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무슨 던전인지 아시는 분? 특별 던전이긴 한 것 같은데.”
일반적인 던전과는 구성 자체가 달랐다. 대부분이 고개를 저었다. 돈이 있으면 이렇게 던전 사용자가 되지 않았고, 돈이 있어도 현실에서 살기 바빴다. 산박이 시은에게 턱짓했다.
“시은 씨는 그래도 물약 팔아서 정보 살 돈 있잖아요.”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기본적인 건 알죠. 근데, 이런 특별한 곳에 대한 정보가 좀 비싸요? 그리고 전 여자잖아요.”
“여기서 여자가 왜 나와요?”
“가방이랑 옷이랑 이번에 일릭스트리 계절상품으로 반지가…….”
산박은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어이고, 맙소사. 나라도 돈을 썼어야 했다.’
물약을 팔아서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돈을 수급할 수 있었던 게 산박이었다. 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너무 미래만 봤다.
물론 아무런 준비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의 돈을 사용해서 일반적인 1레벨 던전에서 나오는 값싼 정보는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지형부터 벽과 천장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거기에 미약한 빛을 내는 던전 식물도 없는 던전이라니.’
심상치 않았다. 깊은 어둠 속에서 횃불의 불빛만이 위태롭게 주변을 밝혔고, 그 음울한 빛에 굴곡진 던전의 통로 군데군데 그림자가 드리워진 구멍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일단은 계속 가보죠.”
“잠깐. 내가 앞서 나가서 동태를 살피겠다.”
산박의 말에 대장삵이 다리를 걸며 나섰다. 대장삵은 매우 자신만만했는데, 짐승의 감각으로 어둠 속에서도 잘 다닐 수 있어 보여서 믿음이 갔다.
“그래. 그래라.”
산박은 쉽게 대장삵을 척후로 배정했다. 대장삵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사라졌다. 던전은 외길이라서 부담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게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조심!”
키가 커서 넓은 시야를 지닌 강합에게는 보이지만 키가 작은 수륵에게는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이 바닥에 뚫려 있었다. 조금만 근처를 밟아도 흙이 무너져 내리며 아래로 향하는 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횃불로 구멍을 이리저리 확인해본 수륵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려면 기어가야 하는데, 적이라도 만났다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수륵은 말을 확실하게 끝맺지 못했다. 그만큼 기어서 간다는 건 인간에게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하라고 하면 하지 않을 인간이 100명 중 90명은 넘을 터였다.
“무리하게 들어갈 필요 없습니다.”
산박 또한 똑같은 생각이었다.
밑으로 훅 꺼지는 구멍이 있다는 건 심리적으로 너무 큰 타격이었다. 시야가 자꾸 땅으로 가고, 더 많은 곳을 봐야 했다. 작은 구멍에도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야.”
“헉.”
가장 선두에 있던 수륵이 헛바람 소리를 집어삼켰다. 그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대장삵이 그의 얼굴을 보더니 비웃었다.
“전투 한번 하지 않았는데도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네.”
“오랜만에 던전에 와서…….”
“흥.”
고개를 높이 들어 올리며 대장삵이 그를 무시했다. 한낱 짐승 따위에게 무시당했지만 수륵은 화도 내지 않았다. 그럴 기력이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였다.
“조금 쉬죠.”
항상 앞만 보고 갔기 때문에 이제야 수륵의 상태를 확인한 산박이 휴식하며 대장삵이 가져온 정보를 들었다.
“10분? 20분? 그 정도 가면 딴 길로 새는 길이 나온다. 거기, 놈들이 있다.”
“놈들?”
“나도 윤곽밖에 못 봐서 잘은 몰라. 하지만 덩치는 인간 남자보다 작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 자신들보다 체급이 크다면 전투 시작 전부터 전열이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단 크고 봐야 했다.
“몇 마리던?”
“다섯 마리.”
“…….”
모두 말을 아꼈다. 너무 숫자가 많아서였다. 자신들과 똑같았다. 거기에 이쪽은 한 마리가 동물이었다.
“평범하게 싸우면 안 되겠는데.”
피해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놈들이 뭘 하고 있었지?”
“벌레 소리가 많이 났어. 벌레 농장을 관리하고 있는 것 같던데.”
“괴물 놈들. 인간 흉내 내기는.”
수륵이 땀을 닦으며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 노골적인 적의와 분노는 때때로 독이 될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만큼은 용서가 되었다.
“놈들을 덮치거나 유인했으면 좋겠는데 그들 특징을 모르니…….”
산박이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둔해 보이던데. 후각은 좋은 것 같지만 다른 건 뒤떨어져 보였어.”
“그렇다면 유인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오래 대기한 만큼 우리들의 냄새가 가득 퍼질 테니까.”
“빠르게 접근해서 쳐야 합니다.”
수륵과 산박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기습’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한번 방침이 정해지자 전술이 빠르게 세워졌다.
