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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2/270)
  • 32화

    최후의 돌격. 11년을 함께해온 말이 죽고, 기사는 그렇게 눈밭을 달려 내려갔다. 흩날리는 새하얀 백색의 눈은 이 던전에 내리고 있지 않았지만 해골 기사는 혹한의 눈발 속에서 돌진하고 있는 자신의 환영을 봤다.

    뭔가 알아차리기 전에 해골 기사는 현실로 돌아왔다. 고함을 지르는 자신이 굉장히 멀게 느껴졌고 타인처럼 여겨졌지만 금방 적응했다.

    날아오른 대장삵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백병전은 체급 싸움이다. 기습이 아닌 전면전에서 삵 정도의 크기로는 큰 변수를 창출할 수 없었다.

    해골 기사는 가장 둔하기 짝이 없는 놈을 노렸다. 몸에 수분이 가득 담겨있는 좀비 중보병이었다. 놈을 이기려는 게 아니라 놈의 덩치를 이용해서 공간을 틀어막기 위함이었다. 둔하기 짝이 없는 덩치만 키운 하급 언데드 병졸은 실로 좋은 방패이며 적의 진입을 막는 이로운 장애물이었다. 그럼에도 적은 적이었기에 해골 기사는 기병검을 쭉 내려 하단을 찔렀다.

    캉!

    여기에 존재하는 무기 중에서 기병검의 리치가 가장 길었다. 좀비에게 선타격이 가능했다. 이는 엄청난 적극성과 능동적 전황 변화를 몰고 올 수 있었다.

    선수(先手)를 취하는 것은 남보다 두 배는 강력한 영향력을 손에 쥐는 것과 같았다. 압도적인 경지에 이른 무인이 3수를 양보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기습도 선수의 묘리에 닿아있다.

    무릎이 쩍 벌려진 좀비 중보병의 균형이 단번에 무너지지는 않았다. 강철 갑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고, 체중도 무거웠다. 해골 기사는 그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좀비 중보병을 기병검으로 쳐서 다리를 더욱 굽히게 하고 발을 끼워 넣어 넘어뜨렸다. 동시에 겨드랑이에 왼손을 집어넣으며 우측으로 넘겼다. 달려오던 산박이 속도를 늦췄다.

    해골 기사는 다시 한번 충호를 노렸다.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음에도 충호는 몸의 밸런스가 무너져 있었고 어깨가 똑바르지 못하고 한쪽이 굽혀져 있었다. 달리지 않았음에도 숨이 고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듯했다. 뇌가 몸을 가누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크윽!”

    뇌진탕 증세에 시달리며 충호가 해골 기사의 돌격을 막았다. 기병검과 방패가 부딪치고, 몸과 몸이 부딪쳤다. 충호는 우직하게 밀고 들어갔다. 훌륭한 돌격병의 마음가짐이었다. 상대를 압도적으로 누르는 강인한 힘!

    해골 기사는 그런 힘 싸움에 어울려 주지 않았다. 줄다리기도, 손뼉이 부딪쳐 소리가 나는 것도 서로 간의 힘이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해골 기사는 배를 튕기며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충호의 좌측에 어깨를 부딪쳤다. 밀려나는 건 해골 기사였다.

    “크흐!”

    충호가 형편없는 해골 기사의 무게에 웃음 지었다.

    기우뚱.

    ‘어?’

    기괴하게도 충호의 몸이 오히려 기울어졌다.

    그는 타고난 전사이며 곰 같은 사내였다. 몸은 해골 기사의 측면 돌진에 반응했고, 체중을 좌측으로 자연스럽게 옮겼다. 누구는 몇 년을 단련해야 도달하는 경지의 힘 싸움이 이미 선천적인 재능으로 몸에 배어 있었다.

    그게 독이 되었다. 해골 기사가 한쪽 방향에 힘과 체중을 실었기에 거기에 반응했고, 흐트러진 자세였기에 더욱 크게 반응한 결과가 균형의 붕괴였다. 뇌진탕 증세가 없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했고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크으윽!’

    충호가 이를 악물고 기울어지는 몸을 바로 잡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몸이 크게 기울었다. 발이 꼬이면서 단번에 양 무릎이 꿇려졌다.

    방패에 부딪쳤던 기병검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쳐졌다. 몸의 중단에 놔두었던 왼손도 위로 올라가며 살짝 굽혀졌던 무릎이 위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검이 조금이라도 높이 있을 때 왼손을 추가하여 양손으로 잡기 위함이었다. 반 호흡의 반 호흡도 유지되지 않을 양손 자세지만 찰나의 순간이라도 한 손으로 내려치는 것보다 양손으로 내려치는 것이 검사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적의 체인 메일을 끊고 상처를 주느냐 못 주느냐의 차이처럼 컸다.

