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70)
  • 19화

    그것은 그대로 훅 하고 떨어져 내렸다. 짐승이었기에 본능적으로 표적을 선택했다. 가장 우선적으로 노리는 것은 가장 약해 보이는 놈이었다.

    불안감에 몸을 조금 굽히고 있는 수륵은 자세도 나빴지만 단신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가장 약해 보이는 것은 짐승에게 당연하였다. 또한 산박이 주의를 끌었을 때 수륵은 다른 이들과 조금 떨어져 있기까지 했다. 주의력이 산만해졌고,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그 정도로 정신 상태가 안 좋았다. 그를 데리고 이곳까지 올라온 팀장 태산박의 명백한 실수였다.

    ‘거대혈액지네’의 주둥이에 있는 뿔이 그대로 수륵을 찔렀다. 강철 갑주를 입고 있었기에 관통되지는 않았지만 수륵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횃불의 사정거리 밖으로 간 것이다.

    “아아아악!”

    수륵이 비명을 질렀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강합의 장창이 횃불을 벗어나려는 지네의 긴 몸체를 그대로 찔렀다. 운이 좋게 연골 사이에 정확하게 찔러진 장창은 순식간에 지네에게 끌려갔고, 강합은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바닥이 피로 인해서 진창이 되어 있었기에 거대혈액지네의 움직임에 저항 한번 하지 못했다.

    “으억!”

    강합이 쓰러졌지만 산박은 이미 화염 물약을 슬링해서 정확하게 지네의 피부에 물약을 깨뜨릴 수 있었다.

    화아아악!

    마녀가 만든 화염 물약은 상당한 수준을 보여줬다. 변변찮은 공격 주문 하나 없는 시은에게 있는 유일한 공격력이었다. 이글거리는 화염은 끝도 없이 길쭉한 몸체를 지닌 거대혈액지네의 피부를 큼지막하게 태웠다.

    화염 물약이 깨지면서 공기 중에 흩날렸고, 그사이에도 지네는 계속 달렸기에 아주 많은 부분에 불꽃이 붙었다. 그 덕에 시은은 지네의 머리를 노릴 수 있었다. 화염 물약의 불빛은 횃불보다 먼 곳에 존재했고, 수륵을 끝장내기 위해서 움직이는 지네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길다!’

    석궁을 추켜올리면서 시은은 두려움에 떨었다. 생각보다 지네의 몸길이가 너무나도 길었기 때문이었다.

    산박은 ‘동물 변신 주문’을 쓸 힘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별빛탄 주문을 쓰는 데 썼다.

    “살려줘! 살려줘어어어! 아아, 아아아악!”

    그사이에 수륵의 비명 소리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고, 계속해서 이동했다. 지네에게 물린 것이 틀림없었다.

    강합은 환도를 뽑았지만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지네의 길이는 압도적이었다. 천장의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둠이 뿌리내린 이곳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횃불’과 ‘불꽃’이 있는 시야는 지네의 몸통과 다리로 가득했다.

    그 폭은 소형견 수준이었지만 길이가 긴 것이 문제였다. 그런 주저함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고 찌를 생각을 못 하고 있는 강합의 무릎을 박차고 대장삵이 그대로 뛰어들었다.

    “크앙!”

    몸통을 물고 늘어지자 순식간에 피가 쏟아져 나왔다. 피부가 딱딱해 보이지만 형편없는 내구력을 지니고 있었다.

    쏴아아악!

    산박이 쏜 별빛탄도 맞는 족족 굉장한 타격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체액이 쏟아져 나오며 지네의 육신이 무너져 내렸다. 그제야 강합도 나서서 점프하며 환도로 천장에 있는 지네를 찔렀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수륵의 외침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피해!”

    대장삵이 강합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덩치가 큰 놈이 펄쩍펄쩍 뛰며 칼춤을 추고 있으니 대형혈액지네가 분노한 것이었다. 분노하면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는 법이었다. 지네는 천장, 바닥, 천장, 바닥을 번갈아 가면서 물결치듯이 머리를 움직였다. 강합은 환도의 손잡이 밑에 있는 끈에 손목을 걸면서 서둘러 화염 물약을 꺼내 그대로 던졌다.

    쨍그랑!

    화아아악!

    불꽃이 터져 나왔다. 고통스러운 소리는 없었다. 지네는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놈은 엄청난 속도로 타올랐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시은은 쓰러진 놈의 머리에 곧바로 화염 물약을 투척해서 터트려 버렸다.

    화르르르!

    모두가 숨을 죽였다. 환호성 따위 없었다. 거대혈액지네의 몸뚱어리가 끝도 없이 비틀어지고 꼬이고 버둥거려서였다. 너도나도 지네의 몸을 피해 물러나기 바빴다.

    오더가 없어도 모두 함께 뒷걸음질 쳤다. 산박은 주변을 둘러보며 두 사람 모두 뒤로 물러나는 걸 확인했다. 대장삵은 가장 1등으로 가장 멀리 있었다. 치고 빠지기가 귀신같은 전사였다.

    “죽었겠죠?”

    “살 수가 없죠.”

    “생각보다 방어력이 약했어요.”

