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 *
“처음 뵙겠습니다. 장.지.건.이라고 합니다.”
흙이 묻은 작업복을 입은 그가 고개를 제법 푹 숙였다. 산박 또한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고개를 숙여 주었다.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장 노인에게 소개를 받았고, 오늘 오기로 한 사람이었다. 다름 아닌 비료 때문이었다. 장 노인이 그가 비료를 아주 싸게 줄 거라고 했기에 산박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사전에 비룟값을 조사해 놨지.’
산박이 비료가 쌓인 1톤 트럭을 힐긋 쳐다보자 지건이 비료 포대를 하나 거뜬하게 들어 올려 산박에게 보여줬다.
“한 포대에 25kg짜리 비료입니다. 원래 300평 구매하셨고 1,500평을 더 얻으셨으니 1,800평 정도 농사지으려면 못해도 농사짓기 전에 300포대는 뿌려야 합니다. 여기 땅 질이 좀 좋지 못하거든요.”
부욱!
그는 비료 자루의 윗부분을 손길 한 번에 뜯어내며 한 손으로 비료를 들어 올렸다. 쿰쿰한 향이 났다.
“땅 힘이 안 좋아도 요즘은 비료면 다 되니까, 그나마 행복이죠.”
그 말을 들은 산박은 생각보다 비료가 많이 들어가는 게 황당했다. 하지만 지력이 안 좋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부동 지구는 버려진 땅은 많아도 농사짓는 곳은 드물었다. 해도 감자 농사가 전부였다. 이렇게 지력이 안 좋은 곳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비료를 많이 뿌려야 했다.
“다른 곳은 이모작해도 여기는 한 번밖에 안 하잖아요. 그것도 감자를! 다 땅에 힘이 없어서 그래요. 비료를 쓰기에는 감자 농장에서 이익을 얻기 힘들죠.”
구구절절 떠들며 지건이 비료를 확인해 보라고 손을 쭉 내밀었다. 비료를 손으로 만져 봤지만 산박은 뭐가 좋은지 알 수 없었다.
“포대에 얼마를 생각하세요?”
그는 바로 가격을 물었다.
“3천 원요.”
“3천 원요?”
25kg 비료는 보통 7천 원~만 원 돈이었다. 그걸 반값에 준다니 눈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
지건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원가로 가져오는 것이기에 결국 자신에게 이득이었다. 아무리 가격이 싸도 안 사서 문제였다. 경직된 경제 탓이었다.
‘3천 원이라도 300포대면 90만 원인데.’
바로 주기에는 큰돈이었다.
“혹시 할부 됩니까?”
“예. 믿음직하신 던전 사용자 아니십니까.”
“그럼요.”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곧바로 계약서가 나왔다. 그곳에 산박은 지장을 찍었다.
카드 회사는 수수료가 너무 비싸서 사람들이 잘 쓰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못 쓰는 이들도 많았고, 취급하지 않는 곳도 많아졌다. 카드 회사가 수수료에 미쳤기 때문이었다. 더는 편한 게 아닌 게 신용 카드였다.
때문에 5개월간 다달이 직접 이체를 하기로 하고 산박은 곧바로 고아원에 비료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죠. 내리지도 않았으니.”
“예.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하하하.”
두 사람은 굳게 악수를 하였다.
* * *
그 뒤에 산박은 시간을 내서 당진 국제 던전 시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아메리카 던전 컴퍼니가 들어오며 생성된 대도시였다. 대한민국의 5대 도시 중 한 곳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당진 국제 던전 시장에는 던전 상품을 취급하는 회사들이 난립해 있었다. 당연히 국내의 던전 회사들도 많았다. 해외와 가격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었기에 소비자에게는 좋았다. 발품을 팔아서라도 가야 할 곳이었다.
‘돈은 들어온다. 이제 1레벨 장비를 하나쯤 사도 나쁘지 않다.’
부동 지구에서 고아원 인력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산박은 계속해서 던전 대전 상인 공회에 물건을 납품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일을 벌여도 괜찮았다.
‘융통성 있게 할부도 해주고 있으니까.’
장 노인의 생각 이상으로 산박은 돈을 잘 벌고 있었다.
당진은 전과 다르게 크게 발전했다. 아메리카 던전 컴퍼니가 그곳에 자리 잡아서였다. 당진에는 국제공항 또한 지어져 있었다. 파괴된 인천 공항 대신에 지어진 것이었다.
당진에 도착한 그를 향해서 트럭이나 차량의 트렁크를 열고 자리를 잡고 있는 이들이 다가왔다.
