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70)
  • 12화

    “사전에 이야기는 다 하고 온 거겠지?”

    “그럼요.”

    “이리 중요한 날에 왜 던전 사용자는 안 오고?”

    박조조는 그 어떤 망설임도 보여주지 않았다. 속사포처럼 산박을 괴짜로 치부했다. 물론 그 밑에 진실을 깔았다.

    “돈에 미친 양반이라, 1레벨이 되면서 가진 힘으로는 이 치료수를 만들고 그다음에는 0레벨 던전을 공략하고 있어서요. 이 양반 이거 아주 큰일 날 양반인 것이, 상품 등록 하는 데에도 날 대리인으로 쓰려고 했다니까요? 귀찮은 걸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허. 던전 사용자가 하나같이 특이한 놈들이라곤 해도 그런 경우는 또 처음 보네.”

    진짜로 모든 걸 대충 맡기려고 쓱 한번 제안했던 산박이었다. 박조조는 이를 크게 부풀려서 입에 올렸다. 진실을 양분 삼아서 커진 거짓이었기에 정말 그럴듯했다.

    “그냥 던져주면 끝나는 줄 안다니까요? 상품 등록도 안 한 걸 저한테 주면서 팔아라!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데 뭘 더 말하겠습니까?”

    그 말에 양 부장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남이 하는 바보짓을 가장 재미나게 여기는 자가 양귀문이었다. 게임을 한다면 항상 대리를 불러서 함께 파티를 짜고 일부러 티어를 낮춰서 양학을 하는 취향이었다. 인간쓰레기 중에서 개말종이라고 말해도 부족한 쌍놈 중의 쌍놈이었다.

    물론 나쁘다고 해서 돈을 못 버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대전에서는 알아주는 상인 공회의 일원이었으며, 대전 양씨 가문에 속한 자이기도 했다.

    “바로 계약하지. 하지만 당사자는 꼭 데려와 줬으면 하네.”

    양귀문 또한 일을 허투루 하지 않았다. 대충 돈만 주고 물건을 주고받는 건 예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하나부터 열까지 문서고, 계약이었다.

    박리다매는 옛날 말이었다. 요즘은 박리다매에 장기 계약까지 묶는다. 예전에는 오로지 양만으로 대결했다면 이제는 미래까지 싸잡아서 잡아채 가는 게 참기업이었다.

    “예. 저도 확답을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저 중매쟁이 노릇을 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자리는 그것으로 끝났다. 어차피 비즈니스를 위한 만남이었다. 뒷돈이 필요하면 2차를 갔겠지만, 양귀문은 굳이 그렇게 뒷돈을 탐할 위치는 아니었다.

    * * *

    일주일이나 뜸을 들인 박조조는 산박과 만남을 가졌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니까요.”

    뜸을 들이고 용무를 말하지 않는 박조조는 천생 입으로 먹고사는 자였다.

    “그게 뭔데 던전도 못 가게 했어요?”

    하루 놀아봤자 돈도 못 벌고 산박이 지닌 꿈을 실현하는 데 걸리는 날만 더 길어질 뿐이었다. 그 때문에 산박은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박조조의 말을 들은 것은 그가 현재 수입의 큰 비중을 맡고 있어서였다.

    ‘치료수 때문이겠지. 그럴 수밖에 없어.’

    이런저런 걱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하루에 19만 원이라는 거금을 쥘 수 있다는 기대감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판했을 때나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4만 원에서 8만 원 정도밖에 들어오지 않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수익이 두 배 수준으로 오른 것은 분명했다. 일당 3~6만 원에서 9~15만 원이 된 것만으로 엄청난 일이었다. 0레벨 던전 사용자는 전투 피로도 때문에 일주일에 세 번만 던전에 가도 독종이었기에 실질 월급은 대단치 못했다.

    “수익이 그리 좋지 않은 거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예.”

    완판이 안 되는 상품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치료 물약 업종은 포화 상태나 다름없었는데, 물약을 만드는 사용자 중에는 전투력이 없어 2레벨로 가는 걸 포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1레벨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1레벨 던전에는 오직 1레벨 던전 사용자의 생산품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이상의 레벨을 지닌 사용자가 만든 것은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각 레벨의 던전은 단절된 시장을 지닌 것과 같았다.

    “회복 물약의 경우에는 생각보다 경쟁이 커서… 광고를 내지 않는 이상은 힘듭니다. 그게 아니라면 트럭 상인들을 포섭해서 시제품을 뿌려야 할지도 모르고요.”

    돈 벌고 싶으면 돈을 쓰라는 소리였다. 모순된 개소리에 혹할 산박이 아니었다. 박조조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떡밥을 깔고 있었다.

    “이 시장 바닥이라는 게 생각보다 독한 곳입니다. 요즘에는 실제 효력보다는 그냥 네임드, 이름값으로 팔립니다. 유명인이라든가…….”

