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70)
  • 17화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큼 피가 거꾸로 솟아서 벽을 타고 천장에 스며드는 것은 기괴한 광경이었다. 생각만 해도 무서웠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기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일행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자리를 옮긴 산박의 팀은 휴식하고 나서야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뭐였을까요?”

    “주술처럼 보이는데, 너무 야만적이고… 잔인해 보였어요.”

    드루이드의 직업을 획득하면서 기본적인 초월의 힘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된 산박이 근본적인 것을 이야기했다. 전사 직업을 지닌 두 사람이 잘 모를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모르기 때문에 더욱 무서워했던 게 그들이었다. ‘주술’이라는 형태를 지닌 것에 그들은 되레 안도했다. 그들에게는 산박의 술법이나 이 잔혹한 주술이나 결국 같은 것이었다.

    “주술이라면 해제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예? 맞죠? 확실하죠? 안 그래요? 다들?”

    “그렇겠죠. 그래야죠. 위험한 주술 같은데, 저주라도 걸린 채로 나가면 돈이 얼마나 드는데요. 팀장님이 할 수 있으시겠죠.”

    단어로 특정할 수 있으면 인간은 냉정한 ‘척’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말에 산박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기술과 주문이 없어서였다. 이에 대한 답은 대장삵이 해줬다.

    “간단한 것이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이번 건 좋지 않아.”

    “왜?”

    짐승의 말에 산박이 거칠게 찔러 넣듯이 물어보았지만 대장삵은 새초롬하게 고개를 홱 돌릴 뿐이었다. 시건방지고 예절을 지키지 않는 인간 따위에게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태도였다.

    ‘이 새끼가…….’

    팀장인 산박이 대장삵에게 대놓고 무시당하자 팀원들은 괜히 눈을 돌렸다. 산박은 언제 한번 대장삵의 기강을 잡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현재로서는 불가능했다.

    이내, 해답은 산박이 말했다. 굳이 대장삵의 지식이 아니더라도 그 또한 드루이드였다.

    “일단 규모가 큽니다. 여기까지 내려오면서 주술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없죠?”

    “예.”

    시은이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산박은 냉큼 받았다. 이래야 지긋지긋한 이론을 말해도 재미가 난다.

    “주술사나 주술의 매개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곧 멀리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보통 일이 아니죠.”

    “그럼 1레벨 던전 사용자 수준으로는 저주 해제를 못 하신다는……?”

    “던전 자체의 속성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던전은 ‘특수 던전’입니다. 1레벨 던전에 대한 기본 정보를 돈 주고 모두 구매해서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 저라도 이런 특수 던전에 대한 건 못 알아요. 비싸니까.”

    목숨과 관련된 것이기에 값이 비쌀 수밖에 없었고, 특수 던전은 희소한 이들만 겪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겪은 자 중에서도 소수의 팀만 살아남는다. 그 목숨값을 싸게 판매하는 자는 드물었다. 싸게 팔고 싶어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기 때문에 어떻게든 가치를 높이고 싶어 할 터였다. 그 가치가 높은 만큼 자신의 권위도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이 잔혹한 피의 주술이 던전의 특성이라면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피를 내면 안 된다는 건가요?”

    뜻밖에 시은이 가장 먼저 물었다. 기초 연금술이라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연금술 지식’을 통해서 짐작한 것이었다.

    “예.”

    산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인 시은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서였다. 그 말에 다른 팀원들이 혀를 찼다.

    “제기랄, 어떻게 안 죽입니까.”

    “보스가 어딨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피와 연관성이 있던 갈림길.”

    산박이 검지를 들어 올려 천장을 가리켰다.

    “상층으로 향하는 길. 거기서 피 냄새가 진하게 났잖아요.”

    “거기가 보스가 있는 곳…….”

    산박이 수륵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여 호응해 주며 손을 휘적거렸다.

    “지금 휴식도 딱 취했고, 바로 가서 보스를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부산물을 많이 취득을 못 했지 않습니까.”

    장창을 쥔 강합이 산박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그들은 고작 배낭 두 개에 던전 광석을 채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팀의 인원수는 네 명에 달했다. 1인당 배낭 한 개도 못 가져갔다. 당연히 수익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 광경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시은이 반박했다. 하지만 수륵은 탐욕에 물든 표정을 지으며 강합을 도왔다.

    “조금만 더 가져가자는 겁니다. 거기에 안 싸우고 그냥 채굴하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 보면 놈들이 쓰던 곡괭이도 있습니다.”

    산박은 고민했다. 판단은 바로 섰지만 바로 자기 생각을 말하면 성의가 없어 보일 수 있었다. 자신들의 의견을 하찮게 여긴다는 반발을 살 수 있었다. 남의 눈치를 먹고 살고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휘어잡았던 신부님을 보고 자랐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고 가치관이었다.

    “보스의 전력이 피를 많이 마실수록 강해진다고 추론할 수 있지만, 추측뿐이지 않습니까.”

    “가장 일반적인 패턴이니까요.”

