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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50화 (외전 완결) (250/250)
  • #250. 외전5 - 누구냐, 너? (3)

    시장 공중화장실에 들어앉은 박말금 여사는 극심한 복통에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은 채 홀로 끙끙 앓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앓았던 담석증 때문에 한 번씩 복통에 시달리곤 했지만 최근 들어 그 빈도와 고통의 정도가 심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디 다른 곳이 아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난 참이었다. 하나뿐인 손자를 위해서라도 오래오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병원이라도 가야 하나 싶은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와 보니 언제 왔는지 민경우가 화장실 잎에 서 있었다.

    “아이, 깜짝이야. 기척 좀 하고 다녀, 이것아!”

    “뭘 어쨌다고 화를 내는데?”

    바락 성을 내기는 했지만 솔직히 틀린 소리도 아니었던 터라 박말금은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거기다.

    ‘나 같은 거 이 세상에 없어져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고. 아마 사라져도 영영 모를 거라고!’

    지난번에 녀석이 그러고 도망치고 나타나지 않은 탓에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으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좀 놀란 걸 가지고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 근데 오랜만이라 반갑네. 그동안 잘 있었어? 그렇게 가 버려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정…… 말? 진짜 내 걱정했어?”

    “이래서 사람 정이 무섭다는 거야. 며칠이나 됐다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새끼가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나 몰라.”

    정이 고픈 아이라는 걸 잘 알았던 그녀는 일부러 그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골라했다. 덕분에 굳었던 녀석의 얼굴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근데 어디 아파?”

    그 말에 박말금 여사는 뜨끔했으니.

    “아프긴. 그랬으면 진작 자리 깔고 누웠겠지.”

    “아닌데, 분명 아까 화장실 들어갈 때부터 안 좋아 보였는데. 안에서 끙끙 앓는 소리도 들렸고.”

    생각보다 예리한 모습에 박말금 여사는 민경우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아, 왜 때려?”

    “아무리 나 같은 망구탱이라도 그 뭐냐? 그래, 프라이버시는 있어. 뭘 잘못 먹었는지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에 좀 간 걸 가지고 그렇게 뒤꽁무니 졸졸 쫓아다니는 게 잘하는 짓이야, 그럼?”

    아직 아이라 그런지 금방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에 그녀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그동안 통 못 본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었어?”

    “한 기…… 가 아니라 학원 빼먹고 땡땡이 친 거 들켜서 집에 좀 갇혀 있었어.”

    “거 봐. 자식한테 관심 없는 부모가 어디 있어? 사느라 바빠서 신경 못 쓴 거지. 학원 안 갔다니까 걱정하신 거잖아.”

    “그런 거 아니거든. 내가 걱정된 게 아니라 시키는 대로 안 해서 화가 난 거라고. 할머니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럼 이제 혼은 다 났고?”

    “몰라. 몰래 도망쳤으니까. 이제 상관 안 해.”

    “그러다 또 혼날라. 뭐 꿀 발라 놨다고 여기는 자꾸 와?”

    “그냥…… 갈 데가 없으니까 그러지. 집은 싫은데 갈 데가 아무 데도 없어…….”

    민경우는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왜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길까?

    정확히 따지자면 별 볼일 없는 이 할머니 때문이었다. 자기 또래쯤 되는 아이를 보며 기쁘다는 듯 미소 짓고 있는 그런 표정을 민경우는 처음 봤다.

    그날, 두 사람의 모습을 처음 본 민경우는 집으로 돌아가 거울을 보며 한참이나 웃어 봤지만 할머니와 자기 또래의 소년이 지었던 그런 표정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궁금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런 녀석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박말금 여사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것도 인연인데 아직도 통성명을 안 했네. 너 이름이 뭐냐?”

    “나? 민경우. 내 이름 민경우.”

    그러면서 씩 웃는 모습이 그제야 제법 그 나이대 소년 같아 보였다.

    “경우, 이름 좋네. 경우 넌 꿈이 뭐야?”