    박조조는 주절주절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모두 1억을 벌기 위해서 3억을 쏟아부으라는 식의 개소리였다. 현재 투입할 자금력이 약한 산박은 선택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애초에 선택할 수 없는 걸 이야기했기에 산박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건 할 수가 없겠는데요. 돈 벌려고 파는 거지, 돈 쓰려고 파나요?”

    “그렇죠. 힘들죠. 그래서 제가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고 영업도 좀 하고 그랬더니 어제 연락이 왔는데…….”

    “무슨 연락요?”

    “던전 대전 상인 공회라고 아시나 모르겠네요.”

    “던전 사용자가 대전 상공도 모릅니까? 대전 양씨가 운영하는 곳 아닙니까.”

    “아~ 양 가문 아시는구나! 그럼 이야기가 좀 편하겠네요.”

    박조조가 명함을 하나 꺼냈다. 검은색에 상하좌우로 사방신(四方神)이 그려져 있었고 꼭짓점에는 금색으로 각진 문양이 있었다. 척 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던전 대전 상인 공회 소속의 부장 양귀문의 명함이었다.

    “저희 치료수에 빛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산박이 생산하는 물품이었지만 박조조는 이미 자신도 한 묶음으로 여기듯이 말했다.

    “그런데요.”

    “그 빛 무리를 쓰고 싶다고 합니다. 자기들 상품에 어울린다고 하더군요.”

    “얼마에 산다고 합니까?”

    산박의 말에 박조조가 인상을 콱 찡그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이 양반 이거 안 되겠네…….”

    “그놈의 양반 소리 제쳐두고, 왜요?”

    “제가 남한테 부탁해서 팔아도 두 병 팔기도 힘듭니다. 이대로라면 5천 원 선으로 떨이해서 팔아야 해요. 그런데 대전을 주름잡는 양 가문에 납품하면 그냥 시작부터 완판입니다, 완판! 그런데 뭔 가격 타령을 하세요?”

    “크흠……. 그건 그렇죠.”

    그제야 산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 상태를 생각하면 병당 2만 원, 아니, 만오천으로 내려서 팔아도 좋았다. 그만큼 수요는 중요했다. 팔리지 않는 상품 따위 아무리 비싸도 소용이 없었다. 돈으로 변해야지 쓸모가 있었다.

    “그러니까 무조건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트럭 상인인데요.”

    “아니……. 하, 참. 저 박조조 아닙니까. 뭔 트럭 상인 같은 소릴 하세요, 진짜…….”

    산박이 손사래를 쳤다. 이런 시답잖은 잡담은 빨리 넘어가고 싶었다. 물론 자신이 먼저 시작한 게 문제였지만 그걸 깨닫지는 못했다.

    “나 박조조가 그냥 오케이, 땡큐! 하면서 4달러에 악수했겠습니까? 어림도 없지!”

    “그래서 얼마를 불렀는데요?”

    “50만 원 달라고 했죠.”

    “와! 두 배!”

    “그리고 계약하고 싶답니다.”

    박조조가 단번에 진실을 말하며 확 치고 들어왔다. 그 말에 산박이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5, 50만 원? 하루에요?”

    “아, 그럼요. 근데, 그 50만 원… 전부 다 가지실 건 아니시죠? 제가 이렇게까지나 했는데요.”

    박조조의 말에 산박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얼마를 떼어줘야 하나?’

    “전 진실을 말했습니다, 태 사장님. 전 그냥 가계약하고 계속 납품하면서 들키기 전까지 팔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왜냐? 태 사장님의 인품을 믿고 있었고, 저희들의 인연! 이 인연이라는 게 어디까지나 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삼국지 아시죠? 거기서도 스타팅 멤버가 끝까지 가지 않습니까? 제가 뭐, 의형제를 하자는 건 아니고 서로 거래 관계에 있어서…….”

    박조조가 끝도 없이 주둥아리를 놀렸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이기도 했다.

    ‘이런 사람 찾기 드물지.’

    세상 풍파 겪다 보면 진실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건 죄다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거기에 돈이 걸려 있는데도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 물 덜 먹었거나, 고생하지 않은 애송이었다. 돈 무서운 줄 모른다는 뜻이었다.

    ‘이런 사람과는 계속 가야 한다.’

    박조조는 자신의 이득을 탐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인맥을 쌓는 걸 원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장기적 인맥이 산박에게는 절실했다. 특히 그의 꿈을 생각한다면, 상도덕 있는 상인이 꼭 필요했다.

    “50만 원 수익 중에서 20만 원 드리겠습니다.”

    “오케이! 땡큐!”

    박조조가 팔을 천장으로 쭉 뻗으며 외치고 손을 내려 산박과 악수했다. 그길로 산박은 트럭을 타고 대전으로 가야 했다.

