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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270)

9화

<부동 지구의 드루이드>

1레벨 던전인 개릉 던전을 갔다 온 태산박은 이틀을 내리 쉬어야 했다.

“으……. 으…….”

전투 피로도는 끔찍했다. 정신도 못 차리고 자는데도 앓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종종 악몽을 꾸기도 했다. 던전의 어두컴컴한 통로에서 갑자기 통로를 가득 메우는 아가리가 그를 덮치는 꿈이었다. 새벽 한 시에 땀범벅으로 일어난 산박은 물을 1L나 마시고 나서 창문을 열고 달과 별을 보며 아침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으그그극.”

5일을 던전에서 지낸 대가는 보통 3일 이상 아무것도 못 할 정도의 심각한 피로도지만 태생이 밑바닥이었던 산박은 이틀로 끝내고 고아원 문을 나설 수 있었다. 회복 속도가 높은 게 아니라 정신력이 강고했다.

산박은 고아원에 도움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곳보다 싸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적당한 돈을 주면 식사를 받을 수 있었고, 쉬거나 필요한 물품을 돈을 주고 부탁할 수도 있었다.

‘언제나 공짜는 없는 법이지.’

그는 고아원을 자신의 사조직처럼 다룰 수 있었다. 물론 강압적이지는 못했다. 서로서로 필요할 때 부탁할 수 있는 정도였다. 비록 돈이 산박에게서 나가지만 다른 숙박 시설보다는 나았다.

‘그것도 이제 끝내야지. 이제 나도 1레벨 던전 사용자다.’

고아원 밖으로 나가 부동 지구를 산책하며 산박은 앞으로에 대해서 생각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독립이었다. 고아원에 오래 붙어 있을수록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난 더 앞으로 나아간다.’

산박에겐 꿈이 있었다. 그 꿈을 위해서 0레벨 던전을 공략할 때도 꼬박꼬박 은행에 돈을 모았던 산박이었다.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고아원에 계속 신세를 졌다. 물론 신세를 지며 그 곱절에 달하는 것들을 베풀긴 했지만.

‘수익이 달라졌다.’

1레벨이 된 지금 수익은 가히 세 배~다섯 배가 많아졌다고 해도 무방했다. 다른 직군에서는 볼 수 없는 압도적인 연봉 상승이었다.

‘하지만 아직 1레벨 던전 공략은 힘들다.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팀원이 제대로 된 놈이 아니라면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1레벨부터는 뭔가가 달랐다. 0레벨 던전을 전전할 때는 전혀 없었던 것들이 존재했다.

‘레벨 업 시스템과 기도의 제단까지.’

1레벨 던전은 던전 사용자가 가진 힘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0레벨 던전을 공략할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렇기에 때를 기다려야 했고, 준비를 해나가야 했다. 산박이 아예 접근 방식을 바꾸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거기에 살인을 저지르는 놈들까지.’

같은 던전 사용자를 공격하는 놈들은 0레벨에서도 만난 적이 있지만 1레벨 던전은 더 심해 보였다. 0레벨 던전 사용자가 생계형 살인을 저지른다면 1레벨 던전 사용자는 성장형 살인을 저질렀다. 아무래도 1레벨 던전에서 살인을 저지를 때 ‘얻을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작은 명성이라도 얻어서 제대로 된 팀에 들어가거나 팀을 꾸려야 한다.’

어쭙잖은 어플 따위로 만난 관계는 절대 신뢰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은 잘만 사용하지만 이미 한 번 덴 산박은 어플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수많은 준비가 필요함을 시은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물약만 팔아도 시은은 잘 먹고 잘살 수 있겠지. 그건 나 또한 그렇다.’

시은은 레벨 업에 욕심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던전에 가는 것이지, 사실 화염 물약 같은 것만 팔아도 이득을 많이 챙길 수 있었다. 대형 팀에 소속되어서 살아가기도 편할 터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산박도 몰랐다.

걸으면서 산박은 자신 또한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대장삵을 이용해서 치료의 힘이 깃든 물을 판매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물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대장삵을 놔두고 엉뚱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이를 통해 세종시에서 명성을 좀 얻고 팀의 영입 권유를 받아서 던전을 공략할 생각을 가졌다.

‘중규모의 팀에만 들어가도 이득이겠지만 세종시에서는 어려운 일이야.’

대규모 팀은커녕 중규모 팀도 매우 적고 매우 폐쇄적이었다. 거기에 그가 사는 부동 지구는 세종시에서도 외곽 지역에 해당했고 당산과 왕자봉으로 세종시와 차단된 곳이기도 했다. 세종시에 속하는 지구지만 사실상 다른 세상이었다.

‘장사하기는 글렀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는 0레벨 던전을 돌며 생긴 자잘한 인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던전이 있는 지하철역에서 항상 장사하는 트럭 상인들이 있었다.

