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270)

29화

모두가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며 근육의 경직을 최대한 풀었다. 산박은 슬금슬금 시은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돌리며 용건을 말했다.

“할 말이 있는데요.”

“와, 팀장님이 먼저 사사로이 다가온 건 처음인데요? 대박.”

“시끄럽고요. 시은 씨가 일으킨 해골, 그 두개골 제가 깨부숴도 괜찮을까요?”

시은의 눈동자에서 흥미로움이 툭 튀어나왔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아주 나쁜 놈이니까, 박살을 내야겠습니다. 무슨 일을 할지 몰라요.”

그 말에 시은이 쾌활하게 웃었다. 절로 사람의 시선을 이끄는 매력적인 웃음소리였다.

“나쁜 놈이니까 죽여야 한다? 그걸 아는 건 팀장님뿐이고…….”

시은은 의심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렇게 말을 줄여 나가던 시은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치고는 어깨가 넓은 그녀의 새하얀 쇄골이 크게 팼다가 줄어들었다.

“제가 어떻게 믿어요, 그걸? 그리고 선악이 뭐가 중요해요.”

“왜 안 중요해요.”

“놈은 제가 일으켜 세운 언데드예요. 언데드는 시체 자원이 필요하고, 그렇기에 움직일 수 있죠. 절대적인 복종을 할 수밖에 없어요.”

고기를 먹는 인간처럼 언데드는 시체 자원을 획득해야 했다. 시체를 먹어서 일정 부분 획득이 가능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시체를 찾기가 힘들었다. 철저한 관리하에 처분되기 때문이었다.

또 인간의 매장 방식은 화장하여 납골하는 게 일반적이 되어 버렸다. 시체도 돈이 되는 게 이 바닥이었다. 야생의 언데드는 생존하기 힘들었다. 특히나 하급 언데드처럼 나약한 현재의 발루악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고로, 산박의 설득 근거는 하등 설득력이 없었다. 약자가 악하다고? 어쩌라고. 근육 찐따한테도 패배하는 해골바가지 주제에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거기에 발루악은 네크로맨서의 시선과 통제를 받는 상태였다.

‘킁. 제법 생각할 줄 아네.’

단기간에 생각할 수 있는 허접한 설득이 듣지 않자 산박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 무가치한 해골을 죽임으로써 제가 조금 이득을 얻을 수 있어서 아무래도 좀 양보해 줬으면 하는데요. 대신 10만 원 드리겠습니다.”

“아하핫!”

시은은 산박이 귀여워서 죽여 버리고 싶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시네요, 팀장님~”

그녀는 산박에게 귀엽다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눈을 떴다. 거짓말도 어리숙한 이 남자를 악(惡)에 물들인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그 과정은 실로 짜릿할 것이다. 매 순간, 순간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다울 터였다. 분명 지릴 정도로 재미난 인생이 될 것이다.

“10만 원 싫으세요? 그럼… 30만 원은 어때요?”

“돈 진짜 많으신 건 알겠는데요. 저도 이 해골을 드릴 수가 없어요.”

“왜요?”

“왜겠어요?”

산박은 그녀의 반문에 직감했다.

“시은 씨도 뭐가 있군요…….”

“팀장님은 뭔데요? 말씀해 주시면 저도 말해 드릴게요.”

“보상은 모릅니다. 전에 한 번 득을 봤기 때문에 하려는 것뿐이죠.”

“전에는 뭘 얻으셨는데요?”

“…….”

산박은 주저했다. 그 찰나의 순간 시은은 빠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신부와 결탁해 사람의 포를 뜨며 삶을 연명하고 고아원을 유지했던 산박이었다. 그녀는 피 맛을 본 짐승이 피 묻은 발톱으로 그어놓은 선을 봤다. 일반 사회에 녹아들고자 사람들의 감성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 세 번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며 절대로 방심하지 않는 시은이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산박이 시은의 본심 혹은 그 음울진 비수를 알아차리기 전에 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 네크로맨서의 지식과 주문을 배울 수 있다는 기대심이 있어요. 발루악이라 불리는 네크로맨서가 자신을 데리고 이 던전을 나가면 많은 것을 주기로 했거든요.”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시은은 산박이 지닌 짐승의 기운을 지웠다.

“아, 그렇군요.”

“팀장님은 말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전 빛의 신 팔라딘의 신탁을 받았는데, 저번에는 치료 행위에 도움을 조금 주는 제단을 받았어요. 현실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건데 던전이 무너지면 볼 수 있죠.”

“신기하네요.”

산박이 스트레칭을 멈췄다.

“뭐, 시은 씨한테도 그렇게까지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이 접어야겠죠.”

“아뇨. 돈 받고 드릴게요.”

그 말에 산박이 고개를 다시 홱 돌렸다.

“30만 원?”

“제가 그렇게 생각 없는 여자로 보이세요? 500만 원 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릴…….”

“돈은 당장 안 주셔도 괜찮아요. 구두 계약에 차용증 없이. 물론 반드시 갚으셔야 하고, 갚는 노력을 매달 한 번씩은 보여 주셔야 해요. 금액 상관없음!”