    “꿈?”

    “그래, 이 다음에 커서 하고 싶은 거 말이야.”

    “나 그런 거 없는데?”

    “없어? 이상하네. 우리 손주 놈은 물어볼 때마다 꿈이 바뀌더만. 어떤 날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다가 또 어떤 날은 운동 선수, 그 다음 날엔 선생님이었지. 아, 요즘엔 경찰이 되고 싶다고 하더라.”

    “그런다고 다 할 수 있나?”

    “애가 왜 영감 같은 소리를 해? 꿈을 여러 개 가지면 좋지 뭘. 그중 하나는 되지 않겠냐? 뭐, 그렇다고 해도 경찰은 하지 마.”

    “왜?”

    “내 아들이 경찰이었거든. 손자 놈이 경찰을 하고 싶다는 것도 그 이유지. 제 애비가 경찰이었다는 걸 알고 나서 되겠다는 거였으니까?”

    “아들이 아버지가 무슨 일 하는 지 몰랐던 거야? 근데 할머니는 그걸 왜 반대하는데?”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싶었지만 어차피 말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거 내가 아무한테도 알려 주지 않은 이야긴데, 너한테만 특별히 알려 줄게.”

    “뭔데?”

    “실은 우리 아들이 멀리 갔거든.”

    “멀리? 어디? 미국? 유럽?”

    그녀는 대답 대신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게 무슨 의민지 민경우 역시 모르지 않았다.

    “중간에 그만 두긴 했는데 그게 참, 자식 둔 사람 피 말리는 일이더라. 나쁜 놈들 잡으려다 내 아들 잡는 거 아닌가 그만두기 전까지 걱정 안 한 날이 없었지. 그래서 내 손자한테 그 일 시키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웬만하면 경찰은 하지 마. 알았어?”

    “내가 그딴 걸 왜 해? 나 힘든 거 싫어해.”

    “그래. 잘 생각했다. 그나저나 너한테 이런 소리를 왜 하고 있나 몰라.”

    때로는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보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사람에게 더 입이 가벼워지는 경향이 있었으니, 할 말을 꾹꾹 마음 속에 담아 두기만 하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술술 이야기를 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민경우의 입장에선 어쩐지 그녀가 자신과 손자를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둘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아 오히려 좋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뱍말금 여사의 말에 민경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게? 조금 있으면 우리 손주 올 시간 됐는데.”

    “그래서 뭐?”

    “보니까 나이도 얼추 비슷한 거 같구만 같이 놀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러지.”

    “됐어. 어린애는 딱 질색이야. 그럼 할망구, 다음에 봐.”

    손 흔들며 돌아서는 민경우의 모습에 박말금 여사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어디서 할망구래, 할망구가. 저도 어린 게.”

    그러고 보니 여전히 반말이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훨씬 공손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 교육이 엉망이었을 뿐 애초에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고 박말금 여사는 확신했다.

    * * *

    ‘나이도 얼추 비슷한 거 같구만 같이 놀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러지.’

    솔직히 보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는 관심이었다. 아무래도 그 녀석과 같이 있다 보면 박말금 여사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릴 게 분명했으니까. 어머니도 큰형과 작은형을 차별하는데, 박말금 여사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래서 민경우는 될 수 있는 대로 그 녀석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그의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으니 작은형 민준호였다.

    “형이 내 방엔 어쩐 일이야?”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형의 모습에 의아한 민경우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달라진 형이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에 민경우는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형, 왜 그래? 뭐 화나는 일 있으면 말해, 응?”

    하지만 대답 대신 민준호는 도망치려던 동생을 쓰러뜨려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죽어, 너 같은 건 죽어 버려. 새명은 처음부터 내 거였어! 너 따위는 죽어 버리라고!”

