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270)
  • 34화

    <던전 그 후>

    “아니, 시은 씨는 왜?”

    술이 제법 들어간 산박이 단박에 반응했다. 전사 두 명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 그들의 동기를 위해서 술자리에서 경매를 폈는데 엉뚱한 사람이 툭 튀어나와서 먹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그녀는 화염 물약을 파는 마녀였다. 돈 사정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산박이 내켜 하지 않았기에 시은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왜요? 저도 칼 쓰고 석궁 쏘고 다 하는데요? 심지어 전 손목 치기도 특기 중의 특기라고요!”

    “그럼 전방에 서야죠!”

    “주문 사용자잖아요!”

    두 사람이 티격태격거렸다. 산박은 한발 뒤로 물러섰다. 시선이 느껴져서였다. 충호와 강합 모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그냥 사귀시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산박은 그런 말을 단번에 일축하고 또 경매를 독촉했다. 강하게 주제를 돌리자 다른 이들도 다시 경매에 집중했다. 충호와 강합 모두 피 묻은 기사의 목패가 가진 명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귀찮게 다른 도시까지 가서 경매에 참여해 업어 오는 물건이다. 그게 아니면 최고가로 사야 하고. 이번에 얻는 게 무조건 이득이다.’

    접근성을 생각하건 비용을 생각하건 시간을 두고 고민해도 이 자리에서 얻는 게 우선이었다.

    “31.”

    “31 쩜 오.”

    “에이, 쩜 오는 좀…….”

    시은이 농담을 쳤다. 하지만 효과는 뛰어났다. 만 원씩 경쟁이 붙었다.

    시은은 조금 침묵이 이어지기도 전에 오디오를 채웠다. 산박은 그녀가 경매에 불을 붙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관능적인 보이스에는 실로 남성들의 남성성을 돋보이고 과시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산박 또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시은에게 홀렸을지도 모르고, 그녀의 관심 하나 받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평범한 외모를 지녔고 덩치도 평범했다. 키는 평균보다 높았지만 외모적 장점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전형적인 동양인의 체형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50!”

    순식간에 경매가가 큰 값이 되었다. 충호는 그 덩치에 걸맞게 사회에서 편하게 살았고, 그 덕을 지금 보고 있었다. 그저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위험도 존재했다.

    문명인은 자신들의 고결함을 외치지만 인간의 문화 속에는 야만스러운 것들이 많았다. 그건 앞을 가로막는 소형차를 향한 단호한 빵빵거림과 같았다. 외제 차는 2초는 기다려 줘도 소형차에는 가차 없었다. 그것이 문화인이 가진 야만스러움이었다.

    “끄응…….”

    강합은 더 이상을 말하지 못했다. 술이 확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충호가 따봉을 들어 올렸고, 강합은 엄지를 아래로 내리며 경매를 포기했다. 산박은 바로 목패를 충호에게 건네줬다. 그는 목패를 소중히 품에 넣었다.

    “하하하!”

    “돈 계산은 확실하게 해주세용.”

    시은이 콧소리를 냈다. 세 명에게 16만 원씩 들어갔다. 큰돈이었지만 손쉽게 아이템을 얻은 것으로 충호는 만족하는 듯했다. 호탕했다. 어쨌든 이득은 맞았다. 시은에게 휘둘리기도 했지만 결국 이득이었다.

    시은은 붉은 혀를 내밀어서 입술을 핥았다. 소금 묻은 참기름의 고소함과 짠맛이 났다.

    ‘이걸로 충호는 돈이 많이 줄어들어서 더욱 우리 팀에 충실해지겠지.’

    산박이 그를 아끼는 게 절로 느껴졌다. 충호가 이 팀에 애착을 갖게 할 시간을 이번 일로 벌 수 있을 것이었다.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이런 보험 하나 들어놔도 나쁘지 않았다.

    ‘중요할 때 충호를 산박에게서 끊어 낸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시은은 충호를 끌어당기면서 동시에 충호를 끊어내는 상상을 했다. 실로 기괴한 인성을 지닌 인간이었다. 파괴하기 위해서 관계를 깊게 한다.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생각이었다.

    시은의 눈이 산박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깊다. 자신과 함께 나란히 연못을 바라보더라도 그는 연못이 아닌 다른 뭔가를 보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뭘 보고 있는 건지 궁금해.’

    꼭꼭 숨겨놓은 그 신념. 그게 완성되는 걸 시은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부수고 싶었다.

    “강합 씨가 몇 달 요양을 해야 할지 모르니, 일단 팀원 한 명을 더 뽑을 생각입니다. 임시로요.”

    “임시…….”

    강합이 중얼거렸다.

    “강합 씨가 임시 팀원이 되는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모르는 거니까요.”

