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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270)
  • 28화

    산박은 네크로맨서의 은신처를 훑었다. 한쪽에는 부엌이 있었고, 그 외에는 전부 고서들로 가득했다. 연구 가치가 있어 보이는 고서들이었다. 네크로맨서들에게 팔면 제법 쏠쏠할 듯했다. 그가 기술과 주문을 통해서 집중성탄 주문을 만든 것처럼 다른 캐스터들도 공부를 통해서 힘을 합칠 수도,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

    그 외에 특별한 것은 전혀 없었다. 습기 때문에 검게 썩어 부패한 해골만 있을 뿐이었다. 시은이 마치 다른 걸 보고 있는 듯 멍하니 그 옆에 서있었지만 산박은 고서에 정신이 팔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국어는 아니었지만, 산박은 다행히 고서를 읽을 수 있었다. 드루이드의 직업을 획득할 때 얻은 지식과 경험 덕분이었다.

    ‘네크로맨서만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모두 들고 갈 수는 없어요. 그럴듯한 걸 추려내야 할 것 같아요.”

    산박은 다른 이들에게 글자를 읽을 수 있냐고 물었다. 생소한 문자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는 이가 있어야지 수월하게 고서들을 가려낼 수 있었다.

    “전 가능해요.”

    전사 두 명은 당연히 모르쇠로 일관했고, 시은은 다행히 읽을 수 있었다. 산박과 시은은 고서들 중 쓸 만한 걸 골라내기 시작했다. 기술 혹은 주문의 효능이나 효율을 높여 주거나 영감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찾기로 했다.

    [언데드는 시체다. 시체 자원으로 움직이는 인형과 같다. 허나 이러한 요인 때문에 그 뼈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이 전통적인 네크로맨시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강철을 입힌 내구력 강한 해골을……]

    강철 네크로맨시에 대한 연구 서적을 읽은 산박은 그것을 다시 덮었다.

    ‘다 읽고 싶을 정도로 재밌다.’

    하지만 파악해야 할 고서가 많았다. 처음, 중간 부분을 읽고 산박은 가져갈 고서를 빠르게 고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게 진행 속도가 빨라도 고서가 워낙 많았다.

    [시체 자원의 저장은 총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피의 웅덩이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이며 일백의 개체의 시체 자원이 필요하다. 그들의 피부는 피막처럼 변해서 웅덩이 표면에 자리 잡아 자연적으로 피가 증발하지 않게 해준다. 두 번째 단계는 일천의 시체 자원이 필요하며 그들의 뼈로 구축된 뼈의 건축물이다. 보통은 피의 웅덩이가 10개라면 뼈의 건축물은 못해도 2개는 있어야 하며……]

    네크로맨서의 노하우에 대해서도 논해지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가축의 뼈를 애용하는 네크로맨서가 많았다.

    산박은 수많은 고서들 중에서 고리타분한 정석을 말하는 서적을 제외하고 번뜩이는 영감과 연구 그리고 기술과 주문에 대해서 논하는 고서들만을 추려냈다. 그런 혁신적이고 자극적인 고서는 드물었고, 고작 여든 권에 불과했다.

    “비싸 봤자 2만 원이잖아요. 그렇게 큰돈은 되지 않겠어요.”

    시은의 말에 산박이 동의했다. 요즘 시대에 책? 잘 팔리지 않았다. 그나마 향상심을 지닌 네크로맨서나 사 갈 것이었다. 마진을 생각하고 유통에 판매 노력까지 고려한다면 권당 5천 원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것을 챙기는 이유는 배낭이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묘실 던전’의 획득물은 오직 금 장신구와 스크롤이 전부였다. 멋들어진 목함? 굳이 필요하나 싶었다. 현대의 목공 제품이 던전의 목공물보다는 좋았다.

    팔릴 만한 책을 모두 챙긴 그들의 앞에서 시은은 가만히 부패한 해골을 내려다보았다.

    ‘발루악을 살릴 이유가 있을까.’

    그가 진실을 말하고, 그대로 이루어져서? 그런 건 시은에게 통하지 않았다. 서로 죽이 잘 맞는 존재라서? 그랬다면 그녀는 뒤통수가 간지러워서 잠 못 들 것이었다. 다만 이번 경우에는 뒤통수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발루악을 고급 언데드로만 만들지 않으면 되니까.’

    몸을 움직일 동력을 네크로맨서에게 받는 언데드는 절대적인 복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시은은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지닌 자를 들임으로써 부관을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와 꿈을 통해서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머리 하나보다 두 개가 더 나은 건 당연했다.

    ‘거기에 그는 네크로맨서다.’

    죽음의 세바리악의 종자니 시종장이니 뭔지 몰라도 시은보다 네크로맨시를 잘할 수 있었다. 그는 시은의 실력을 높일 가능성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시은은 썩은 백골에 손을 대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산박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보여준 집중성탄은 시은을 압박시켰다. 최대한 그와 함께하면서 그가 지닌 신념이 완성될 때를 노리고 있는 게 시은이었다.

