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49화 (249/250)
  • #249. 외전 4 - 누구냐, 너? (2)

    “살 거야, 말 거야?”

    “그럼 이천 원어치만 줘 봐요.”

    “그거로 누구 코에 붙이려고. 삼천 원어치 해. 딱 봐도 다른 거하고 때깔부터 다르잖아. 산골짜기 맑은 기운을 먹고 자란 거라고. 자연산이야, 자연산. 밭에서 키우는 거랑 차원이 다르다니까. 삼천 원어치 할 거지?”

    “그래요, 좋아요. 주세요. 할머니 꾼이네, 꾼. 내가 나물만 도대체 얼마나 산 거야?”

    “좋은 거 싸게 많이 사 두면 좋지 뭘. 살짝 데쳤다가 헹구고 물기 짜서 냉동실에 넣어 놨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먹으면 어려울 것도 없어. 내가 서비스로 이만큼 더 줄 테니까 맛있게 해 먹고 또 와요. 응?”

    “네, 많이 파세요.”

    한창 실랑이를 하던 손님이 떠나자 옆에 앉은 보성댁이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형님도 대단하셔요. 그렇게 장사해서 뭐 하시려고 악착같이 벌어요? 이제 그만 자식들 효도 받으면서 손주 재롱만 보고 사셔도 충분하실 텐데. 나야 자식 복이 있기를 하나 서방 복이 있기를 하나. 입에 풀칠하려고 나오는 거지만 형님은 그만하실 때도 되지 않았어요?”

    “나이 들어서 방에 들어앉아 봐. 그때부터 죽을 날 받아 놓고 기다리는 신세가 되는 거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편히 사는 게 왜요?”

    “사람은 일이 있어야지. 웬만하면 보성댁도 숨 넘어갈 때까지 일해. 그래야 건강해.”

    “됐네요. 저는 형님 같이는 안 살 거네요. 지금이야 할 수 없으니까 일하는 거지, 먹고살 걱정 없으면 벌어 놓은 돈 쓰면서 살 거예요.”

    “그러던가, 그럼.”

    보성댁의 비아냥에도 박말금 여사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사실 하나 있는 아들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시장 사람, 그 누구도 몰랐다.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물론 혼자뿐인 손자가 동정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아들이 남기고 간 유일한 혈육인 은석이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그녀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악착같이 일했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 아들을 만나면 면이 설 것 같았으니까.

    시계를 보니 곧 있으면 은석이가 올 시간이었다. 오기 전에 다 팔아야 같이 집으로 들어갈 거란 생각에 박말금 여사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취나물 사요, 취나물. 토란도 있고 고구마순도 있어요. 애기 엄마, 이것 사다가 저녁 반찬으로 해 봐.”

    대부분 심드렁한 얼굴로 듣는 체도 안 하고 지나가지만 그래도 그녀의 외침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녀는 그걸로 만족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보성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저놈. 지난번 형님 밀치고 도망쳤던 그놈 아니에요?”

    안 그래도 그때 넘어진 이후로 허리 안쪽이 자꾸 뻐근한 것 같았는데 그 싸가지 없는 망할 놈이 또 나타났다는 소리에 박말금 여사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당장이라도 쫓아가 멱살잡이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손자만 한 어린 놈이랑 싸워서 뭐 하나 싶어 그냥 신경을 끄기로 했다.

    보니까 놈도 미안한 구석이 있는 건지 지켜보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아예 몹쓸 놈은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하긴 저 정도의 나이면 저렇게 키운 부모 탓이지, 애가 뭘 알겠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으니.

    “할머니!”

    학교 끝나고 방과 후 수업까지 마친 손자 이은석이 저기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구, 내 새끼! 학교 끝났어?”

    “네!”

    “공부는 열심히 했고?”

    “그럼요. 나 오늘 발표 잘했다고 선생님한테 칭찬받았어요.”

