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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8/270)
  • 18화

    환도를 내려쳐서 베었지만 팔은 잘리지 않았다. 뼈가 단단했다. 하지만 고통은 있었고, 근육이 잘려서 제대로 된 힘을 내지 못하고 흐물거렸다.

    형편없이 추락했기 때문에 몸의 모든 균형이 망가져서 발악해도 그 힘이 대단치 못했다. 그 덕에 시은과 강합은 사정없이 무기를 내려칠 수 있었다. 그들 또한 자잘한 상처를 입고 얻어맞았지만 고통도 잊은 채 주술동굴괴물을 죽이는 데 집중했다. 대장삵도 놈의 목을 물어뜯으며 마구잡이로 아가리를 털고 체중을 실어서 다시 못 일어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끼이이…….”

    축 처지는 소리와 함께 괴물이 죽었다. 거의 1분 동안 버둥거리던 놈의 육체는 피로 가득했다. 그제야 그 괴물의 밑에 깔렸던 산박이 말했다.

    “나, 나 좀…….”

    “헉.”

    “어쩌다가……!”

    떨어지는 걸 봤지만 까맣게 잊고 있어서 모두 깜짝 놀랐다. 강합이 서둘러 시체를 들어 올리려고 하자 산박이 괴성을 질렀다.

    “끄아아악! 으으으……!”

    강합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왜, 왜 그러세요?”

    “……!”

    산박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빨이 으스러질 정도로 다물어진 입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질러서 턱 근육에 쥐가 왔다. 거기에 경황이 없었지만 자신의 ‘동물 변신 주문’이 풀려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추락할 때의 충격으로 인한 부상이 생각보다 큰 것 같았다.

    부상당한 산박의 다리를 찾은 시은이 다리를 짓누르고 있는 괴물의 몸을 살짝 들어 올렸다. 강합이 장창을 끼워 넣어 지렛대의 원리로 괴물의 시체를 한 바퀴 돌려서 쓰러뜨렸다. 그제야 산박은 자신의 상태를 볼 수 있었다. 왼쪽 발목이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다행인 점은 치료 마법을 쓸 수 있는 대장삵이 있다는 점이었다.

    ‘마법의 위대함이다.’

    꺾인 발목은 그 어떤 추가적 고통 없이 되돌아갔고 회복되었다. 다만 산박은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사용해 버렸다. 오늘은 더는 힘을 쓸 수 없고 내일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수륵 씨는?”

    마법으로 다리를 치료한 산박이 주변을 훑었다. 벽에 부딪힌 수륵은 몸을 웅크린 채 있었다.

    “수륵 씨?”

    산박이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수륵 씨? 제 말 들리세요?”

    산박이 그를 건드렸는데, 그가 전신을 들썩이더니 그대로 오열하기 시작했다.

    “으허허헝.”

    그 모습에 모두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어미 잃은 새끼마냥 울고 있어서였다. 그가 진정할 때까지 모두 숨을 죽였다. 그는 3분을 그렇게 오열하고 나서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모든 게 무서워져서…….”

    “아닙니다. 그럴 수 있죠. 화염구에 직격을 당하셨는데.”

    “맞아요. 그래도 그걸 맞고 사셔서 저희가 놈을 끝장낼 수 있었어요.”

    모두 칭찬 일색이었다. 수륵의 상태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결코 수륵을 자극하면 안 된다고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수륵을 다독이고, 주술동굴괴물에 눈을 돌렸다.

    그때, 주술동굴괴물의 등에 있던 척추 덩어리가 녹아내리며 피로 변했고, 그대로 땅을 지나가서 벽을 타고 천장으로 향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놀란 표정은 없었다. 산박은 보다 집중해서 그 현상을 봤는데,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는 마치 계단처럼, 혹은 층층이 겹겹이 같은 뭔가가 보이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산박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지혜가 매우 높은 드루이드였다.

    ‘벌레다. 지네가 올라가는 거랑 똑같다.’

    벌레는 퇴화동굴인의 ‘벌레 농장’과도 연관 지을 수 있었다. 그것이 단서와 연결되면서 확신을 주었다.

    “놈의 약점은 등 뒤에 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척추 덩어리인 것 같네요.”

    다른 놈들은 전신이 흡혈귀에게 피를 빨린 것처럼 사라졌지만 이 괴물은 등에서 마구 변형되고 자라난 척추 덩어리만 쪽 빨렸다. 그게 놈의 핵심인 듯했다.

    “붉은빛을 내는 것부터 남다르더니. 거기를 먼저 노렸다면 싸움이 더 쉬워졌을지도 모르겠네요.”

    강합이 말을 덧붙였다. 수륵은 입을 꾹 다물고 한쪽 다리만 덜덜덜 떨면서 지켜볼 뿐이었다.