“저랑 삵이 돌진해서 깊이 들어갔다가 휘젓고 바로 왼쪽으로 빠지면 여러분이 정면에서 싸우기 시작하세요. 그럼 다시 맞받아치겠죠. 그때 제가 별빛탄으로 타격하고 대장삵과 함께 옆을 칠게요.”
휘젓고 빠짐으로써 상대는 허둥지둥할 것이 분명했다. 그 상태에서 정면에서 부딪치면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왼쪽에서 합공을 넣는다면, 도미노처럼 삽시간에 무너질 것이었다.
숫자로 승패가 갈리는 게임과는 달랐다. 한번 삐끗하면 압도적인 전력 차로 승부가 날 수 있는 게 현실의 싸움이었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쪽이 더 덩치가 컸기 때문이었다. 거침없이 한번 붙을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강합 씨한테 화염 물약 하나 드리고요.”
“네.”
시은이 물약을 강합에게 건네줬다. 산박은 주의를 단단히 주었다.
“수륵 씨한테 불꽃 안 튀게 조심하세요. 정말 위험한 겁니다.”
“예.”
모두 긴장한 채로 대장삵이 말한 곳에 도착했다. 갈림길에서 산박은 작은 호랑이로 변해 대장삵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숫자 10을 세고, 뒤에 있는 이들도 따라갔다.
‘생각보다 통로가 구불구불하다.’
세 걸음 걸으면 꺾어야 했다. 왜 이런 구조를 지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곳에 사는 놈들이 아니었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종족 자체가 달랐다.
‘억.’
수륵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른 이들도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바닥을 본 수륵은 푹 꺼진 땅 부분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게?’
“왜 놀라요?”
“아니, 땅이 여기만 움푹 들어가 있어서요. 왜 이렇게 돼있지.”
답은 그 누구도 몰랐다. 횃불에 의지한 채 천천히 가며 그들은 귀를 바짝 기울여 신호를 기다렸다.
그사이에 산박은 작은 호랑이로 변한 채 어둠 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대장삵의 설명대로 놈들은 뭔가를 하기 바빴다.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능숙하게 뭔가를 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산박과 대장삵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작업에 매우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커허허헝!”
산박은 조심스럽게 놈들에게 다가가서 그대로 포효하며 한 놈을 뒤에서 덮쳤다.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엎어진 괴물은 산박에게 목이 물어뜯기고 사지를 허우적거렸다.
콰뜨득!
이빨이 목뼈에 박혔다. 머리를 털면서 확실하게 이빨에 뼈가 끼워지는 듯한 감각이 들자마자 산박은 강하게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아래로 확 내렸다.
우득!
단번에 흉측한 소리가 났고, 바들바들 떠는 사냥감의 움직임이 발을 타고 느껴졌다.
“키아아악! 끼이, 끼이이!”
쇳소리를 내며 괴물 한 마리가 발악했다. 대장삵이 괴물의 목을 문 채로 허공에서 덜렁거리고 있었고, 괴물이 발악할수록 그의 움직임은 더욱 커졌다. 이내 괴물의 살점을 크게 도려내고 떨어져 나간 대장삵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발로 땅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크윽. 케윽. 구릅.”
목이 물어뜯긴 괴물이 어둠 속에서 죽는 소리를 냈다. 나머지 세 마리는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바빴다. 산박은 한 놈을 더 물어뜯어 죽이고 도망치는 놈의 다리를 물어서 구멍에서 끌어냈다.
“히아아악! 끼아아아악!”
버둥거리던 놈은 결국 산박에게 물어뜯겨 죽었다. 반면 대장삵은 다른 한 놈을 놓치고 말았다. 체중이 낮은 삵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한 마리를 놓치고 목이 물어뜯긴 놈을 마무리하자 뒤에서 횃불 빛이 나타나며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아아아!”
수륵이 횃불을 묶은 방패를 좌우로 흔들며 발악을 하듯 달려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끝났어요. 기습하니까 바로 도망치려고 하더라구요.”
산박이 인간으로 돌아와 그들에게 말했다.
“괴물답지 않게 도망이라니.”
“허, 참.”
조금 합이 안 맞았지만, 이건 대장삵의 정보 탓이기도 했다. 통로의 길이가 말했던 것과 달랐다.
화륵.
횃불이 괴물들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끌어냈다. 괴물의 눈동자는 썩은 생선 눈깔처럼 새하얗거나 회백색으로 탁하고 고름이 주변에 가득했다. 피부 자체가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어서 물렀다. 산박에게 짓눌린 괴물은 그저 짓눌렀을 뿐인데도 피부가 물먹은 마분지마냥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있었고 살도 뜯겨 나가서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다. 그 흐른 피에 살덩이가 있을 정도로 형편없는 내구력을 지닌 몸이었다.
“그냥 밟았을 뿐인데도 피부랑 살이 짓이겨져서 떨어지다니.”
