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70)
  • 20화

    <휴식과 준비>

    1레벨 특수 던전 ‘진화 던전’에 대한 정보를 산박이 언급했다. 두 사람 모두 집중했다. 상당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소주를 한 잔 마신 산박이 입을 열었다.

    “진화 던전은 보스 몬스터가 계속 진화하는 특수 던전이죠.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강대한 보스 몬스터와 싸워야 해요.”

    그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절로 달아올랐다.

    “저희의 판단이 옳았네요!”

    “역시! 믿고 있었다고, 젠장!”

    특히 강합은 지나칠 정도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종일관 빨리 빤스런을 치는 걸 원했던 산박과 시은과는 다르게 강합은 자신의 판단을 한 번 굽혔기 때문이었다.

    판단을 다르게 해서 옳은 결정을 내렸을 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을 때의 기분은 째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강합은 지네 놈의 몸통을 환도로 내려치면서 그 기괴하기 짝이 없는 재생 현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시은보다 반응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놈의 능력은 재생 능력과 돌진 쌍뿔. 특이 사항은 진창에서 잘 다닌다는 것이고… 혈액을 많이 먹으면 피부도 더 단단해진다고 하네요. 약점은 화염이고요.”

    산박이 덧붙여서 말했다.

    “퇴화동굴인의 피를 먹고 진화하는 지네가 던전의 가장 큰 콘셉트죠. 퇴화동굴인은 기본적으로 벌레 농장을 통해서 먹고살아 가요. 그들의 대다수가 비전투원이죠.”

    내친김에 산박은 그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정보에는 그들의 던전 생태계를 조사한 것도 있었다. 돈값을 제대로 하고 있었는데, 산박은 그 덕에 이 정보 사이트를 매우 신뢰하고 있었다.

    “그 병사들은 뭐였죠?”

    “스타트. 던전 기믹의 시작을 여는 북소리죠. 소란이 일어나면 병사들은 적을 찾고, 상대는 병사들을 죽일 수밖에 없죠. 그때부터 보스 괴물로 향하는 던전 원시 주술이 시작돼요.”

    “만약 그 병사들을 안 잡으면요?”

    “거대혈액지네는 크지 못해요. 바로 보스 방으로 간다면 약한 상태의 놈과 호위병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고요.”

    죽이지 않고 무혈로 상층으로 올라간다면 거대혈액지네와 호위병과 동시에 싸워야 했다. 분명 까다로울 터였다.

    그들은 그렇게 특수 던전에 대해서 떠들며 시간을 빠르게 보냈다. 어느새 수륵에 대한 것도 잊었다. 죽은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잊히기 마련이었다.

    “오빵, 나 취한 것 가타~ 나 볼 너무 빨갛지? 그렇지? 이래서 나 집에 제대로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오!”

    소주가 제법 들어간 시은이 산박에게 수작질을 걸었다.

    “우리 지금 낮술 마시거든요? 그리고 안 취한 거 다 알아요. 소주 한 잔도 세 번에 나눠서 마셨잖아요.”

    “와! 날 그렇게까지 자세히 보고 있었던 거야? 술이 확 깨는데?”

    “확, 씨.”

    산박은 술을 테이블 밑에 내려놓고 손날로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술은 더는 없었다.

    그 모습에 강합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시은은 여자가 피울 수 있는 꽃 중에서도 섹시한 꽃이었고, 나이 또한 젊은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여자의 가치가 가장 높은 시기였다. 백만장자의 아내가 될 수 있는 엄청난 출세 도구를 지닌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것을 취한 상태에서 칼같이 자르는 모습은 산박을 괴짜로 여겨지게 하기 충분했다.

    시은은 술잔을 새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전투를 해야 했기에 손톱은 잘 깎여 있었지만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 손가락의 놀림만 봐도 강합은 꼴릿해졌다. 술과 만나면서 굉장히 야해 보였다.

    ‘의외로 싼 여자일지도 몰라.’

    “아~ 저도 오늘은 그냥 서울 근처에서 하루 지내야겠네요.”

    “이모! 여기 삼겹살 2인분 더요!”

    강합의 말과 시은의 말이 겹쳤다.

    “알았어!”

    시은은 단박에 그것을 무시했다. 그리고 산박이 내려둔 소주와 맥주를 자꾸 테이블 위로 올리려고 하며 산박과 티격태격 장난을 쳐대었다.

    ‘제기랄.’

    강합은 그걸 보고 눈을 감으며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역시 예쁜 여자는 항상 임자가 있었다. 없어도 자신에게는 오지 않는 게 미녀라는 것이었다.

    회식은 두 시간 정도 이어졌다. 그다음에 세 사람은 같이 버스를 타고 다시 세종시로 돌아가 바로 헤어졌다. 시은이 가장 먼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고, 그다음 택시가 오자 강합이 산박에게 택시를 양보했다. 산박은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강합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려 주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팀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산박은 지니고 있던 돈 중 5만 원을 거침없이 강합의 주머니에 넣었다.