    예의 주꾸미 한식집에서 양 부장과 산박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산박은 명함이 없었는데, 괜히 부끄러웠다.

    “차차, 만들면 되지, 태 사장!”

    양 부장은 그걸 보고 꼭 한마디를 해서 지랄을 떨었다. 남의 실수를 입에 담으면서 마음 음습한 곳에서 생기는 부정적 쾌락이 툭 튀어나왔다. 자신을 존경하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남을 짓눌러서 자신보다 못한 놈으로 만드는 게 양 부장이었다.

    계약서를 단숨에 쓰고, 곧바로 그간 팔지 못한 것들을 납품했다. 순식간에 산박의 손에 200만 원 돈이 떨어졌다. 양 부장은 손을 흔들며 검은 세단을 타고 음식점을 나갔다. 남은 건 반쯤 남은 소주 한 병과 주꾸미뿐이었다.

    “여기 음식 치워 주시고 새로 하나 주세요!”

    “예예!”

    판을 새로 깔고 반찬도 새로 나왔다. 서로 짠을 하고 산박은 곧바로 박조조에게 80만 원을 내주었다.

    “앞으로도 서로 잘해 봅시다. 제가 박 사장을 몰랐다면 어떻게 이런 큰돈을 얻었겠습니까? 3만 원 6만 원 이렇게 받았겠죠.”

    호칭도 단번에 사장님으로 올라갔다.

    “하하하!”

    소주를 딱 한 잔만 하고 술잔을 내려놓은 박조조는 사이다를 시켰고 산박은 소주를 3홉을 비워냈다. 기분 좋은 날이었기에 계산도 산박이 했다.

    산박은 사실상 박조조가 깐 판에 사인만 하고 큰돈을 받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증류수도 기계가 끓여서 만드는 것이기에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됐다. 치료수? 대장삵이 만드는 것이었다.

    ‘이래서 다들 레벨 업 하는 거지.’

    죽음을 무릅쓰고 던전으로 향하고 계속 달릴 수밖에 없었다. 스킬이 나쁘게 나온 이들은 결코 그 마약 같은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만큼 대장삵 소환은 뛰어난 주문이었고,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산박은 꼬박꼬박 저금하고, 생활했다. 꾸준히 드루이드의 기술과 주문을 연습하고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산박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시은의 꾸준한 연락만 있을 뿐이었다.

    ‘제기랄.’

    언제까지 0레벨 던전만 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격(格)의 성장을 원하고 있었다. ‘레벨 업 시스템’에서의 도약이 간절했다. 결국 돌고 돌아서 산박은 다시 팀을 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은을 계륵이라 생각했지만, 1레벨에서는 통한다.’

    함께 던전을 한 번 공략했기 때문에 시은에 대한 판단도 내릴 수 있었다.

    산박은 이번엔 간단한 어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이트에서 돈을 주고 게시판을 얻어 팀 모집 글을 내걸었다. 일종의 프리미엄이었다.

    첫 번째 공략을 했다는 것도 어필했다. 물론 사람을 죽였다는 소리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충 말을 꾸며서 다른 좋은 곳으로 옮겨 갔다고 적었다.

    연락은 금방 왔다. 무자본으로 사람을 찾거나 팀에 들어가는 것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돈 쓰는구나.’

    돈을 쓴 만큼 반응도 빨랐고 시간도 단축할 수 있었다. 또한 던전 물품 판매 내역과 출입 내역이 있었기에 경험자라는 것 또한 인증할 수 있었다. 매우 공인된 지표였고, 자연스럽게 경력자가 된 점도 있었다.

    “예. 여보세요? 봉수륵(奉燧勒) 씨, 맞나요?”

    ―예. 태산박 씨,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이름 뜻과 본가가 어떻게 되세요?”

    ―하음 봉씨에 이름 뜻은 부싯돌 수, 굴레 륵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것인데, 한문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라 좀 특이합니다.

    “아하…….”

    태산박 또한 본가와 이름 뜻을 말해 주었다.

    “직업을 보니까 전사시던데 그 정도면 더 좋은 팀에 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건 직접 보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음. 좋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는 듯했다. 일단 얼굴을 맞대고 면담을 이어 나가기로 했다. 물론 봉수륵이 어떤 사람인지는 방금의 대화로 딱 감이 잡혔다.

    ‘이놈, 주관이 너무 확실하다.’

    물어봤는데 만나서 말하겠다고 툭 내뱉는 걸 보니 조직 생활에서 재미를 못 보는 친구였다.

    ‘실력만 있으면 딱인데…….’

    산박은 서둘러 외투를 입었다. 서로 진도를 쫙 빼고 싶었기에 바로 만나서 면접을 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시끌시끌한 고깃집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똑같이 세종시에서 살고 있어서 이런 만남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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