    “1레벨 던전은 언제 가실 생각이십니까?”

    “못해도 2주 혹은 3주는 쉬고 갈 생각입니다. 충호 씨는 생각보다 상태가 좋으신 것 같아서요.”

    “예. 전 괜찮습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충호가 대답했다. 그는 천성이 전사였다. 뇌진탕의 감각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말끔하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반면 강합은 허벅지에 박힌 랜스 차징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기억이 언제 사라질지는 몰랐다.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뭘 선택하셨어요? 단전 때, 팀장으로서 알고 있어야 해서요.”

    산박의 말에 한 명씩 대답했다. 가장 선배인 시은이 첫 번째로 말했다.

    “전 레벨 업을 위해서 카르마를 축적했어요.”

    마녀의 손길이라는 공격 주문을 얻는 것으로 시은은 만족했고, 2레벨로 향하는 길을 준비했다.

    다음은 강합이었다.

    “전 기술을 택했습니다. 기본 방패술을 획득했습니다.”

    강합은 쌍검술과 투척술을 기술로 다루는 자였다. 괴물과의 전투에서 쌍검은 정말 욕을 한 바가지 먹을 정도로 단점투성이였다. 이 때문에 그는 1레벨 던전을 두 번 다니며 보상 모두를 기술을 얻는 데 사용했다.

    “전 주문을 택했습니다. 까마귀 쇄도입니다.”

    반면 그림자 기사인 충호는 제대로 된 주문을 원했다. 하이브리드의 완전성을 노렸다. 팀장인 산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지.’

    칠난균이라는 훌륭한 순무를 가지고 있는 서충호였다. 기술 또한 나쁘지 않은 두 개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림자 칼날 같은 시답잖은 주문이 아쉬웠는데, 그걸 해결하고자 했다.

    “팀장님은요?”

    시은의 말에 산박이 눈 옆을 긁었다.

    “나무 생육요.”

    “…….”

    잠깐 침묵이 돌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후진해서 아까처럼 돌아왔다. 그래야만 했다.

    “강합 씨의 부활을 기약하며!”

    마지막 한 잔을 집어삼키며 뒤풀이가 끝날 듯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제 팀명을 정하는 게 어때요? 임시로 태산박의 공략 팀은 아니잖아요.”

    “아이디어가 있어야죠.”

    산박의 말에 시은이 냉큼 대답했다.

    “옥시모론(Oxymoron). 제가 좋아하는 모순 어법의 영어 발음이에요.”

    “옥시모론.”

    “팀 옥시모론.”

    너무 있어 보이는 말이었다.

    “모순 어법이 뭔데요?”

    배움에 열과 성을 다하지 않은 강합이 물었다. 시은이 검지부터 하나씩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예시를 말해줬다.

    “소리 없는 아우성. 교과서에서 본 적 있죠? 그런 거예요. 침묵의 소리도 있고요.”

    “서로 같이 있을 수 없는 두 단어를 의도적으로 붙이는 방식이라는 거네요.”

    “네. 있어 보이잖아요.”

    시은의 말에 둘 다 찬성했다. 멋진 팀 이름이었다. 반면 산박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팀의 이름 뜻이 혹시나 다른 이들에게 주저함을 줄 수 있어서였다. ‘모순’이라는 단어는 썩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뭐~ 그냥 제 아이디어를 말씀드린 거예요. 태산박의 공략 팀보다는 옥시모론이 낫다는 건 부정할 수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산박은 입을 다물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나쁘지 않잖아요.”

    다른 팀원들의 성화에 결국 산박도 고개를 끄덕였다. 옥시모론은 그냥 이름일 뿐, 억지스럽게 해석할 필요는 없었다.

    “팀 옥시모론의 탄생을 위하여!”

    시은이 가장 하이 텐션을 유지했다. 그녀는 실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뒤풀이가 끝이 났다.

    * * *

    산박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고아원에 맡긴 밭을 확인하고, 장 노인을 찾아가기도 했다. 생각보다 그가 가진 영향력이 커서였다. 장 노인은 부동 지구의 큰손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를 통해서 빠르게 정보를 취득할 수 있었다.

    “자네가 없는 사이에 돈지랄하러 온 놈들이 있더라고.”

    “예?”

    “종자쟁이들 말이야. ‘경기도 종자 관리소’라고 들어는 봤나?”

    “아뇨. 처음 듣습니다.”

    “손에 흙 묻히는 사람들, 땅 좀 있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어. 요즘 그 새끼들 때문에 난리야. 예전부터 그랬지만 이제는 더해. 쯧! 농사짓는 이들한테 종자로 장난을 치거든.”

    “듣기만 해도 끔찍하네요.”