    “잘했네, 내 강아지 정말 잘했네. 배고프지? 얼른 집에 가자. 할미가 맛있는 거 해 줄 게.”

    “네!”

    현재 그녀가 살아가는 유일한 의미라 할 수 있는 하나뿐인 손자 은석을 보자, 박말금 여사는 하루 동안 쌓였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린 게 벌써부터 철이 들었는지 팔다 남은 나물로 반찬을 해 줘도 그 흔한 투정 한 번 하지 않은 게 그녀는 오히려 속상했다. 부모 밑에서 자랐으면 남부럽지 않았을 것을 저 혼자 살겠다고 어린 것을 두고 떠나 버린 며느리에 대한 원망을 삼키며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였다.

    자신과 손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 망할 놈과 눈이 마주쳤다.

    “할머니, 저쪽에 어떤 애가 우리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있어? 심심한 모양이지. 어여 가자.”

    처음엔 신경과민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으니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그 망할 놈이 계속해서 시장에 나타났다.

    “형님, 저놈 또 왔어요.”

    “뭐? 또?”

    처음엔 다른 일이 있어서 온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한참 지켜보다 자신이 돌아갈 때쯤 녀석은 사라졌다. 이쪽을 보고 있는 걸 보니 분명 용건이 있을 거란 생각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던 그녀는 몰래 녀석의 뒤로 다가갔다.

    “너, 여기서 뭐하고 있냐?”

    “아잇, 깜짝이야?”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민경우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못한 것도 없었지만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되려 큰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

    “내가 여기 있든 말든 할망구가 무슨 상관인데?”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여길 와, 여길?”

    “웃겨. 여기 할망구가 다 전세냈어?”

    “그래, 전세냈다.”

    “……?”

    “네놈은 모르는 모양인데 여기서 장사를 하려면 말이다, 나라에서 허가를 받아야 하는 거야. 아무렴 시장판에서 아무렇게나 벌려 놓고 장사를 하는 줄 알았냐, 이 망할 놈아.”

    “왜 자꾸 나한테 망할 놈이라고 하는 건데?”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는 법이거든. 그러니 자꾸 들으면 언젠가 네놈이 망하는 날이 오지 않겠냐?”

    버르장머리 없이 말끝마다 반말을 해 대는 놈을 혼 좀 내 주려 했던 건데, 파랗게 질리는 얼굴을 보니 아직 어린놈은 어린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놈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드는 게, 딱 봐도 하고 다니는 꼴이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게, 평범한 집 아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아이가 이런 시장통에서 혼자 이러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이렇게 보니 돈 많은 집 자식이나 자기 손자나 부모 사랑 못 받고 자라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가 저렇게 싸가지 없이 크진 않았을 테니까.

    그날 이후 민경우가 보이지 않자 박말금 여사는 아예 아이의 존재에 대해 잊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민경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잔뜩 풀 죽은 녀석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쓰인 박말금 여사가 다가갔다.

    “오늘은 어째 그렇게 풀이 죽었어?”

    힐끔 보더니 대꾸도 않고 처량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어쩐지 비맞은 강아지를 연상케 했다. 몇 번 본 건 아니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냥 두기 뭐한 마음에 손을 내밀려던 바로 그때였다.

    꼬르륵.

    생각보다 큰 소리에 이런 일이 처음이었던 민경우는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빨개졌다.

    “배고파?”

    “…….”

    “따라 와.”

    박말금 여사가 성큼 앞서가자 민경우는 따라갈지 말지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돌아본 그녀가 재차 말했다.

    “얼른 안 오고 뭐 해?”

    그녀의 재촉에 민경우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허름하고 오래된 중화요리집.

    어리둥절한 채 주변을 둘러보던 민경우는 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졌다. 테이블의 칠은 벗겨져서 얼룩덜룩했고 손이 잘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엔 거미줄이 있었으니 한눈에 보기에도 위생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민경우는 도대체 왜 이 할머니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건지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 볼 거 없다. 아무렴 내가 널 팔아먹기라도 할까?”