    그녀는 네크로맨서 직업을 획득하면서 얻은 주문을 사용했다. ‘해골 일으키기’ 주문이었다. 카르마의 선택으로 직업을 얻은 게 아니었으므로 기술을 얻지는 못했다. 직업을 획득하면서 얻은 네크로맨시 주문은 해골 일으키기가 전부였다.

    이는 발루악의 노림수이기도 했다. 그의 필요성을 부각하려면 시은이 최대한 적은 주문과 적은 네크로맨서 기술을 가져야 했다.

    딱딱딱.

    해골의 턱이 부딪쳤다. 텅 빈 구멍에서 회백색의 빛깔이 감돌았다. 빠르게 백골의 썩은 부분이 사라지고 습기가 찬 검은 뼈의 색도 새하얀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내 해골이 일어섰다.

    “네크로맨서가 된 거예요?”

    “네크로맨서 꿈을 왜 꿨겠어요?”

    시은이 산박의 말에 빙긋 웃었다. 모두들 그녀의 외적인 매력에 혹 가서 쉽게 넘어갔지만, 산박은 아니었다.

    ‘모든 걸 이야기하지 않았구나.’

    산박은 오늘 있었던 이 일을 반드시 기억할 것이었다.

    해골이 시은의 옆에 섰다. 시은은 훈련하면서 섬광을 터트려 평범한 투척 단검이 된 것을 해골의 양손에 쥐여 주었다.

    그들은 전력이 강화된 상태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다시 되돌아와서 묘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바닥부터 진창이었다. 진창에서 조금 더 발전되어서 질퍽질퍽한 아주 얕은 늪처럼 되어 있었다. 바닥에 널린 뼈는 밟으면 물러졌고, 두개골은 함몰되어서 뭉그러져 있었다.

    촤아아…….

    파도치는 소리가 났다. 썩은 액과 시체의 잔해물이 산박의 앞으로 밀려들어 왔다.

    “거대한 놈입니다.”

    산박은 최대한 주변 정보를 파악하며 몇 가지 묘실장들을 기억에 떠올렸다. 산박은 위험했지만 가장 먼저 뛰어나가 바닥에 횃불을 꽂고 되돌아왔다. 아까 네크로맨서의 은신처에서 피웠던 횃불이었다.

    되돌아온 그에게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묘실이었기에 소리가 울리고 울려 더욱 크게 들려와서 체감적으로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쏴아……! 쏴! 쏴아아아!

    물결이 서로 교차했고, 이내 썩은 체액이 그들이 있는 곳에 모여들며 발목까지 차올랐다. 움직이는 데 큰 어려움이 생겼다. 그 특수한 환경적 공격 전술에 산박은 단박에 이번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했다.

    “시체 슬라임입니다. 평범한 수단으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화염 물약을 여기서 모두 쓰겠습니다.”

    “예!”

    “적에게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합니다.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게 방향을 정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곳에 화염 물약을 던져야 했다. 연금술로 만든 화염 물약은 번져도 자연의 불꽃처럼 크게 번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딱 자신이 가진 힘만큼만 불이 번졌다.

    곧 시체로 이루어진 슬라임이 모습을 드러냈다. 슬라임은 기어가고 있었고, 시체와 체액으로 이루어진 괴물이었다. 허나 대부분 피해가 잘 먹혔다. 내구성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칼로 내려쳐도 쩍쩍 갈라지고 회복하지를 못했다.

    다만, 그 크기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컸다. 서른 명은 줄 서서 싸울 수도 있는 거대한 묘실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느릿느릿했지만 압도적인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슬링을 통해서 화염 물약을 던질 수 있는 산박이 먼저 화염병을 던졌다. 계획과는 다르게 다른 이들이 즉흥적으로 화염 물약을 건네줬고, 산박은 이를 또 슬링으로 곳곳에 던졌다. 그만큼 생각보다 시체 슬라임의 이동 속도가 느렸다.

    화아아악!

    끼이! 끼이이!

    슬라임이 금속음을 내며 괴로워했다. 그 운동성이 매우 둔해졌다. 그걸 본 산박의 팀은 사정없이 슬라임에게 달려들었다. 무기를 내려치고, 헤집었다. 산박은 만약의 때를 위해서 힘을 아꼈다. 대장삵 또한 무리해서 물의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전의 역소환 일로 보다 신중해졌다. 해골은 단검을 휘두르다가 그냥 손으로 시체 슬라임의 속을 퍼냈다.

    “억!”

    철푸덕!

    종종 발악하는 시체 슬라임에게 공격을 받기도 했다. 슬라임이 바닥에서 쭉 신체를 늘려 강합의 발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의 비명에 대장삵이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촤아아악!