    수륵과 시은이 논쟁을 벌였다. 그곳에 수륵 또한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지는 않고 질문을 할 뿐이었다.

    “수륵 씨, 당신이 전열에 서니까 당신이 보스를 상대로 가장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예. 어차피 같이 싸울 거 아닙니까. 그리고 배낭을 조금만 더 채우겠다는 거고, 채광해서 최대한 피를 안 흘리는 방향으로……. 예.”

    산박이 시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단호했다.

    “리스크를 굳이 크게 할 필요가 있나요? 던전 하나 공치는 거랑 죽는 거, 뭐가 더 아쉽겠어요? 거기에 여긴 ‘특수 던전’이에요. 실패율이 가장 높은 종류의 던전이라고요.”

    산박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하고 이목을 집중시켰다.

    “강합 씨, 하고 싶은 말 있습니까.”

    “전… 아무리 생각해도 최소한의 이익은 얻고 가고 싶습니다.”

    1레벨 던전 사용자는 생계를 위해서 칼 밥을 먹는다. 이곳에서 벌써 1박 2일을 한 상태였는데 큰 수익을 못 얻으면 그만큼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0레벨 던전을 솔플로 돌며 손해를 메꾸려 해도 산박처럼 자주 못 가는 게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거기에 당일치기가 가능한 0레벨 던전과는 다르게 1레벨 던전은 기본적으로 던전에서 하루는 보내야 했다. 거기서 오는 피로감은 비교할 수 없었다. 출퇴근하는 군인과 그러지 못하는 군인처럼 큰 차이였다.

    “흠…….”

    산박이 손가락을 두드렸다.

    “곡괭이를 챙기세요. 여기서부터 파고 들어가서 입구를 최대한 은폐시키고 작업하죠.”

    두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지만 시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은 ‘피를 최대한 안 보면서 채광하는 것’으로 활동 방침을 정했다. 최대한 빠르게 굴을 파서 일단 이 통로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했다.

    푸욱! 푸우우욱!

    다행이었던 점은 이곳의 흙은 쉽게 무너진다는 점이었다. 퇴화동굴인들의 육체 내구력을 생각한다면 당연했다. 그들도 굴을 팔 수 있을 정도니 인간들이 파기에는 더없이 수월한 지질학적 구조였다.

    하지만 발열 광석에서 나오는 열기가 가장 큰 단점이었다. 가지고 온 보급품 중에는 물도 많이 있었지만 고된 노동과 겹친다는 게 문제였다.

    “교대요!”

    “예. 헉헉.”

    “후우! 벌컥, 벌컥!”

    노동 로테이션은 간단했다. 두 명씩 교대를 했다. 여자라고 봐주는 것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1레벨 던전에 들어올 수 있는 인원수가 너무 적었다. 최대 여섯 명이었고, 사실상 그렇게 가면 수익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가는 이들도 없었다. 1레벨 던전의 수익은 평균 10만 원 선이었다. 0레벨 던전의 두 배에서 세 배에 달하는 수익이었다. 하지만 인원수가 높아지면 그게 개박살이 나기 마련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돈 없는 게 죽는 것보다 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산박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산박은 먹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백정 노릇을 했다. 그렇기에 수익에서 멀어질 수 없었다.

    ‘계획도 나쁘지 않다.’

    채광만 하고 체력을 회복하고 위로 향하면 될 일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다섯 시간을 땅을 파면서 많은 양의 던전 광물을 획득했고 배낭 네 개를 가득 채웠다. 그렇게 해서 총 여섯 개의 부산물 배낭을 한곳에 쟁여둘 수 있었다. 던전을 공략한다면 함께 귀환하게 될 터였다.

    “이제 쉬죠.”

    “조금 더 하는 게…….”

    수륵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산박의 표정이 굳어지자 그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눈을 깔았다.

    “삭아, 뭐 시원한 물 못 내보내냐?”

    대장삵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주문을 읊었다.

    “겨울 물안개.”

    동굴 안이 습기가 가득한 곳에 에어컨을 튼 것처럼 변했다. 모두 깊게 냉기를 받아들이며 좋아했다. 표정이 확 살아났다.

    그들이 막 휴식을 취하려던 차에 갑자기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 속으로 대장삵이 벼락처럼 달려들며 소리를 질렀다.

    “기습이다!”

    “꾸애애애애애애애!!”

    대장삵이 흙먼지를 꿰뚫고 파악할 수 없는 놈의 신체 부분 하나를 얕게 뜯고 물러났다. 대장삵이 있던 곳으로 놈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휘둘러졌다. 피 맛을 본 대장삵은 혀를 날름거렸다.

    그사이에 다른 이들은 벌떡 일어나 전투를 준비했다. 수륵이 방패를 들려고 했지만 재수 없게 그가 가장 먼저 표적이 되었다. 이글거리는 화염구가 그의 몸에 직격했다. 방패로 막았지만 날아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수륵은 붕 떠서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걱.”

    크게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입에서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수륵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끔찍한 고통 때문에 눈도 못 뜨고 질끈 감은 채 고통 속에서 바르르 떨었다.