    “일단은 부산물로 가치가 있어 보이는 머리를 채취하겠습니다.”

    산박이 부산물을 입에 담았다. 화염구를 아가리에서 쏘던 괴물이다. 당연히 그 머리는 가치가 있는 주술 재료였다.

    목을 쳐서 머리가 떨어져 나왔다. 머리에 불이 붙더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와, 씨!”

    강합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반응한 것은 수륵이었다. 그는 화염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풀썩!

    “어어어! 기절했어요!”

    시은이 쓰러진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강합이 서둘러 다가갔다. 산박은 손으로 수륵의 이마를 짚었다.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전위의 멘탈이 박살이 났다. 수륵은 1레벨 던전을 공략할 자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멘탈이 너무 약했다. 훈련을 하면서 그것을 못 느낀 이유는 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마주하지 못해서였다. 0레벨 던전은 자주 공략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도 컸다.

    ‘0레벨 던전 사용자로 남을 자였다.’

    인간 크기에 주술을 부리는 괴물을 상대로 단번에 정신력이 박살 난 것이 너무 컸다.

    “일단 눕혀 놓으세요.”

    “예.”

    산박은 그렇게 명령하고 괴물의 두개골을 회수했다. 분명 부산물이었고, 거기에 제법 비싼 놈으로 보였다. ‘화염’과 관련된 주술 아이템이 분명했다.

    ‘대자연의 주술은 화염 재료가 적다. 이건 못해도 5만 원 이상이다.’

    두당 한 개씩 가져간다면 이번 던전에서의 수익이 단번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보스 몬스터 또한 강인해질 게 분명했다.

    ‘수륵까지 망가져 버렸고, 여기서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좋은데…….’

    다른 이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 산박은 수를 헤아렸다.

    ‘수륵은 당연히 찬성할 테고, 시은도 마찬가지다.’

    강합은 반대하겠지만 다수결로 밀어붙이면 그만이었다. 이후에 강합이 팀에 계속 남을지는 모르겠지만 산박은 사는 게 돈보다 더 중요했다.

    ‘이번 공략 뒤에 다시 한번 판단해야겠지.’

    그를 잡아 두려면 산박이 지닌 돈을 지급하면 될 일이었다. 사람은 돈으로 부릴 수 있다. 산박에겐 작은 돈줄이 하나 있었다. 다른 던전 사용자와는 다르게 여유로웠다.

    ‘강합이 그럴 가치가 있다는 것에는 회의적이지만.’

    어찌 되었건 산박은 그대로 보스를 잡으러 가자고 말하려고 했다. 그때 대장삵이 먼저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원시 주술이다. 저급하고 저열한 것들이 맹신하는 주술 체계다. 너도 알고 있을 터다. 드루이드라면…….”

    “아!”

    산박은 무릎을 쳤다. 그리고 저주받았으며, 죽어서 시체로 나자빠진 고대 존재의 이름을 읊었다.

    “레우치터(Leuchter).”

    “많은 원시 종족들이 사용하는 주술 체계지.”

    “하지만 그건 어둠과 저주의 주술인데……? 피와 연관되지 않아.”

    “피 또한 어둠이지. 누가 그것을 빛이라고 말할까. 물론 효율이 나빠서 결코 레우치터를 불러내지 못하겠지만.”

    산박은 대장삵과 대화를 나누며 주술이라는 힘의 체계를 욕했다. 이리 붙여도 말이 되고 저리 붙여도 말이 되는 거지같이 모호한 것이 주술이었다.

    개같은 것은 ‘별빛탄 주문’ 또한 주술이라는 점이었다. ‘동물 변신 주문’도 주술이었다. 사람이 작은 호랑이가 되다니, 미친 소리나 다름없는 걸 실현해 주는 게 주술이었다.

    “무슨 이야기예요? 보스 몬스터가 레우치터라는 놈인가요?”

    대장삵이 헛웃음 소리를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멍청한 암컷 인간!”

    “여자라고 해줄래?”

    시은이 대장삵을 껴안으려고 했지만 삵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기민하게 몸을 좌우로 비틀더니 산박의 다리에 몸을 비비며 뒤로 갔다.

    “둘 다 그만해요. 뭐 하는 짓이에요?”

    산박의 타박에 둘이 조용해졌다. 산박은 주변인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보스 몬스터는 지네가 될 공산이 컸다.

    “너무 추측인데…….”

    “확실합니다. 벌레는 질색이니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떻습니까. 수륵 씨도 멘탈이 많이 안 좋고…….”

    산박이 구구절절 말하는데 강합이 손사래를 치며 단박에 대답했다.

    “그렇게 합시다. 저도 첫술에 배부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수륵 씨가 불만 봐도 기절하는데 뭘 어떻게 더 진행하겠습니까?”