    “택시비 하세요.”

    “예? 괘, 괜찮습니다! 팀장님인데도 돈 모두 공평하게 받았지 않습니까.”

    강합이 허둥지둥거리며 품에 손을 넣었지만 산박은 그사이에 택시에 타서 창문으로 손을 흔들었다. 강합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서둘러 액수를 확인했다.

    ‘헉.’

    이제 1레벨 던전 공략자가 된 그에게 5만 원은 큰돈이었다. 어디서 막노동질을 해도 그만큼은 벌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산박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전사는 쉽게 죽는다. 그런 리스크를 떠안고 있다.’

    그의 손이 살짝 떨렸다. 자신이 그 거대 지네에게 표적이 되었을 때, 살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놈이 수륵을 노린 건 천운이었다. 그 덕에 자신이 살 수 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걸리면 죽는 공격법이었다.’

    어둠 속에서 훅 떨어진다. 특히나 대장삵도 간파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산박은 강합에게 돈을 5만 원 찔러 넣어 줬다. 그건 앞으로 계속 팀을 하자는 뜻을 돈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전사는 중요하다. 하지만 공급은 분명 적을 수밖에 없다.’

    죽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미디어가 말하는 로망은 없었다. 초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떠드는 이들의 음험함을 산박은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던전은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그걸 깨달았지만, 산박은 던전 공략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전부터 꾸준히, 계속 꿈꾸고 있는 꿈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전까지는 그는 던전 사용자였다.

    * * *

    산박은 그 뒤로 2일을 내리 쉬며 빈둥거렸다. 무기력증에 걸린 것처럼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나마 산박이었기에 그것에서도 빨리 몸과 정신을 추슬렀다.

    물론 그렇게 하기 싫은 와중에도 착실하게 힘을 소비해서 물약을 만들어 트럭 상인 박조조에게 넘기는 걸 잊지 않았다. 초인적인 동기가 그에게 부여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새롭게 얻은 ‘별의 수련자’에 대한 복습을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 15년에 달하는 모호한 감각과 거세된 경험이 모든 것을 불확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관한 탐구가 필요했다. 기술이 기술답게 여겨지도록, 스킬을 기술로 만드는 것처럼 체득하는 과정은 필수적이었다.

    그 행위를 반복하며 팀원 두 명과의 관계도 계속 온라인으로 유지했다. 그들은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듯했다. 돈의 가치가 ‘판타지 쇼크’ 이전보다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로 일주일이 더 흘렀다. 그들은 다시 0레벨 던전을 전전하며 카르마를 조금이라도 얻고 실전 감각을 익혀 나갔다. 종종 모여서 훈련을 하기도 했다. 세 명 모두 새로운 주문과 기술을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서 산박은 카페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케이크가 세팅되고, 크림이 듬뿍 올려진 빵이 놓였다. 그런 사치를 부려도 될 정도로 수익을 올린 그들이었다.

    “전 기술을 얻었습니다. 별의 수련자라고, 거창한 건 아닙니다.”

    산박이 먼저 공개했고, 효과를 말했다. 손에 작은 별 무리를 담아서 보여 주기도 했다. 모두 신기해하는 눈초리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다음에는 강합이 입을 열었다.

    “전 발달된 근육이라는 기술을 얻었습니다. 체중이 70kg 이상이면 4kg의 근육이 증가하고, 그 미만이면 8kg의 근육이 몸에 붙습니다.”

    길강합은 장신에 뼈밖에 없었는데, 그 기술을 획득하고 살이 제법 붙었다.

    시은은 탁자를 포크의 끝으로 땅땅 치며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저는 주문요. 주문이 두 개 있기는 하지만 모두 변변찮은 거잖아요? 그래서 그걸 하겠다고 했는데, 세상에나 마상에나! 마녀의 손길(Witch's Touch)을 얻은 거 있죠.”

    공격 주문이며, 상대의 목을 조르는 저주였다.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 뒤로 간단히 훈련을 하고 밥을 먹고 헤어졌다. 시은은 노래방에 가자고 산박을 꼬셨지만 어림도 없었다.

    “공부해야 해요. 별의 수련자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거든요.”

    손을 흔들며 산박이 가자 시은도 빠르게 갈 길을 갔다. 강합은 입맛을 다시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올 덴 나오고 들어갈 덴 들어간 이시은은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허나 그녀의 붉은 혀가 뱀처럼 날름거리는 걸 강합은 보지 못했다. 그녀는 산박이 지닌 신념에 확실하게 끌리고 있었다.

    * * *

    산박은 전에 만났던 부동산 업자를 다시 찾아갔다.

    “어, 오랜만이야.”

    부동산 내부에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가득했다. 삭힌 홍어를 먹고 있어서였다.

    “밖에 나가서 이야기 좀 합시다.”

    “오케이!”