산책을 마친 산박은 곧장 가게부터 알아봤다. 스마트폰으로는 증류수를 대량으로 만드는 기계를 검색했다. 산업 물품이라 값이 제법 나갔고, 연료 또한 문제였다. 물론 구식 증류수 기계도 있었다. 석탄으로 굴러가는 놈이었다.

‘나쁘지 않아.’

석유나 초월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게 주효했다. 산박은 전화를 해서 미리 주문부터 했다.

저벅, 저벅.

미호천에서 들어오는 강이 산박의 옆으로 흘러 지나갔다. 인도도 없는 시멘트 도로를 지나면 세종시로 향하는 연기 사거리가 나온다. 그곳부터 아스팔트 도로가 시작되었다.

딸랑, 딸랑.

“어서 오세요.”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늙은 업자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벽에는 세종시의 지도가 걸려 있었다. 주민이 고작 5백 명에 불과한 부동 지구에 있는 부동산은 세 곳뿐이었다.

“가게 하나 내려고 하는데요.”

“어떤 거로?”

“트럭이 오갈 수 있기 좋은 곳이었으면 하는데요.”

“흠. 그럼 강 쪽에 가게를 얻어야 하는데, 거긴 죄다 월세고 임대료 받는 곳들뿐이야. 얼마를 생각하는데?”

부동산 업자라고 해봐야 세 곳뿐이라서 갑질이 대단했다. 서비스는 기대할 수 없었다.

“가장 싼 곳부터 볼게요. 얼마부터 있는데요?”

“그럼 장기 임대료로 가야겠지. 월세는 싸 보여도 12개월 생각하면 무시 못 해.”

부동산 업자는 시작부터 약을 쳤다. 장기 임대료는 최소 3년을 잡고 계약하는 것인데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가게를 닫고 싶어도 못 닫게 하기 때문이었다. 안 써도 3년을 내야 했고, 그게 싫으면 위약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이 생태계에 대해 공부를 적게 한 산박은 자연히 비용 절감이라는 말에 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부동산 업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았다.

‘낚시하면서 배운 건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법이란 거지.’

방금 것은 미끼를 던진 것뿐이다. 상대가 이를 물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이미 미끼를 던졌는데 그 미끼를 계속 총총 움직인다? 어리석다. 상대는 물고기가 아니다. 가만히 상대가 물기를 기다려야 했다.

부동산 업자는 주제를 순식간에 월세로 돌리면서 월세를 때렸다. 어차피 월세 쪽을 잡아봤자 자신에게 떨어지는 건 몇만 원에 불과했다. 상대가 가장 싼 것을 원해서였다.

“월세는 15만 원부터 50만 원까지 다양해. 평은 몇 평을 원해?”

“적어도 20평은 넘었으면 하는데요.”

“20평이면 작업장 하나 돌리기도 힘든데……. 뭘 하려고?”

“기계 하나만 들어갈 겁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킁. 그래?”

코를 풀고, 부동산 업자는 이 월세라는 놈이 얼마나 개새끼인지를 알려줬다.

“집주인이라는 것들은 세입자를 그냥 도둑놈 새끼로 보는 경우가 많아. 여긴 월세가 15만 원인데 보증금이 500이 넘어. 지가 뭔데 1년 넘는 월세를 보증금으로 받냐고. 말이 안 되잖아.”

“그렇죠.”

산박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1개월마다 돈을 내는데 1년 월세를 보증금으로 요구한다? 괴팍한 소리였다.

“근데 20평짜리면 15만 원 짜리가 없어. 애초에 여기는 깡촌이라 집도 잘 안 나가고, 그나마 있는 게 여기 30평짜리인데 좀 비싸. 월 30만 원. 보증금은 300이야. 10개월 치를 미리 받아 두겠다는 소리인데, 좀 말이 안 되긴 하지.”

“지리가 좀…….”

강가 양옆에 놓인 유일한 시멘트 도로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트럭은 또 못 들어가.”

이렇다, 저렇다, 이 집 저 집 돌아가면서 혼을 쏙 빼놓은 다음에 노인은 순식간에 장기 임대로 넘어갔다. 혀 놀림이 대단했다.

“이게 3년 임대야. 해마다 한 번씩 내면 돼. 3년 합쳐서 900만 원이야. 1년에 300만 원이고 1개월로 따지면 25만 원꼴이지. 30평에다가 시멘트 도로에 붙어있어.”

“좀 비싼 것 같은데.”

“무슨 소리를. 월세 쪽 봤잖아? 똑같은 조건인 곳이 얼마였다고?”

“40요.”

“40이랑 25랑 똑같아?”

“아니죠.”