    그는 물을 발사해서 슬라임을 걷어냈다. 1g당 밀도는 물이 슬라임보다 낮았지만 압축해서 빠르게 쏘았기 때문에 힘이 좋았다. 강합은 뒷걸음질 치며 빠져나올 수 있었다.

    “2개 조로 하겠습니다!”

    시은과 충호, 산박과 강합 그리고 대장삵이 뭉쳐서 시체 슬라임의 신체를 붕괴시켰다. 안전했지만 느렸다.

    장장 세 시간을 시체 슬라임을 붕괴시켰다. 초반에 화염 물약을 모두 소모해서 운동성을 크게 약화한 것 때문에 철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놈은 발악했지만 2개 조로 나뉘어서 뭉친 산박의 팀을 어찌할 수 없었다.

    중간에는 산박이 대장삵에게 명령했다.

    “내 힘을 모두 사용해서 위에 물 좀 뿌려!”

    “알았다!”

    대장삵이 남은 힘을 물로 변환시켜서 슬라임 위에 퍼부었다. 슬라임 신체의 밀도를 옅게 만들어 더욱 힘을 빼버리기 위해서였다.

    액체 상태인 슬라임의 약점은 물이었다. 완전히 허물어진 시체 슬라임은 자체적으로 붕괴해서 죽었고, 팀은 잔해에서 목함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스크롤 다섯 장과 금은보석을 소량 획득했다.

    “이제 나갑시다.”

    팀은 서둘러 묘실을 나갔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묘실이었다. 화염 물약에 대장삵의 물 마법이 너무 잘 통했다. 산박의 팀을 만난 게 시체 슬라임에게는 재난이었다.

    “해골한테 그럴싸한 무기를 들려줘야 할 텐데요.”

    “아까 보니까 손으로 퍼내던데요?”

    모두 잡담을 떠들었다. 그만큼 이번에는 수확이 많았고 큰 위협이 없었다. 그리고 충호는 이 말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조금 찌그러졌긴 했어도 큰 방패를 내어줬다. 허나 해골 발루악은 이를 들지도 못하고 그대로 넘어가 버렸다.

    “아하하핫!”

    시은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단단히 자세를 잡고 있던 매우 진지한 해골이 그대로 어떤 반항도 못 하고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체중과 비슷한 방패를 드는 건 해골에겐 무리였다. 그 쾌활한 소리에 충호 또한 공감하듯이 웃어줬다.

    그날 잠자기 전 충호는 시은에게 치근덕거렸다. 시은은 그와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냈는데, 당연히 그에게 호감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산박이 충호를 매우 아끼는 모습이 행동과 말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회는 언제고 오기 마련이지.’

    그때를 위해서는 충호와 제법 친분을 쌓아놓는 게 좋았다.

    강합은 그걸 보면서 왠지 모를 질투감에 휩싸였다. 미녀가 곰과 함께 웃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살이 조금 붙은 자신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뭐 하세요? 잠이나 자요. 내일도 묘실에 들어가잖아요.”

    옆에서 자리에 누운 산박이 움직이는 강합을 보며 말하자 그는 냉큼 대답하며 드러누웠다. 허나 재잘거리는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게 만들어서 잠을 자기 힘들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모두가 잠들었다.

    산박은 그날 꿈을 꾸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 모든 것을 가득 채웠다. 그 빛이 그에게 말했다.

    [사악한 변절자, 발루악의 두개골을 부숴라. 그는 비루한 삶 속에서 얻은 희망으로 피 묻은 단검을 단조한 타락한 대장장이이며 인륜보다 스스로의 이익을 탐한 죄악이며 벌레만도 못한 사상을 지닌 사악한 존재다.]

    빛은 금방 사라졌다. 산박은 눈을 떴다. 던전에 들어온 지 3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축적되고 있는 피로감이 있었는데, 그게 싹 사라지고 없었다.

    ‘빛의 신, 팔라딘.’

    운 좋게 살인자를 두 명 죽인 산박은 팔라딘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가 내려준 기도의 제단은 치료수를 만들 때 큰 효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빛 무리는 대장삵의 치료 마법에도 효능이 번져 갈 정도로 유틸성이 좋았다.

    그런 팔라딘의 신탁!

    ‘누군지 몰라도 알 수 있지.’

    시은이 일으켜 세운 해골!

    빛의 신 팔라딘은 그 두개골을 쪼개는 걸 원하고 있었다. 그 대가는 말하지 않았지만 산박은 그 두개골을 쪼개고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 원하는 대답과 보상을 받으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문제인데…….’

    해골 하나를 쪼개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남는다. 시은에게 대가를 주고 거래를 해야 했다. 또한 그게 잘 안된다면 포기해도 좋았다. 팔라딘의 신탁에는 그 어떤 강제성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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