과나무에 더해 지건이 받은 땅의 나무 한 그루에도 주문을 주기 시작했다. 분명 오래 걸릴 텐데도 장 노인은 이를 기다려 주었다. 그게 산박에게는 큰 배려로 다가왔다.

    “어딜 갔다가 오시는 거예요?”

    창고에는 손님이 와있었다.

    “뭐예요?”

    “하이! 팀장님~”

    시은이 손을 흔들었다. 검은색 돌핀 팬츠에 상의는 사이즈가 한 치수 큰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왜 제 전화 씹으셨어요?”

    “메신저로 충분히 대화할 수 있잖아요.”

    “그건 읽씹하셨잖아요.”

    “답변할 가치도 없었어요. 왜 이렇게 무례해요? 여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저 삼거리 부동산 아저씨가 가르쳐 주던데요?”

    산박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은의 외모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었다. 남성들에게 실로 초인적인 집중력을 줄 수 있었다. 작은 계단 앞에서도 손을 내밀면 누구나 웃으며 달려와 그녀를 잡아당겨줄 터였다.

    ‘이런 미녀가 왜 던전 사용자 같은 일을 할까.’

    고개를 젓는 산박에게 시은이 옆에 둔 검은 봉지를 들어 올렸다.

    “삼겹살에 소주 사 왔어요.”

    “일없어요. 가요.”

    “아! 그러지 말고요! 진짜로!”

    산박이 손을 잡아채서 잡아당겼지만 석궁도 혼자서 장전하는 여자가 바로 시은이었다. 슬렌더함이 돋보이는 건 인체 비율 때문이고 여자치고는 체중이 제법 나갔다. 결국 산박이 힘을 천천히 줄이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여자라서 팰 수도 없고.’

    팰 이유가 있어야 팼다. 시은의 경우 그 이유가 적었다.

    “진짜, 진짜로!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어요.”

    “말하고 가요.”

    “술이 좀 들어가야…….”

    궁색한 변명에 산박은 일회용 버너를 가져와서 마당에 불을 피웠다. 프라이팬을 놓고 달군 뒤 단번에 고기를 집어넣었다. 마지막에는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했다. 키친타월로 고기에 묻은 기름도 뺐다.

    “반찬도 있어요?”

    “부추무침뿐이지만.”

    고기와 같이 먹기에는 일품이었다. 쌈장과 기름장도 내왔다. 본격적이었다.

    “요리도 하시나 봐요?”

    “돈 아끼려고요.”

    “뭐 하시려고 그렇게 모으세요? 여자?”

    “시끄러워요.”

    산박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 모습에 시은이 배시시 웃으며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짠.

    산박이 잔을 부딪쳐 주자 시은이 꾸밈없이 크게 웃었다.

    “아까는 그렇게 가라고 하시더니, 술친구가 필요하긴 하셨네요?”

    “없는 것보단 낫죠.”

    서로 반병씩 비웠다. 시은은 한 병을 더 마시려고 했지만 산박이 제지했다.

    “간단하게 반주만 하고 가요.”

    “아, 여기서 막는 건 좀 에바인데. 오늘 진짜 술 잘 들어갔거든요.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할게요.”

    산박은 소주를 따라주고 아예 소주병을 밀어냈다.

    시은은 소주를 입에 담았는데, 술이 주륵 흘러내려 목을 타고 내려가 새하얀 블라우스를 적셨다. 흰색에 대비되는 검은색 속옷을 입고 있어서 안 그래도 비치는 게 더욱 확연하게 보였다.

    “뭘 흘리고 있어요.”

    산박이 대충 휴지를 건네줬다.

    “고마워요.”

    시은이 산박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산박의 반응을 살폈다. 남자는 감사 표현에 약한 법이었지만 산박은 남은 고기를 박박 긁기 바빴다.

    “그래서? 본론을 꺼내봐요.”

    산박이 입에 묻은 기름을 휴지로 닦으며 상을 옆으로 두자 시은이 별수 없이 입을 열었다.

    “화염 물약 때문이에요. 원래 팔고 있던 거래처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요. 그래서 그쪽과는 손절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위약금 같은 건 괜찮아요?”

    “네. 애초에 그렇게 길게 가려던 게 아니라서요. 제가 장기 계약으로 안 가니까 이번에 제 기를 확 누르려고 하는 것 같아요. 하! 이번에 당진 쪽에 새로 갤러리가 열려서 거기에 가야 하는데 그 미친놈들 때문에 시간도 빼앗기고.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요.”

    산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술을 보러 가는 데 큰돈 쓰는 걸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그 모습에 시은이 한 소리 했다.

    “뭐예요. 그 예술을 낮잡아 보는 듯한 고갯짓은.”

    “그냥, 이해가 안 되니까요.”

    “다른 사람의 취미니까 이해하지 말고 그러려니 하셔야죠.”

    “이건 제가 잘못했네요.”

    “괜찮아요. 팀장님이시니까.”

    시은이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다리를 꼬았다. 돌핀 팬츠를 입고 있었기에 새하얗고 잡티 하나 없는 허벅지가 겹치며 더욱 시각을 자극했다.

    “좀 가려요.”

    “보기 싫으면 안 보시면 되죠. 왜요? 계속 보게 돼요?”

    산박이 대답하지 않자 시은이 다리를 풀었다.

    “어쨌든, 거래처가 문제라면 트럭 상인 연락처는 하나 드릴 수 있어요. 저도 거길 통해서 유통을 다 맡기고 있거든요.”

    “명함은 없겠죠?”

    산박은 명함 대신 번호를 말해줬다. 시은은 스마트폰에 이를 저장하고 일어났다. 이걸로 산박에게 좀 더 다가갔으며, 쓸데없는 의심을 지울 수 있었다. 산박에게 직접 박조조의 연락처를 받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시은은 그런 번거로운 짓을 또 반복했다.

    ‘그 트럭 상인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시은이 모르는 산박을 말해줄 것이었다. 그건 제법 기대되었다.

    ‘중요할 때에 상인을 죽이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것도 제법 기대가 되었다. 시은은 나무 위에서 물을 마시는 사슴을 보는 표범처럼 입술을 핥았다.

    막 갈 준비를 하려던 시은에게 산박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고 갈 생각 마세요.”

    “예. 갑니다, 가요. 이렇게 쫓겨나네. 팀원을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구시렁거리는 시은을 산박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배웅해 줬다. 주문 사용자에 연금술도 할 줄 아는 마녀 직업은 인원이 적은 팀 상황에 아주 보탬이 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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