“그럼 답이 딱 나오잖아. 거기에 여기가 애초에 창고로 쓰이는 곳이라서 대문도 크고 자물쇠랑 쇠사슬도 있는데… 바로 한번 볼래?”

부동산 업자가 걸어 두었던 양복을 입었다. 그 모습에 산박은 홀린 것처럼 소파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나왔다. 부동산을 나오자마자 미호천에서 삐져나온 강이 흐르는 게 보였다.

“이 부동 지구는 정말 입지는 좋아. 세종시가 지금 두 쪽으로 나누어져 있잖아? 거기 사이에 껴있으니까. 반드시 치고 오를 날이 있을 거라고.”

세종 시청이 있는 남쪽과 대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해 있는 북쪽이 나누어져 있는 게 현재의 세종시였다. 그 사이에 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게 부동 지구였다.

30평짜리 창고는 생각보다 좋았다. 애초에 창고로 활용되고 있었고, 임대인이 나가고 나서도 철거를 진행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데.’

따로 공사가 필요 없었다. 단점은 너무 넓다는 점이었다. 사실 산박이 하려는 일은 불편해도 15평에서도 가능했다. 큰 증류수 기계 하나 놓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30평 창고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어차피 고아원에서 독립도 해야 하니까. 여기서 살면서 작업도 하면 되겠어.’

그전까지는 한 푼이라도 저금하기 위해서 모텔, 여관, 원룸보다는 고아원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제 1레벨 던전 사용자가 되었다. 독립할 때를 모르는 철새는 날 줄 모르는 새와 같았다.

“계약하겠습니다.”

“집주인에게 바로 연락하지. 산에 자주 가는 양반이라 당장은 연락이 안 될지 몰라도 못해도 저녁에는 만날 수 있을 거야.”

순식간에 장기 임대가 이루어졌다.

* * *

“아! 이 젊은 친구, 나이가 이렇게 어린데 벌써 사업하니까 정말 보기가 좋네!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줘봐! 내가 여기 마당발이고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집주인은 아주 떵떵거리면서 젊은 친구가 열심히 산다고, 문제 있으면 불러 달라고 했다. 목소리가 정말 큰 노인이었다. 명함은 새하얀 바탕에 그 어떤 장식도 없이 삭막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있어 보였다.

‘사람이 당당하면 뭐라도 있어 보인다더니.’

그렇게 산박은 ‘장 노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계약서를 받고, 그대로 1년 치 대금을 먼저 지급했다. 이체 내역이 스마트폰으로 들어오자 장 노인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키는 작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큰 사람이었다.

“따라와! 이번에 내 옥수수를 크게 재배를 했거든. 한 포대 들고 가.”

“아, 예. 직접 재배하신 겁니까?”

그 말에 장 노인이 껄껄 웃었다.

“주변에 널린 게 실업자인데 뭔 소리야? 자네같이 칼 밥 먹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데. 그것도 아주 큰 재능이라고.”

포대에 옥수수가 꾹꾹 담긴 것을 받은 산박은 그냥 가기가 그래서 대장삵을 소환해서 보여 주었다. 물살 치는 회오리에서 푸른 눈의 삵이 나오자 장 노인은 아주 좋아했다.

“살쾡이 놈, 잘생겼다!”

그 말에 대장삵은 고개를 휙 틀며 그대로 산박의 뒤에 몸을 숨겼다.

“던전 사용자들은 직업이 있다는데, 자네는 뭔가?”

“드루이드입니다.”

“그래.”

장 노인은 스마트폰을 느긋하게 조작해서 메모를 했다.

* * *

창고로 돌아온 산박은 대청소를 하고 자신이 누울 장소를 마련했다. 그때 이시은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세요?”

―뭐 하고 계시나 싶어서요. 아직도 쉬고 계세요?

“다른 일에 눈 좀 돌리려고요. 아직 준비가 많이 미흡하다는 걸 깨달아서요.”

―아~ 던전 가실 때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생각보다 믿음직한 사람 구하는 게 힘들잖아요?

“예. 시은 씨는 뭐 하고 계세요?”

―던전 사용자들한테 물약 팔고 있죠. 언제나 수요가 있는 게 물약류거든요.

살기 위해서라면 하나쯤은 있어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화염 물약은 어디서든지 위력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고 청소를 핑계로 전화를 끊은 산박은 다시 청소 도구를 들어 올렸다. 증류수 기계가 오고 난 다음에는 바로 트럭 상인 박조조에게 전화를 했다.

―어, 무슨 일이세요?

“제가 이번에 1레벨 던전 사용자가 되었는데, 팔 만한 물건이 있어서요. 한번 와보시죠? 아직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했으니까요.”

―정말요? 사업 제안이면 당연히 방문하죠.

그는 서둘러 오겠다고 했다. 하루 공쳐도 상품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다면 얘기가 또 달랐다. 오늘보다는 내일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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