    또한 왼손이 추가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무릎을 쭉 펴고, 다시 내린다. 상대의 숫자가 조금 더 적었다면 까치발까지 서서 확실하게 힘을 부여했을 터였다.

    “캬아앙!”

    해골 기사의 움직임에 따라가지 못했던 대장삵이 겨우 도착해서 소리를 냈다. 물이 쏟아지며 해골 기사의 몸을 덮쳤다. 체중이 낮은 해골 기사는 물의 흐름에 순간적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힘으로 버텨 다시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지만, 내려쳐진 기병검은 충호의 머리가 아닌 어깨에 박혔다.

    “끄아아아악!”

    충호가 고함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해골 기사도 딸려서 굴렀는데, 기병검이 충호의 어깨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충호가 어찌나 곰같이 힘이 센지 단번에 기병검이 뽑혀 나왔다는 점이었다. 다만 살이 없는 몸이라 갑옷이 갈비뼈를 때려서 금이 가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몸의 모든 밸런스가 망가져 버렸다.

    “후읍.”

    호흡을 중단하기 전에 살짝 들이마시는 숨소리를 들은 해골 기사가 몸을 돌리며 기병검을 들어 올렸다.

    캉!

    시은의 환도와 기병검이 부딪쳤다. 서로의 힘이 비슷해서 백중세를 유지했다. 시은의 경우에는 내려쳤기 때문에 체중까지 실어서 반반을 먹고 갈 수 있었다.

    쾅!

    산박의 집중성탄이 해골 기사의 골반 위쪽에 있는 앙상한 척추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시은이 몸을 틀면서 허리를 쑥 뺐다. 서늘할 정도로 날카로운 감각이 배에서 느껴지며 집중성탄이 해골 기사의 가죽 방어구를 말끔하게 찢어 버리며 지나갔다. 무시무시한 관통력이었다.

    “성공했다!”

    산박이 환희에 차서 외쳤다. 해골 기사의 뼈만 남아있는 신체가 만들어낸 빈틈을 정확하게 찌르는 데 성공했다. 상체를 바로 세운 해골 기사는 기병검을 들어 올렸지만 몸을 돌릴 수 없어서 형편없이 두드려 맞고 두개골을 내어줬다.

    퍼걱!

    골을 깨뜨리고 나서야 해골 기사가 움직임을 멈췄다. 산박은 이 묘실 던전의 보스 괴물에게서 혁대를 찾았다. 다른 묘실장과는 다르게 세 배에 달하는 열다섯 장의 스크롤이 있었다. 또한 독특한 목패가 있었는데, 이를 회수했다. 아쉽게도 금 장신구는 나오지 않았다.

    타다닥.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충호부터 살폈다. 시은이 미리 가있었다.

    “어때요?”

    “호흡이 불안정하고… 정신을 금방 잃을 것 같아요.”

    “계속 정신을 차리라고 말을 걸어요. 머리는 최대한 건들지 말고.”

    “네.”

    시은보고 충호를 돌보도록 하고 산박은 강합에게 향했다. 랜스에 관통당한 강합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어찌 될지 몰랐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던전이 무너져 내리고, 새하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묘실 던전을 클리어했다.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전사 두 명 모두 크게 다쳤다.

    ‘강했다.’

    기병의 무서움은 실로 굉장했다. 눈을 조금만 감아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말의 거친 발소리가 산박의 귀를 때리고 흉악한 랜스 차징의 파공성이 느껴졌다. 그 거대한 힘은 실로 위압적이었다.

    ‘던전에 말을 데리고 갈 수 있지 않나?’

    쓸데없는 생각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하얀 공간은 완성되었다.

    [던전 사용자 태산박의 존재를 특정합니다. 당신은 카르마의 선택을 받은 자입니다.]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충분한 카르마를 획득했습니다. 레벨 업을 위해서 남겨놓을 수 있고, 자신의 수준에 맞는 새로운 주문과 기술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아직 부족해. 더 강해져야 한다.’

    저번에는 기술을 택했다. 이번에 산박은 주문을 택하기로 했다.

    “주문을 획득하고 싶다.”

    [확인했습니다. 변숫값 조정 중……. 주문을 확인합니다.]

    [나무 생육 주문을 사용자 태산박에게 부여합니다.]

    “엉?”