    일찍 끊어 버리는 게 좋았다. 수륵의 무너진 모습은 강합의 마음을 크게 흔든 지 오래였다. 일행은 만장일치로 보스를 노리기로 했다. 물론 여전히 남은 문제는 수륵이었다.

    “싸울 수 있겠습니까?”

    “예.”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수륵은 알코올 중독 환자처럼 손을 덜덜 떨었다. 그는 더는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무기 휘두르다가 자기 무기에 죽을지도 모르겠네.’

    그저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것과 백병전을 하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냉병기의 싸움이다. 무너진 상태에서는 형편없이 죽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수륵은 담담했다. 오히려 바로 귀환한다는 말에 전의가 타오르는 듯했다.

    ‘싸울 수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버텨줄 수는 있겠지.’

    방패 하나 정도는 우직하게 들 수 있을 터였다. 보스 지네가 화염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하루를 쉬고, 제힘을 모두 회복하고 갑시다.”

    그들은 무너진 천장이 있는 곳에서 그대로 하루를 보냈다. 수륵은 한숨을 자지 못했고, 다른 이들은 잘만 잤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수륵의 두 눈이 서서히 감겼다. 이내 그도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는 화염이 자신을 덮치는 꿈을 꾸었다.

    “흐아아아아악!”

    지나치게 현실적인 비명 소리가 수륵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모두 깜짝 놀라서 잠이 다 깨버렸다. 그 뒤로 수륵은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출발 전에 산박은 수륵을 달랬다.

    “무리해서 공격할 생각 마세요. 방패로 최대한 적의 공격을 막기만 하면 돼요. 어차피 지네잖아요? 커봤자 얼마나 크겠습니까.”

    “예.”

    수륵이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산박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이상한 짓만 하지 않았으면 했다.

    또한 산박은 시은에게서 모든 화염 물약을 받았다.

    “강합 씨는 하나 가지고 계시죠?”

    “예.”

    “다행이네요.”

    “그 괴물 놈들이 약해서 화염 물약을 안 쓴 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천장이 무너졌을 때는 생각이 안 닿았고요.”

    화염 물약을 모두 하나씩 챙겼다. 오직 시은만 두 병을 가지고 있었다.

    “전 왜 안 주십니까?”

    “손 떠는 거 다 압니다. 그리고 화염 보면 기절까지 하시잖습니까? 예?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닙니다…….”

    산박의 단호한 말에 수륵이 고개를 숙였다. 코를 훔치는 소리에 산박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서둘러 그를 달랬다.

    “수륵 씨가 적을 한 번 막으시면 화염 물약을 던질 테니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기절해도 못 도와드려요. 살아서 돌아가셔야죠, 살아서.”

    “예.”

    “살아서 돌아가면 뭐든지 다시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안 그래요?”

    산박이 다른 이들을 쳐다보며 말하자 그들 또한 크게 호응해 주었다.

    “힘내요. 보스 바로 잡으러 가면 이 던전도 끝이에요.”

    “훈련을 생각해. 그거랑 똑같아.”

    그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갈림길까지 그 어떤 적과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체력이 빠르게 소모되는 걸 느꼈다. 바로 피와 흙이 뒤섞인 진창 때문이었다.

    “웃……!”

    위로 올라가는 통로의 경사도는 낮았지만 미끌거리는 진창 때문에 다리에 힘을 많이 줄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다리 힘을 빼면 주르륵 미끄러졌다.

    ‘코가 마비되었다.’

    피의 자극적인 냄새에 코가 마비되기도 했다. 그게 전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였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서 검집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갔다. 다리가 세 개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한결 수월했다.

    피로 점철된 길에서도 퇴화동굴인을 만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마 곳곳에 퍼져서 할 일을 하고 있을 터였다. 나약한 그들의 종족값에 현혹된다면 나중에 보스를 감당키 힘들 것이 분명했다. 산박의 팀은 수륵 덕분에 보스를 굉장히 빨리 잡게 되었다.

    오르막길의 끝을 벗어나자 깊은 어둠이 가득한 거대한 동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고, 강합의 창에 묶은 횃불만이 주변을 일부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긴장 늦추지 마세요.”

    산박은 그렇게 말하면서 사위를 살폈다.

    ‘어딨지?’

    “삭아, 뭐 맡아지는 거라도 있냐?”

    “킁킁. 없다. 이런 곳에서 사는 놈이라면 어차피 피에 물들어서 체취가 지워졌을 거다.”

    산박의 팀은 벽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원형으로 된 동공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보스는 보이지 않았다.

    ‘젠장. 최소한의 피를 흘려야지 나타나는 식인가?’

    막 그런 생각이 들며 주저함이 일어났다.

    “잠깐만요.”

    산박이 이목을 딱 모으고 팀원들의 시선이 산박에게 향했을 때, 사냥꾼을 노리는 사냥감이 이빨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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