    지네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죽었다. 화염 공격에 매우 취약했다.

    “수륵 씨를 찾아야겠어요.”

    죽은 뒤에도 굼뜨게 움직이고 있는 놈의 몸체는 강합과 산박이 맡았고 시은과 대장삵이 수륵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퍼석!

    강합과 산박은 단단해 보이는 것 같지만 형편없는 표피를 지닌 지네의 느리게 움직이는 몸통을 박살 내는 작업을 했는데, 혹시 몰라서였다. 허나 그 작업 속에서 경악스러운 사실이 드러났다.

    “재생력이 엄청난데요? 화염이 아니었다면 잡는 데 제법 고생을 했겠습니다.”

    강합은 매우 놀랐다. 환도로 내려쳤지만 서로 뭉치고 엉키면서 다시 표피가 생겨나고 살이 생겨나서였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토막을 몇 번 내고 나서야 괴물의 재생이 멈췄다. 전투는 짧았지만 임팩트가 대단한 보스 괴물이었다.

    “이 정도면 확실하게 죽은 것 같습니다.”

    “좋아요. 일단 부산물로 챙길 수 있는 다리를 서둘러 챙기세요. 보스가 죽었으니 곧 던전도 사라질 겁니다. 전 장기를 챙기겠습니다.”

    “예!”

    강합이 발 빠르게 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환희가 깃들어 있었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걸 애도하기보다는 자신이 살았다는 것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산박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가 장기를 취했을 때, 시은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서둘러 달려갔다. 시은과 강합이 쥔 횃불에 수륵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끔찍한…….”

    목이 꺾여 있었고, 얼굴은 땅에 긁혀 뭉개져 있었다. 두 다리는 뒤엉켜서 꺾여 한쪽으로 확 돌아가 있었다. 지네의 돌진력을 가늠케 했다. 순식간에 죽었지만 정면 공격력 하나는 엄청난 놈이었다.

    “…….”

    수륵은 강철 갑옷을 입고 있어서 다른 곳은 비교적 멀쩡했다. 얼굴만이 완전히 살덩이가 되고 뼈가 드러나 있었다. 눈이 계란프라이처럼 터져 있어서 결코 얼굴로 보이지 않았다.

    “우웨에에에엑.”

    강합이 그대로 구토를 했다. 시은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쾌락이 그녀를 지배했다. 고개를 돌리면서 그녀는 가릴 수 없는 눈웃음을 지었다.

    “…챙길 것 챙깁시다.”

    “예…….”

    부산물을 최대한 배낭에 쑤셔 넣고, 산박은 지네의 큰 머리를 잘라낸 다음에 양팔로 꼭 껴안았다. 던전이 사라져도 가져가는 방법이었다. 곧 주변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레벨 업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사용자 태산박을 인식합니다. 필요한 정보를 출력합니다.]

    [던전 사용자 태산박의 존재를 특정합니다. 당신은 카르마의 선택을 받은 자입니다.]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충분한 카르마를 획득했습니다. 레벨 업을 위해서 남겨놓을 수 있고, 자신의 수준에 맞는 새로운 주문과 기술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산박에게 선택지가 생겼다. 특수 던전을 한 번 공략한 것뿐인데도 바로 반응이 왔다.

    ‘이거지.’

    사람 하나가 죽었다. 그런 가치가 있어야만 했다.

    “레벨 업은 할 수 없나?”

    [예.]

    “요구 카르마를 알 수 있나?”

    [아니오.]

    2레벨이 되기 위한 요구 카르마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현재 획득한 카르마를 계속 보유하고 있을지 기술이나 주문을 획득하는 데 쓸지 결정해야 했다.

    “내가 확인해야 할 다른 게 더 있지는 않겠지?”

    [없습니다.]

    기도의 제단을 얻은 것과는 대비되었다. 그렇게 쉽게 신으로부터 뭔가를 받을 수는 없는 듯했다.

    ‘2레벨로 가는 길은 험할 것이 분명하다. 오래 걸리더라도 돌아서 가야 해. 차근차근…….’

    특히 산박은 더했다. 그는 0레벨 던전 사용자에서 1레벨이 되는 데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더 오랜 시간을 소모했다. 왜 그런 개인차가 생기는지는 몰랐지만 그는 적어도 1레벨 던전 어느 것도 무리 없이 클리어할 정도는 되어야 했다.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걸릴 테니까.’

    그렇게 산박은 2레벨로 향하는 카르마 저장을 가장 먼저 포기했다.

    ‘주문이냐, 기술이냐.’

    1레벨 던전 사용자의 주문, 그것도 드루이드의 주문은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별빛탄’만 봐도 그 공격력이 원시적 구조를 지닌 석궁보다 못했다. 다른 드루이드 주문도 고만고만할 것이 분명했다.

    ‘동물 변신 주문 같은 것이 나오면 좋겠지만, 안 나오면 큰일 난다.’

    차라리 기술을 선택해서 기존의 것을 높이는 게 좋아 보였다.

    “기술을 얻고 싶다.”

    [확인했습니다. 변숫값 조정 중……. 기술을 확인합니다.]