“옵쇼, 옵쇼, 어서 옵쇼!”
호객하는 이들이 무분별하게 많았다. 산박을 거침없이 잡아당기기도 했다.
“2레벨 이하 던전 물품 50% 세일해요! 보고 가요!”
배를 드러내고 마치 레이싱 걸처럼 입고 있는 여성 호객꾼들은 호객으로 먹고사는 이들이었다. 여자임을 확실하게 어필하는 호객꾼들은 강한 힘을 지닌 던전 사용자들에게도 거침없었다. 하지만 산박은 거기에 놀아나지 않았다.
그들을 매정하게 내치고 산박은 당진 도시 깊이 들어갔다. 조금만 들어가도 호객꾼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고객에 목을 매달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 사업하는 곳이었다.
산박은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인터넷은 믿을 수 없었다. 광고를 받고 게시 글을 쓰기 때문이었다. 던전 정보조차도 업체 사이트에서 돈을 주고 사는 게 산박이었다. 무분별한 대량의 헛정보 속에서 놀아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몇 시간이고 투자할 수 있었다.
‘가볍고, 조금 헐렁한 장비.’
동물로 변신하는 산박은 대단한 장비를 입을 수 없었다. 강철 갑옷은 생각도 안 했다. 그는 조끼를 집어 들었다.
점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산박이 부른다면 냉큼 다가올 준비를 바짝 했다. 던전용품의 라벨은 제법 길었다. 상세한 설명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산박은 이를 읽기보다는 점원을 불렀다.
“여기요.”
“예, 고객님!”
그는 산박이 들고 있는 조끼를 보고 냉큼 말을 이어 나갔다.
“예. 이 조끼는 반발 파동 조끼라는 상품입니다. 1레벨 장비 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15만 원 수준의 가성비 높은 상품이죠. 충격을 받자마자 충격파를 터트리기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강력한 경장비입니다.”
“에이, 요즘 누가 경장비를 산다고…….”
“사죠! 후방에 계시는 분들한테는 이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데요.”
그는 곧장 시연 영상을 넓은 패드로 보여줬다. 이를 본 산박은 턱을 매만졌다. 확실하게 한 번 공격을 막을 수 있고 적도 균형을 잃을 정도의 충격파였다. 특히 무기를 떨어뜨리는 연출은 산박이 봐도 구매욕을 당겼다.
‘과장 광고일 수도 있지.’
방심은 금물이었다.
“디스카운트는 어느 정도로?”
“14만 원까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 흥정할 생각 없습니다. 깔끔하게 만 원 빼드립니다. 열 분 빼드리면 전 10만 원 손해 보는 겁니다. 엄청난 혜택을 드리는 겁니다.”
피식.
산박은 기도 차지 않았다.
“다른 거 보고 올게요.”
“예!”
그렇게 물건들을 둘러보던 산박은 득템을 할 수 있었다.
“이게 뭐라고요?”
“보조 주문 장갑입니다. 주문에 쓰이는 힘을 대신 부담하는 장갑입니다. 반드시 던전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충전을 하셔야 합니다.”
“와우.”
주문에 소모되는 힘을 대신 사용하는 장갑이었다. 1레벨 던전용품이었기에 그 수준은 개인차가 심했고 5%~15% 사이였지만 그래도 엄청났다. 안 그래도 적은 주문을 사용하는 게 1레벨 던전 사용자였다.
‘그걸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거니까.’
“얼마입니까?”
“50만 원으로, 1레벨 던전용품 최고 상품입니다.”
“헉.”
산박은 절로 헉 소리를 냈다. 무지막지한 가격이었다. 말 그대로 기반이 있는 던전 사용자나 구매할 수 있었다. 혹은 상품을 많이 납품하는 생산 주문이나 기술을 지닌 자들이나 살 법했다. 산박도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는 장갑을 살 수 없었다.
‘벌린 일이 있으니…….’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그는 반발 파동 조끼도 사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걸 사기에는 너무 좋은 걸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특히 반발 파동 조끼는 상품 평이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도 사지 않은 걸 살 정도로 그 조끼에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산박은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골목의 조금 안쪽까지도 확인했다.
“이건 뭡니까?”
한 가게에 수북이 쌓여있는 투척 단검을 보며 산박이 물었다.
“여기 사장님이 주말마다 만드시는 것인데 아무도 안 사 가서 쌓인 거예요.”
서른 자루에 15만 원. 개당 5천 원인 셈이었다.
‘좋은데?’
하지만 수량이 너무 많았다.
“낱개로는 안 팝니까?”