    듣기만 해도 전투용 주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모든 분야에서 활동 가능한 드루이드의 최대 단점은 무슨 기술이, 어떤 주문이 걸릴지 감히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이번에는 제대로 드루이드다운 면모를 볼 수 있었다. 그에게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게 드루이드라는 직업이 가지는 한계였다.

    ‘나무를 키우는 주문이라니. 정신 나간 주문 아냐, 이거……!’

    산박이 이번 던전에서 행한 모든 공이 허사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해지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나무나 성장시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한 번 더 던전을 돌아야 한다는 뜻과 다를 바 없었다.

    ‘앞으로는 그냥 던전을 클리어해서 나오는 카르마를 레벨 업을 위해서 모아 놔야겠다.’

    1레벨 주문과 기술 중에 쓸 만한 게 많을 거라고 여겨지지 않기도 했다. 당장 별빛탄부터 그러했다. 나무 생육 주문까지 본 이상 확실해졌다. 두 번 당하지 세 번은 안 당하는 법이었다.

    파아앗.

    백색의 공간에 황금빛의 구체가 내려와 산박을 비췄다. 눈이 부시자 산박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밑바닥 혀 발루악을 처단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악겁(惡怯)을 모방하려던 네크로맨서였습니다. 헛된 희망으로 많은 약자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그를 길러준 부모님을 제물로 삼아 일령사의 경지에 올라 네크로맨서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가 죽인 배고픈 이들은 헤아릴 수 없고, 그가 희롱한 처녀의 피로 강이 흘렀습니다. 허나 단 한 번의 패배로 그는 차원 떠돌이가 되었고 던전 사용자 태산박의 손에 토벌당하였습니다. 비루한 스켈레톤으로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역사가 깊은 네크로맨서였지만 죽을 당시 나약했다. 고로 보상 또한 그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팔라딘의 신도에게 주어지는 기도의 제단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혹은 추가 카르마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또는 구품(九品) 공적의 증거품인 청철(靑鐵) 팔라딘 훈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줬으면 하는데.”

    산박의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기도의 제단을 성장시킨다면 저항의 손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소용없지만 타인의 질병을 고칠 수 있었다. 치료 가능한 숫자가 하루에 한 명으로 제한되어 있는 힘이었다.

    ‘매력적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다른 대체 수단이 많았다. 질병 물약은 민간에 가장 잘 풀려있는 물약이었다. 많은 직업이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축하고 싶다면 비축할 수 있었고, 필요하다면 당장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팔라딘의 신도로 계속 포지션을 나아간다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기도의 제단을 성장시키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높게 올라갈수록 더 좋은 능력을 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팔라딘의 신탁을 받는 일이 자주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밑바닥 혀 발루악의 토벌 또한 시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자의로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었다.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했기에 불확실성이 컸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야 했다. 특별한 힘을 부여받을 수 있는 찬스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랐다.

    ‘구품 공적의 증거품인 청철 팔라딘 훈장’. 1레벨 팔라딘 주문을 하나 결정하여 담을 수 있고 하루에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훈장이었다. 품속에 숨기기도 좋았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청철 팔라딘 훈장에 담을 수 있는 주문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한번 지정하면 바꿀 수 없지.’

    훈장이 가장 좋은 선택으로 보였다. 특히 지금 산박에게 없는 것을 줄 수 있었다.

    ‘집중성탄처럼 조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주문이 아니라 시작부터 강한 주문.’

    공격 수단은 산박에게 매우 절실했다. 강한 파괴력은 던전을 쉽게 돌파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집중성탄은 쉽게 꺼낼 수 없는 카드였다. 그렇게 본다면 훈장을 선택해서 공격 주문을 하나 확보하는 게 확실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산박은 훈장을 선택했다.

    [청철 훈장에 새길 주문을 선택하십시오. 2레벨 미만의 팔라딘 주문만 가능합니다. 해당 목록을 모두 불러옵니다.]

    수백 개의 주문이 불려왔다. 그 속에서 산박은 손가락을 이용해서 하나를 딱 집어냈다. 그러다가 다시 놓기도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산박은 이내 하나를 선택했다. 현재의 자신과 잘 어울리는 주문이었다.

    [정신의 망치 주문을 청철 팔라딘 훈장에 부여하겠습니까?]

    “그래.”

    [청철 팔라딘 훈장에 정신의 망치 주문을 부여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힘도 소모하지 않는 주문입니다.]

    산박은 훈장을 품속에 달았다.

    새하얀 공간이 사라지고, 지하철의 밑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상당히 흘렀기에 강합도, 충호도, 시은도 없었으며 서적을 담은 배낭 또한 없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고민이 길어졌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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