산박은 그 몸을 가까이서 확인하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보다 하찮은 괴물이었다. 특히 몸뚱어리는 뚱뚱한데 팔과 다리는 앙상하기 그지없었다. 털로 뒤덮여 있지도 않았고, 그 대신에 주름이 온몸에 존재했다. 주름 안쪽은 살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주름 속에서 땀이 계속 나다 보니 욕창이 자리 잡은 듯했다.
“이렇게 무른 놈도 뭔가 부산물이 있을 텐데.”
산박은 퇴화동굴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앙상한 팔다리는 당연히 제외였다. 쉽게 배를 갈라서 장기도 대충 끌어내 봤지만 확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이거, 이 심장. 그나마 튼튼해 보이는데, 뭔가 약효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척추지, 척추.”
봉수륵과 길강합은 앞다투어 그럴듯한 것을 이야기했다. 거기에 혹한 산박은 퇴화동굴인의 혀를 당겨서 횃불 빛에 잘 보이게 하며 말했다.
“혀 같은데. 가장 멀쩡하게 생겼잖아요.”
“스읍. 그건 좀.”
그렇게 돈 되는 게 뭘까 토의하는 것을 이시은은 가만히 보기만 했다. 흥미가 없어 보였다.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모르겠네요.”
퇴화동굴인을 해체하고 난 뒤 10분. 결국 산박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일행은 피 냄새가 가득한 주변을 수색했다. 벽과 천장에 구멍이 존재하는 건 똑같았다. 다만 이곳에는 썩은 나무가 대단히 많았다.
쩍!
썩은 나무를 뜯어내자 그곳에서 작은 지네들이 우글거리면서 퍼져 나갔다.
“어우씨!”
강합이 호들갑을 떨며 어깨를 들썩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손끝이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시은은 그 모습을 보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히죽 웃었다.
“벌레 농장이라더니 진짜네.”
강합은 썩은 나무를 갈라보고 나서야 대장삵의 말을 믿었다. 그 말에 대장삵은 으르렁거리며 강합을 위협했다.
“아까 말했잖아? 인간! 뭘 들은 거냐! 내 실력을 의심하는 것이냐!”
“아니…요?”
“흥. 반푼이가.”
“말을 뭐 그렇게…….”
강합이 산박에게 시선을 줬지만 산박은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상대하면 할수록 골치 아픈 게 대장삵이었다. 굽힐 줄 모르는 상삵. 그게 바로 캡틴 레오파드 캣이었다.
‘아!’
부산물에서 수확을 얻지 못하자 산박은 자신이 퇴화동굴인 한 마리를 놓쳤다는 걸 상기했다. 그걸 팀에게 말하자 팀은 모두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서둘러 지네 농장을 벗어났다.
갈림길에 다시 나온 팀은 그대로 이동했다. 곧 수많은 갈림길이 존재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하층으로 가는 길이 있는가 하면 네 갈래로 다시 길이 나뉘어 있어서 총 여섯 개의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 참…….’
팀은 고민에 빠졌다. 그사이에 대장삵이 통로마다 조금 들어가서 냄새를 맡았다.
“킁킁!”
“킁킁킁!”
여섯 개의 길의 냄새를 모두 맡은 대장삵이 자신이 맡은 정보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아래에서는 철과 돌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 위로는 피비린내가 심해. 나머지는 고만고만한데, 저 오른쪽 길은 괴물 놈들의 땀 냄새로 가득 차있다.”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오래 고민해 봤자 의미가 없었다.
“가장 위험해 보이는 위로 가는 건 젤 마지막에 하는 게 나을 것 같고.”
피 냄새는 곧 위험과 일맥상통했다.
퇴화동굴인의 땀 냄새가 진한 곳 또한 제외되었다. 그들의 문화를 보고 체험하고 싶다면 꼭 가야 할 것 같지만 그들은 여행객이 아니라 던전 사용자들이었고 던전 공략을 목적으로 두고 있었다.
‘하층은 특수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어떻게 될지 모른다.’
산박은 무난한 곳을 과감하게 제외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아래로 갑시다. 다른 의견 있습니까?”
그 말에 수륵이 손을 들어 올렸다.
“무난하게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한 길 중에서 하나 선택해서 가죠?”
거침없이 자신의 주관을 말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팀장의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못 얻을 무난한 길보다는 확실한 거 하나 잡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건 모르죠.”
수륵이 거침없이 대꾸했다. 이에 산박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수결로 하죠. 내려갈 사람?”
“전 팀장님 말씀대로 내려가는 데 한 표.”
시은이 바로 선수를 쳤다. 물어보자마자 즉답한 것은 큰 임팩트를 주었다. 순식간에 대세가 기울었고, 어쩔 수 없이 수륵도 수긍했다.
“팀장님 말씀대로 내려가죠.”
“예. 앞장서 주세요, 수륵 씨.”
“옙. 맡겨만 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