    경계심 가득한 민경우의 모습에 박말금 여사는 어이가 없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안 따라왔으면 되었으련만 왜 굳이 따라온 건지, 하여간 알다가도 모를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짜장면 한 그릇이 나왔다.

    “먹어. 이 집 잘해.”

    “이거 나 먹으라고?”

    “그럼 나 먹는 거 구경하라고 널 데리고 왔을까? 배고픈 거 같은데 얼른 먹어.”

    손자 은석이가 환장을 하며 먹는 짜장면이었다. 안 된 마음에 큰맘 먹고 데리고 왔더니 짜장면을 보는 민경우의 얼굴은 시큰둥했다.

    “안 먹어?”

    “뭐가 이렇게 새까매? 사람이 먹는 거 맞아?”

    “하여간에 한다는 소리 봐라. 그럼 사람 먹는 거지, 개밥인 줄 알아? 일단 먹어 봐. 먹고 나서 이야기 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부몬지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한 짓 했다는 생각이 들 무렵, 박말금 여사의 성화에 하는 수 없이 젓가락을 뜬 민경우는 달짝지근한 맛에 눈이 커졌으니 코를 박은 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말하는 본새는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담아 온 그녀가 민경우 앞으로 내밀었다.

    “체할라. 천천히 먹어. 그러게 밥은 챙겨 먹고 다녔어야지, 왜 굶고 다니는데?”

    그녀의 말에 아이는 허겁지겁 바쁘게 움직이던 몸놀림이 급격히 느려지고 있었다.

    “할망구, 어른이 되면 원래 그렇게 싸우는 거야?”

    그 순간 박말금 여사는 자신의 앞에 놔둔 숟가락으로 민경우의 이마를 내리쳤다.

    “아, 왜 때려? 그것도 밥 먹는 숟가락으로!”

    “맞을 짓을 하니까 맞는 거지. 어린놈의 자식이 오냐오냐하니까 뭐가 어쩌고 저째? 할망구? 내가 네 친구냐? 존댓말 안 써?”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걸 나보고 어쩌라고!”

    되려 큰소리에 박말금 여사도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내 새끼 키우기도 힘든 판에 남의 새끼까지 가르칠 거 뭐 있냐?”

    “뭐래.”

    “됐다고, 너 하던 대로 하라고. 오냐, 얘기나 한번 들어 보자. 보아하니 네 애비, 애미가 싸웠겠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이 동그래진 민경우의 모습에 박말금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입가에 짜장 소스를 덕지덕지 묻힌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어른이 되면 그렇게 잘 싸우는 거야?”

    “부모님이 자주 싸우시냐?”

    “응. 얼굴만 마주쳐도 싸워. 싸우느라 나한텐 관심도 없어.”

    “에휴, 어린것이 참…… 너도 고생이 많다. 애들은 어른이 되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근데 어른이란 건 말이다, 할 수 없다는 게 여전히 많다는 깨달을 뿐이야. 그러니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아서 싸우게 되는 거고. 그게 그렇게 서운했어?”

    “이건 서운하고 말고 문제가 아냐, 아예 나한테 관심이 없어. 그럴 거면 뭐하러 낳았느냐 말이야.”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아니라니까. 관심이 아예 없어. 하루 종일 밖으로 나돌아 다녀도 내가 없어진 걸 아무도 몰라, 아무도! 나 같은 거 이 세상에 없어져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고. 아마 사라져도 영영 모를 거야!”

    그러더니 흥분을 했는지 그대로 일어나 쌩하니 가 버렸다. 남의 자식이라지만 손주 또래의 녀석에게 이상하게 눈길이 간 박말금 여사가 남은 짜장면이 보며 툴툴거렸다.

    “이 아까운 걸 남기고 갔네. 마저 먹고 가지…….”

    혹시나 금방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민경우는 꽤 오랫동안 시장 골목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다시 나타났을 때는 한참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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