    ‘……!’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몸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뭔가가 자신을 꽉 쥐고 압박하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악!”

    이글거리는 화염이 그가 입은 강철 갑옷을 뜨겁게 만들었고 그 열이 피부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갑옷에 들러붙은 주술 불꽃은 사그라들 생각이 없었다. 가만히 두면 끔찍한 화상을 입고 쇼크사할 수 있었다.

    촤아악!

    아슬아슬한 순간에 적을 한 번 물고 물러난 대장삵이 사위를 살피다가 수륵의 가슴이 불타는 걸 보고 냉큼 달려와 물의 마법을 사용했다. 불은 싹 사그라들었다.

    “킁킁.”

    냄새를 맡은 캡틴 레오파드 캣은 살이 타는 냄새는 나지 않는 걸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삵의 눈동자에 천장을 무너뜨리며 나타난 적수가 보였다.

    그것은 단 한 마리였다. 척추가 기괴하게 튀어나오고 자라나 있어서 돌연변이처럼 보였다. 마치 암 덩어리에서 세포 재생이 괴상하게 변질된 것처럼 척추뼈와 살덩이가 등에서 튀어나와 가득 자라나 있었다. 기괴하게 변형 재생된 척추 덩어리에는 붉은빛이 그득했다.

    목은 아래로 푹 꺾여서 다시 길쭉하게 나와 있었다. 목의 시작 부분은 다른 놈들과 같았지만 푹 꺾여 쭉 늘어나 있어서 마치 가슴에서 튀어나온 목 같았다.

    ‘결코 평범한 놈이 아니다.’

    주술을 사용하는 것부터가 다른 퇴화동굴인과 차별화된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꾸롸딱!”

    놈의 몸통에는 팔다리가 각각 네 개씩 들러붙어 있었고 팔과 다리마다 오돌토돌한 돌기가 돋아나 있었다. 어떤 부분에는 마치 손이나 발 같은 것이 크게 자라나 있기도 했다. 발목 하나에서는 피를 흘리고 있었고, 균형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대장삵에게 당한 부분이었다. 떨어지는 상태라 대장삵의 기민한 대처에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쐐액! 텅!

    시은의 석궁이 발사되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방어 막에 틀어박혀서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바아앙어 막이다!!”

    산박이 고함을 지르며 별빛탄을 발사했다. 동물로 변해서 접근전을 하기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수륵이 화염구에 직격당하자마자 리타이어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욱한 흙먼지 때문에 시야가 크게 제한된 점도 그를 두렵게 했다.

    텅!

    하지만 별빛탄은 석궁의 볼트보다 형편없는 타격력을 지니고 있었다. 산박은 별빛탄 주문의 나약함에 욕지거리를 뱉으며 작은 호랑이로 변해서 그대로 내달렸다.

    그에 맞춰서 대장삵이 주술동굴괴물의 가까이에서 포착되었다. 흙먼지 속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대장삵을 보자마자 산박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커허헝!”

    작은 호랑이가 거칠게 포효하자마자 주술동굴괴물의 목이 홱 돌아갔다. 그만큼 호랑이 소리는 생명체에게 본능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푸화학!

    주술동굴괴물의 입에서 주술 화염구가 토해졌다. 미리 준비하고 도망칠 생각으로 가득 찼던 산박은 냉큼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사이에 강합이 괴성을 지르며 옆을 쳤다. 그는 산박이 대장삵이 아니라 자신에게 기회를 줬다고 여기고 있었다.

    “끼에에에!”

    장창에 옆구리가 그대로 찔렸다. 강합은 괴물에게 장창을 찔러 놓고는 그대로 몸을 굴렸다. 그가 있던 곳을 긴 팔이 할퀴고 지나갔다. 강합은 낙법을 하면서 허리춤에서 부무장인 환도를 뽑아 들었다.

    옆구리를 장창으로 찔린 상대의 신경이 덩치가 큰 강합에게 돌아갔다. 그사이에 대장삵은 괴물의 등을 타고 올라가서 뚝 떨어지며 목을 크게 할퀴고 다시 쭉 내려가서 사타구니 밑으로 쏙 빠져나갔다.

    “크아아아악!”

    놈이 괴성을 지르며 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망칠 것이 뻔했기에 작은 호랑이가 된 산박이 동물적인 감각으로 벽을 두두둑 올라가서 그대로 놈의 허벅지를 물고 늘어졌다. 다리가 대롱대롱 허공에 걸렸고, 놈은 산박의 체중을 못 이기고 그대로 추락했다. 그걸 본 시은이 석궁을 던져버린 후 허리춤에서 환도를 뽑아 들고 달려가며 소리쳤다.

    “조져어어엇!”

    달리다가 천장이 무너져 내려서 생긴 울퉁불퉁한 지형 탓에 시은이 그대로 엎어지면서 환도가 땅에 부딪혔다. 입에서 뭔가 통증이 느껴졌지만 시은은 서둘러 일어나서 괴물의 팔을 향해 환도를 내려쳤다.

    “끼이에에에!”

    주술동굴괴물이 고통스럽게 괴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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