“그런 말 하면 사장님이 꺼지래요.”
“그게 손님한테 할 말입니까?”
“아니, 제가 아니라 사장님이 그렇게 말하라고 했다고요.”
불친절한 종업원이었다. 작은 가게의 규모를 생각했을 때, 저 종업원도 사장과 깊은 관계인 듯했다.
‘흠.’
산박은 머리를 굴렸다.
‘섬광 단검.’
단검의 검집은 없었다. 애초에 투척 단검이기 때문이었다. 시연 영상이 작은 화면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투척하고 1.5초 뒤에 섬광을 토해내는 단검이었다. 적에게 단검의 피해도 줄 수 있어서 부무장으로 제법으로 보였다.
‘던전에서 쓰면 굉장히 쓸 만하겠는데.’
훈련한다면 확실하게 적에게 큰 혼란을 주고, 아군은 피해 하나 없을 것이었다.
“왜 이렇게 안 팔립니까?”
“저야 모르죠.”
“흠.”
아무래도 불안해진 산박이 단검 하나를 들고 종업원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한번 써보고 구매를 결정하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네. 상관없어요. 그리고 싼 거 보면 딱 아시죠? 섬광은 일회용인 거요.”
“예, 예. 알고 있습니다.”
산박은 종업원이 적당히 세운 표적에 그대로 단검을 투척했다. 고작 세 걸음 거리에 불과했기에 박히고 나서야 단검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상당하다……!’
그렇기에 팔릴 수가 없었다. 워낙 많은 수량을 사야 하니 대부분의 구매자가 시험하기를 원했을 텐데, 강렬한 섬광을 보고 구매 욕구가 뚝 떨어졌을 터였다.
‘어둠 속에서라면 더욱 빛이 강렬하겠지.’
아군 피해의 가능성이 더 커졌다. 동시에 다른 단점들도 눈에 들어왔다.
‘퇴화동굴인에게는 통하지도 않아.’
무엇보다 시각이 쇠퇴한 던전 괴물들도 많았기에 언제 어느 때나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단검을 투척하면 섬광은 무조건 터지게 되어 있었다.
‘난전 상태에서도 던질 수 없어.’
단점, 단점, 단점. 또 단점이었다.
“음.”
그런 단점이 수두룩함에도 산박은 이 가게를 떠날 생각을 못 했다. 왜냐하면 팀장 입장에서는 이 ‘섬광 단검’이 최고의 부무장 품목이기 때문이었다.
‘큰소리 떵떵 칠 수 있는데.’
팀장이 팀원을 위해서 부무장, 그것도 1레벨 던전용품을 무료로 내준다? 욕하다가도 충성 충성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이었다.
“흠…….”
아직 팀의 이름도 없는 게 산박이 이끄는 팀이었다. 이제 서서히 팀의 결속력을 높일 때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전방에 설 전사가 받게 되는 위협과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작은 호랑이로 변했을 때는 몰랐었지.’
대부분이 기습이었고, 상대의 다리를 물어 잡아당기면 게임이 끝났다. 하지만 지난번 경험으로 산박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박이 집중성탄 같은 파괴력 있는 주문을 개발한 것도 모두 수륵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는 전방에 서는 것이 두려웠다.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아.’
전사에게 지급하면 난전에서 쓴다 해도 적어도 자신 하나는 지킬 수 있을 터였다. 산박은 후방에 있으니 그 여파가 크게 미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것을 제쳐 놓더라도 사람들에게 생존 물품을 주는 건 좋은 일이었다.
‘훈련하기도 나쁘지 않고.’
훈련을 통해 섬광을 소비하면 전투 중에 평범한 투척 단검으로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몇몇 단점들도 없앨 수 있었다.
‘나쁘지 않지.’
산박은 그대로 서른 자루를 15만 원에 구매했다. 마음 같아서는 예순 자루를 사서 넉넉하게 훈련에 쓰고 싶었지만 지갑 사정이 위태로웠다.
산박의 팀에 보급 장비가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단번에 팀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공짜로 1레벨 던전 장비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부장비에 불과했지만 그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당장 훈련해서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어요?”
의욕적인 대답도 흘러나왔다. 그들은 훈련하며 돈독해졌고 팀워크를 쌓아 나갔다.
산박은 몇몇 던전 경험을 통해서 행동 훈련을 하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웃음소리도 자주 터져 나왔다. 동시에 팀원이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큰 재산이었다.
“다음 주에 1레벨 던전을 공략하겠습니다.”
산박의 말에 서충호가 주먹을 굳게 말아 쥐었다. 그의 향상심이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