시은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100만 원도 아니고, 무슨 500이에요…….”

“전 아쉬울 게 없네요.”

“턱없이 비싸잖아요.”

“차용증 쓰고 300만 원 한 달 내에 주실 수 있으세요?”

시은의 말에 산박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벌려놓은 일이 많았다.

“…….”

‘돈은 벌면 된다. 난 더 강해져야 한다.’

조금 고개를 숙인 산박의 눈에 거대한 신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눈을 시은은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저건, 자신이 결코 가져본 적 없는 보석이었다. 저 상태의 눈을 박제할 수 있다면 그녀는 자신의 심장마저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좋아요.”

시은과 산박은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그대로 발루악의 처형식이 시작되었다.

“전력 누수가 되지는 않겠어요?”

“할 거면 팍팍 해야죠. 남자가.”

“그거 성차별이에요.”

“남자가 예쁜 여자에 환장하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자연스러운 거죠.”

한마디도 지지 않는 시은은 자기가 직접 발루악을 무릎 꿇렸다. 단번에 두개골을 쪼개기 위해서였다.

‘이걸로 그와 조금이라도 확실한 끈으로 연결되었다.’

팀장과 팀원의 관계에서 조금 더 많은 화젯거리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터였다.

발루악은 온몸을 떨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시했다.

“근데 갑자기 왜 해골을 부수려고 하시는 거예요?”

지켜보던 두 사람이 다가왔다.

“아, 저랑 팀장님이 똑같이 악몽을 꿨지 뭐예요. 아무래도 이 해골 때문인 것 같아서요.”

시은은 능숙하게, 순식간에 즉흥적으로 실로 뛰어난 거짓말을 했다.

“아하…….”

그렇게 이해하는 사이에 산박은 놈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두개골에서 검은 기류 하나가 얇게 피어올라서 그대로 산박의 코로 쑥 들어갔다. 뒷걸음질 쳐도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크읍, 학?”

하지만, 그 어떤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황도 잠시였다.

“아무렇지도 않네요.”

모두 당황했지만 산박이 괜찮다고 하자 쉽게 넘어갔다. 하지만 시은은 끝까지 산박을 훑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산박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시은의 의심까지 사라지자 산박은 착 가라앉은 눈을 했다. 발루악의 영혼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발악했다. 확실하게 영혼을 통한 저주를 산박에게 주고 갈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발루악이 생각한 것보다 산박의 영혼이 상처로 가득한 영웅의 영혼이었기 때문이었다. 발루악의 영혼은 산박의 영혼에 부딪쳤고, 그저 바스러졌다. 한낱 헛소리를 하는 네크로맨서가 감히 ‘영혼 마법’을 알 리가 만무했다. 허무한 최후였다.

“다 준비되었으면 들어가겠습니다.”

“예!”

“넵!”

4일째, 묘실에 팀이 들어섰다.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중보병 좀비의 보호를 받는 백골의 네크로맨서였다.

네크로맨서의 이빨은 어둠 속에서는 녹색으로 빛났고 빛을 받으니 백색으로 변하여 윤기가 반지르르한 건강한 치아가 되었는데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횃불의 주홍빛에도 백색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너무나도 눈에 잘 들어왔다.

기괴한 색을 띠는 치아를 지닌 네크로맨서는 단번에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냄과 동시에 중보병 좀비에게 무음으로 명령을 하달했다.

“그르르륵!”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중보병 좀비들의 입에서 검은 즙이 거품과 뒤섞인 채 흘러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거운 장갑을 입고 있어서 매우 굼떴고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네크로맨서에게 한눈팔려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 산박은 그제야 이 묘실이 매우 좁다는 걸 깨달았다. 밀리면 끝이었다.

“침착하게 상대합시다!”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부풀어 오른 좀비 중보병은 정말이지 완벽한 중보병 언데드였다.

“우오오오오!”

쿵!

“그륽!”

질량이 커서 충호와 부딪쳐도 물러섬이 없었다. 이들은 작은 버클러와 철퇴, 대거로 무장한 좀비였는데 백병전에 능하지는 않았지만 공간 점유 및 장기전에 충분히 특화된 좀비라고 할 수 있었다.

무기는 짧은 대거와 철퇴였고 방패는 버클러였다. 몸에 물기를 지니고 있어서 팔을 휘두르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빨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실로 완벽한 네크로맨서의 군세였다.

언데드 중보병 좀비 3기는 통로를 꽉꽉 채운 채 충호와 강합과 부딪쳐서 힘 싸움에 들어갔다. 시은이 석궁을 쏘았지만 큰 소득은 보지 못했다. 녹슬었지만 강철 갑주를 입고 있어서였다.

힘으로 승부가 되지 않자 충호는 단번에 좀비의 상체 우측을 방패로 치고 안쪽 다리에 검을 쑥 집어넣어 후려쳐서 균형을 망가뜨렸다. 순무 칠난균이었다.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곱 종류의 방법이었는데, 상체와 하체의 체중이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갖게 해서 그대로 균형을 무너뜨리는 방식이 이번에 토해졌다.