    [별의 수련자 기술을 사용자 태산박에게 부여합니다.]

    그 순간, 산박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 15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것은 별에 대한 지식을 찾아 나서는 드루이드의 여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니었고, 그저 지켜보는 것에 불과했다. 시간의 흐름이 엄청날 정도로 빨랐다. 그 모든 감각은 모호했으며, 미약하게 산박에게로 스며들어 왔다.

    ‘뭔가가 가로막고 있다.’

    지혜가 높은 산박은 자신과 그 드루이드 사이에 존재하는 장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사막을 떠돌았고 그곳에서 유적을 발견했으며 그 과정에서 ‘작은 별’의 존재를 특정했다. 그리고 이를 지식으로 표면화시키는 작업을 11년에 걸쳐서 완성했다.

    수준이 낮은 드루이드가 만든 필생의 업적. 그것이 ‘작은 별’에 대한 지식이었다. 산박은 그것을 단번에 이해하고 깨달았다.

    “아!”

    산박은 탄성을 내질렀다. 미약하고 미약한 기술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연장선에는 별이 있었고 항성이 있었으며 우주가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모든 것의 초석이 되는 기술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저 이론상의 것에 불과했다. 현실은 그저 작은 별의 힘을 다룰 뿐이었다.

    [별의 수련자를 통한 작은 별의 힘은 약한 주문일수록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강한 주문일수록 그 영향력이 작아지는 특징을 지녔습니다. 이를 잘 기억하십시오.]

    그런 시스템의 말도 산박은 깊게 듣지 않았다. 별에 대한 지식, 그것을 음미하기 바빴다.

    ‘별에 대한 기도 행위로 조금 더 수준을 높일 수 있겠어.’

    산박은 더 많은 것을 점찍어 나갔다. 그는 다른 드루이드들과 달랐다. 확실하게 지혜가 높았기에 번뜩이는 영감을 순식간에 잡아챌 수 있었다. 산박의 몸 주위에 별빛이 감돌다가 사라졌다.

    그것을 끝으로 그는 던전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배낭과 지네의 머리가 있었다. 수륵의 시체는 던전이 사라지면서 그곳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결코, 가져올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산박은 먼저 배낭부터 지하철 위로 올렸다. 배낭을 하나 올리는 사이에 강합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도 일을 도왔다. 시은은 가장 마지막에 나타났다. 그녀 또한 일을 도왔다. 여자라고 봐주는 것 따위 기대할 수 없었다. 이곳은 사람이 죽는 곳이었다.

    휴식을 명령하고 산박은 트럭 상인 박조조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를 불렀다. 그는 냉큼 달려온다고 했다. 그사이에 모두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산박은 무덤덤하게 넘겼다. 그는 가장 많이 사람을 죽인 백정이었다.

    다른 두 사람이 정신을 추스르는 사이에 그는 자신이 갔던 ‘특수 던전’에 대해서 돈을 지불하고 열람했다. 요구 금액은 15만 원에 달했다. 0레벨 던전 사용자가 던전을 세 번에서 다섯 번을 뛰어야 얻을 수 있는 큰돈이었다.

    “여기!”

    산박이 소리를 지르자 박조조가 쪼르르 달려와서 냉큼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물건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최고가에 모시겠습니다!”

    거래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주술동굴괴물의 두개골은 4만 7천 원이라는 초고가에 팔렸다. 0레벨 던전을 1.5번 돈 것이나 다름없는 큰 금액이었다.

    길어서 많이 못 가져온 거대혈액지네의 다리는 개당 5천 원에 스무 개가 팔려서 10만 원을 손에 쥐었다. 장기는 상품 가치가 없었고 연구용인데 연구소에서나 떨이로 구입했다. 겨우 만 원에 박조조가 업어 가기로 했다.

    거대혈액지네의 머리는 30만 원에 박조조가 사겠다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산박은 이를 33만 원까지 올려서 팔 수 있었다.

    두당 16만 2천 원을 가져가게 되었다. 2박 3일 만에 귀환했으므로 하루에 5만 원을 번 것이나 다름없었다. ‘판타지 쇼크’로 모든 것이 크게 퇴락한 이 세계에서는 엄청난 돈이었다.

    “술이나 한잔하러 갑시다.”

    산박의 말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경직된 분위기가 풀렸다.

    * * *

    “수륵 씨의 희생을 기억합시다.”

    고기가 오지도 않았는데 산박이 소주를 까서 잔을 따라주며 말했고, 모두 수륵의 이름을 읊으며 잔을 부딪쳤다. 그다음에 산박은 특수 던전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아까 열람을 해봤는데, 제법 비싸더라고요. 우리가 갔던 특수 던전 정보.”

    공짜로 팀원들에게 말해 줌으로써 팀에 대한 애착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고기를 뒤집던 강합은 불을 낮추었다. 집중해서 듣고 싶어서였다.

    “던전 이름은 ‘진화 던전’. 그 기믹은…….”

    산박이 말을 하다 말고 발 연기로 고기를 입에 가져가자 시은과 강합이 모두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이, 진짜! 팀장님!”

    산박은 일부러 크게 웃으며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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