    제법 나이가 있는 부동산 업자는 배달로 받은 홍어를 다시 봉지에 싼 다음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담배부터 찾았지만, 산박은 그 담배를 손으로 뺏었다.

    “저 담배 연기 안 좋아해요.”

    “참, 나!”

    그가 산박을 가볍게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 이상으로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용무를 물었다.

    “뭘 하려고? 창고 부지가 또 필요한 건 아닐 테고.”

    “예. 농사지을 땅 좀 얻었으면 해서요.”

    “흠. 많이 있지.”

    부동산 업자는 문을 열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지도를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삭힌 홍어 냄새를 맡으며 산박은 인상을 찡그린 채 소파에 앉았다. 부동산 업자가 조금 낮은 탁상의 유리 안에 있는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몇 평이나 살 거야? 보통 3백 평 정도는 사는데. 천 평도 나쁘지 않고.”

    “텃밭 정도면 충분한데…….”

    “에이, 그럼 안 팔지. 3백 평 가지고 있는데 백 평만 떼어 봐. 2백 평짜리를 누가 사, 밭으로? 안 그래? 가진 사람은 한 방에 파는 걸 좋아해요, 이 사람아.”

    그 말에 산박이 입맛을 다셨다.

    “몇 평짜리가 있는데요? 웬만하면 여기 고아원 근처였으면 하는데.”

    “고아원? 아, 거기 출신인가 보네. 내가 거기에 다달이 쌀을 대고 있어요.”

    “예? 정말요?”

    산박은 매우 놀랐다. 고아원 사정을 빠삭하게 알지 못하고 있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업자는 어깨를 펴며 거드름을 피웠다.

    “고럼. 물론 많이는 못 보내 주지만 그걸 한 지도 벌써 15년째라고.”

    그렇다면 산박 또한 그 쌀밥을 먹었을 것이다. 가만히 그를 보자 부동산 업자가 괜히 코를 손으로 문대었다.

    “크흠. 뭘 그렇게 쳐다봐? 내가 그런 거 안 하는 것 같아?”

    “예. 좀 의외라서…….”

    그 말에 두 사람 모두 크게 웃었다. 산박은 부동산 업자가 자신에게 크게 다가오는 걸 느꼈다.

    “명함 하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렵지 않지. 여기 부동 지구는 나랑 저 밑 집이 다 꿰차고 있으니까, 내가 안 되면 저 밑에 집도 가봐.”

    “예.”

    산박은 명함을 받았다. 새하얀 바탕에 어떤 것도 없는 평범한 명함이었다.

    [당산 부동산 함희두(咸熙頭)]

    “강릉 함씨입니까?”

    “양근 함씨다. 자네는?”

    “협계 태씨입니다. 강원도 쪽에… 예…….”

    “아… 그런가.”

    서로 이름 뜻도 나누고 난 다음에야 본론으로 다시 돌아갔다. 결국 산박은 3백 평을 구매하기로 했다. 평당 가격은 집주인이 천 원이라고 했기에 30만 원을 준비해야 했다.

    “상당히 싼데요?”

    “세종시에서 산을 넘어야 여기니까. 거기에 고아원 근처는 땅값이 낮아.”

    그 말에 산박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지는 걸 느꼈다. 아무튼, 그가 중개해 준다고 했기에 계약금 5만 원부터 건네주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모든 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결되었다.

    땅문서를 획득하고 나서 산박은 고아원으로 향했다. 그 땅을 고아원에 주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는 청부 살인업으로 다른 아이들이 굶지 않도록 노력한 신부와 손을 잡았을 때부터 누구도 믿지 않게 되었다.

    “계약… 말인가요?”

    “예. 밭을 빌려드릴 테니 아이들을 시켜서 농사를 지으세요. 굶지 않으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뭐라도 심어서 해보세요. 대신에 수확물의 3할은 제가 가져갑니다. 다른 고아원에도 주고 싶거든요.”

    “그렇다면야…….”

    수녀님은 어렵지 않게 허락했다. 뛰어노는 애들을 노동시킨다? 당장 폐허가 된 서울만 가도 치맛자락을 올리는 소녀들을 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의 사법 체계와 윤리는 ‘판타지 쇼크’로 무너졌다. 살기 위해서라면, 이권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었다. 어린 나이에 노동을 하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모두 무력을 얻기 위해서 던전 사용자가 되려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공급만큼 던전 물품의 가격은 낮게 측정되었다. 허나 그것을 알더라도 할 수 있다면 모두 던전으로 몸을 던졌다. 그게 아니면 미래가 없기 때문이었다. 화석 연료를 쓰는 자동차조차도 7할 이상이 초월의 힘에 기대고 있었다.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산박은 수녀와 계약하고 그녀가 선택한 아이들이 사인을 하는 모습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저들의 노동력은 값싸게 이용될 것이었다. ‘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그 어떤 임금도 필요 없이 그들이 스스로 쟁취해낸 생산품의 3할을 산박에게 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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