중보병 좀비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충호는 좀비의 목을 발로 걷어차서 부러뜨렸다. 습기를 가득 머금어서 뼈는 그렇게 단단하지 못했다. 특히 강철 투구를 쓴 만큼 머리통의 무게가 묵직해서 목을 부러뜨리기에 더 좋았다.

캉!

다른 놈의 역습에 충호가 움츠러들었고, 방패가 자연스럽게 이를 막아줬다. 강합이 힘 싸움을 했지만 상대가 너무 비집고 들어와서 무기를 제대로 휘두를 수가 없었다.

그사이에 네크로맨서의 음흉한 주문 소리가 퍼져 나왔다. 목뼈가 부러진 곳에서 검은 진액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더니 이내 다시 수복되었다. 단번에 좀비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팀장님! 큰 거 한 방요!”

“강철은 못 뚫어요! 천장이 낮아서 좀비들을 지나칠 수도 없고요!”

산박이 소리를 쳤다. 무식하게 밀착해서 세 마리가 들러붙어 있는 좀비 중보병과는 다르게 산박의 팀은 충호와 강합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만으로도 비집고 갈 틈이 없었다. 대장삵이 짜증을 냈다.

“내가 놈들의 다리 사이로 지나가며 네크로맨서를 조져볼게!”

“널 어떻게 믿어! 거기에 네크로맨서는 딱 봐도 긴 지팡이를 쥐고 있는데, 당연히 닿기 전에 저 지팡이에 맞겠지!”

“저번과는 확실하게 다른 날 보여줄게!”

“얌전히 있어!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줄도 모르냐?”

대장삵의 말에도 산박은 그를 보내지 않았다. 이 용맹한 대장삵은 전사다운 표정을 늠름하게 지었다. 두 명이 싸우고 있는데 혼자 뒤에서 기다릴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신의 있는 캡틴 레오파드 캣이었다. 한번 한 약속은 죽음이 목전에 있어도 지킬 줄 알았다.

‘계속 밀리는데. 좀비한테 피해를 주고 있지만 네크로맨서가 언제까지 저렇게 할지도 모르고, 수를 내긴 내야 한다.’

산박은 시은에게 주문을 사용하라고 제스처를 취했다.

“블랙 포그를 한 다음에 네크로맨서에게 마녀의 손길도 부탁해요. 저랑 대장삵이 밑에 다리로 지나가서 쳐야겠어요.”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대장삵이 냉큼 산박을 말로 물어뜯었다.

시은이 신호를 보내자 산박이 단번에 작은 호랑이로 변했다. 동시에 시은의 주문이 퍼져 나갔다. 그녀의 손이 향한 곳에서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그 사거리는 15m 남짓한 수준에 불과했다.

“붙어! 붙어!”

“이씨이이!”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퍼지자 충호와 강합이 더욱 소란을 피우며 단번에 좀비들에게 들러붙었다. 서로 무기를 휘두를 수 없어서 아웅다웅할 뿐이었다. 하지만 체력 싸움은 결국 언데드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바닥을 기어가는 산박은 몸을 매우 낮춰야 해서 조금 더뎠고, 대장삵은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그는 단번에 물먹은 중보병 좀비를 지나쳐서 네크로맨서를 향해 달려 나갔다.

매우 기민한 짐승의 날렵함이 돋보이는 속력에 네크로맨서가 쩍 벌린 팔을 접고 나무 지팡이를 양손에 꼬나들었다. 그는 마녀의 손길이 검은 안개를 뚫고 자신에게 오자 아래턱을 쭉 내렸는데 거기서 초록빛이 감도는 바늘이 하나 튀어나와서 그대로 마녀의 손길을 꿰뚫고 땅에 떨어졌다.

그사이에 대장삵은 네크로맨서를 견제했다. 그는 단판 승부를 할 생각이 없었다. 돌진하는 척하면서 옆으로 홱 돌아갔고, 나무 지팡이는 허공만을 갈랐다.

산박이 무식하게 돌진했다. 도약하면서 양 앞발을 쭉 벌렸다. 나무 지팡이를 쳐내기 위함이었다.

네크로맨서가 나무 지팡이로 산박을 후려칠 때 대장삵은 네크로맨서의 오른팔에 들러붙으며 한 바퀴 홱 돌았다. 팔이 아래로 내려갔고, 산박이 그대로 네크로맨서를 덮쳐서 목을 물어뜯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시체 자원을 통해서 고작 ‘초록 독액의 아래턱’만을 소유한 네크로맨서였다. 일령사의 경지로는 근접한 호랑이를 이길 수가 없었다. 가까이 오기 전에 최대한 밀어냈어야 했는데, 검은 안개와 마녀의 손길로 순식간에 네크로맨서가 준비한 것이 와해되어 버렸다.

좀비들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지성이 존재하지 않고 이성이 깔리지 않은 언데드였다. 시은은 그들 중 가장 상태가 좋은 언데드를 일으켜 세웠다. 큰 전력이 될 터였다.

네크로맨서가 지닌 스크롤 다섯 장과 그가 소지하고 있던 금화를 몇 닢 챙겨서 일행은 묘실을 빠져나갔다. 묘실이 허물어져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