    “아무튼, 그쪽 영업 사원이 제법 소문에 밝은지 고아원을 방문했다더라. 내년 봄에는 속 좀 쓰릴지도 몰라.”

    “종자로 장난을 쳐서요?”

    “그래. 매년 가격이 늘어나는데, 사람 봐 가면서 비싸게 팔기도 하지. 예전에는 경매식이었는데 이제는 영업식이야.”

    사원이 돌아다니며 판다는 소리였다.

    “그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어쩌긴 어째. 내가 입김 좀 불어줬지. 나도 농사를 꽤 많이 짓거든. 그러니 기억하고 있으라고. 나중에 내가 도와준 것도 까맣게 잊지 말고.”

    “예. 감사합니다.”

    산박은 그렇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다른 고아원 사람들에게 물어볼 생각을 가졌다. 또 박조조한테도 물어보는 게 좋을 듯했다. 트럭 상인은 정말 많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맞아요. 왔었어요.”

    수녀가 차를 건네주며 대답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가 부동 지구의 종자 영업 사원이라며 명함을 주더라고요.”

    산박은 그 명함을 한번 확인하고 다시 돌려줬다.

    “그래서요? 다른 말도 했습니까?”

    “모은 돈이 없는 게 보이는지, 내년에 각오하라고 하더라고요. 대신에 자신한테 현찰로 5만 원만 주면 정상가로 종자를 주겠다고 하더군요.”

    이번에 밭에 심은 건 근처에서 아무렇게나 구매한 것이었다. 워낙 소규모였고 다양한 작물을 심어서 가능했다.

    ‘내년에는 종자를 사서 심으라는 소리인데.’

    장 노인이 어디까지 뒤를 봐줄지는 의문이었다.

    “하나 정해서 작물을 심으라는 소리겠죠?”

    “…….”

    생계를 위한 밭이 아닌, 팔기 위해서 밭을 일구란 소리였다. 산박도 거기까지 생각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자신의 수익이 낮기 때문이고, 소유한 농지도 적었다.

    “아무튼, 생각하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네.”

    산박은 이 일을 뒤로 미뤘다.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 * *

    산박은 야산에서 사과를 한 입 먹었다. 아삭아삭했고 달았다. 그는 사과 안쪽에 있는 씨앗을 하나 손가락으로 뜯어냈다.

    ‘나무 생육’. 이름만 들어도 약해 보이는 주문이었다. 산박은 이를 바로 사용했다. 씨앗과 흙이 만나도록 하고, 그 상태에서 주문을 발현시켰다.

    씨앗을 부수고 싹이 나왔다. 떡잎이 펼쳐지고 줄기가 길어졌다. 한 번의 주문으로는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부여받는 힘에 따라서 생육의 속력이 빨라질 수 있었다.

    ‘빌어먹을.’

    나무 생육 주문은 하루에 열다섯 번은 쓸 수 있었다. 별빛탄보다 주문에 소모되는 힘이 효율적이었고 적었다. 그런데도 산박은 욕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으로 시간을 단축해 주지만 나무의 생육 속도를 생각하면 거기서 거기다.’

    물론 주문으로 키운 나무는 특별했다. 다른 나무에 비해서 수명도 길었고 내구력도 좋았으며 질병에도 강한 저항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초월의 힘으로 컸기 때문에 다른 개체보다 튼튼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끝이다.’

    과수원을 키우는 사람에게는 꿈에 그리는 주문이겠지만, 아쉽게도 산박은 과수원을 경영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묘실 던전을 클리어해서 얻은 주문이었다. 안 쓰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엄청나게 손해 본 느낌이기 때문이었다. 최고 저점에서 손을 터는 개미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야 패배감에 고개도 들기 힘들었다.

    산박은 창고 부지의 마당에 사과 씨앗을 심었다. 토종 사과는 주먹보다 조금 작았고, 단단하지만 단맛이 적었다. 산박은 그 씨앗에 주문을 부여했다. 치료수를 납품해야 했기 때문에 하루에 주문 한 번밖에 주지 못했다.

    ‘하다 보면 언젠가 크겠지.’

    적어도 질병으로 죽지는 않을 터였다.

    또한 산박은 온갖 식물의 씨앗을 확보했다. ‘나무 생육 주문’은 그 주문을 받는 씨앗에 따라서 모든 게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전투용으로 쓸 수 있는 게 나올지도 몰라.’

    굳이 나무가 아니더라도 씨앗을 가진 것이라면 뭐든지 실험했다. 실험도 자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꾸준히 한다는 게 중요했다. 데이터는 배신하지 않는 법이었다.

    ‘나무 생육 주문은 남은 마력이 얼마가 되든지 주문이 완성된다. 특이한걸.’

    마치 자연이 도와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신기한 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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