    어머니와 외삼촌의 대화를 엿들었던 그는 하나뿐인 동생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이성을 잃은 뒤었다. 목이 졸린 채 고통스러워하던 민경우는 겨우 형을 밀치고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형이, 형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뭔가 잘못된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쏟아지는 눈물 탓에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자신은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도망치듯 나오느라 지갑도 휴대폰도 아무것도 없었다. 형이 쫓아올 것만 같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뛸 수밖에 없었던 그는 주머니에 구겨 넣은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발견하고는 일단 택시를 잡아 탔다. 그리고 늘 그렇듯 시장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어느 정도 진정을 한 그가 겨우 내렸다. 그저 위로를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딘지 몰라도 시장이 평소의 분위기하곤 좀 달라져 있었다.

    119 구급차가 있었고 구급차 주변으로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거기다 아이의 울음소리까지.

    애들이 우는 소리를 질색하던 민경우는 저절로 인상이 팍 써졌다.

    그나저나 이 할머니가 어디 있는가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119 구급차가 출동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북적여서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119가 떠나 주변이 정리되어도 할머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나둘 자리에서 흩어지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올 뿐이었다.

    “괜찮으시려나 모르겠네.”

    “형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잖아. 금방 털고 일어나실거야.”

    “저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은석이는 어쩌고?”

    “은석이가 왜? 버젓한 경찰 아버지가 있는데 무슨 남 걱정.”

    “그게…… 은석이 아버지, 몇 해 전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뭐? 그게 진짜야?”

    “그렇다니까.”

    “그래서 형님이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셨던 거구나. 으휴, 안돼서 어째. 쯧쯧쯧.”

    “별일 아니길 빌어야지 뭐.”

    자신이 그토록 찾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민경우는 그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다. 애초 할머니 손자의 얼굴은 알고 있어도 이름은 알지 못한 탓이었다.

    그곳에서 한참을 기다린 민경우는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박말금 여사를 기다렸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 * *

    “더는 봐주지 않아. 만약 이번에도 날 실망시킨다면 지켜만 보지 않을 게다. 그건 누구보다 네가 잘 알 테고.”

    싸늘하게 일어서는 아버지의 모습에 민경우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걸까? 그도 잘하고 싶었다. 적어도 형들만큼 인정받는 아들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애초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었다.

    ‘나 같은 거 살아서 뭐 해?’

    술에 취한 탓이었는지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애초 술에 취한 채 운전대를 잡아선 안 되는 거였는데, 이대로 그냥 확 죽어 버렸으면 싶은 생각이었다. 그는 액셀을 강하게 밟았다. 차가 쌩하니 앞으로 나갔다. 그러다 쿠웅, 쾅하고 부딪쳤고 조금씩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벌을 받는 구나 싶었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서 끝내고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자신에게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어린 시절 아주 잠깐 만났던 그 할머니처럼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 주는 곳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은석은 이미 다림질해 놓은 정복을 다시 한번 살폈다. 새 옷인데도 혹시나 주름이 진 건 아닌지 자꾸만 확인했다. 그러다 옆에 놔둔 모자를 쓰고 거울 앞에 섰다. 이미 여러 번 본 모습이었지만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드디어 내일이면 경찰로 첫 출근을 하는 날,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룬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많았지만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할머니 덕에 견딜 수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탕탕탕탕.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가 철컥 문을 열었더니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누구시죠?”

    “저, 저기 이은석 씨…….”

    “어? 전데요? 어떻게 오신 거죠?”

    “저기 고명희 선생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누구요? 고명희? 그 사람이 누군데요?”

    멀쩡하게 생긴 사내가 당황해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이놈 뭐지?

    웬 이상한 놈이란 생각이 들 무렵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잘못 알았습니다. 이은석이 아니라 이은섭이었는데 죄송합니다. 주소도 여기가 아니라 옆 동네였는데 제가 착각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한 사내가 돌아서자 현관문을 닫고 들어온 이은석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별 이상한 사람―.”

    그 순간이었다.

    봉인된 기억이 풀리듯 이전 생의 기억이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당황스러워하던 이은석이 황급히 돌아봤다. 탁자 위에 놓아둔 액자 속 박말금 여사가 미소 짓고 있었다.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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