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48화 (248/250)
  • #248. 외전3 - 누구냐, 너? (1)

    하늘에서 하얀 눈이 퐁퐁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막 근무를 마친 이은석이 교대를 위해 경찰서로 돌아왔다. 모자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 내며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눈까지 오고, 이러다 늦겠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그는 그대로 퇴근을 하려다 말고 일부러 형사과를 찾았으니.

    “저, 갑니다.”

    “그래, 잘 다녀와라.”

    “가서 사진 많이 찍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와.”

    “와서 이야기 실컷 해 줘야 해. 알지?”

    “네, 걱정 마십쇼.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쌩 나가는 이은석의 모습에 이제는 순경 딱지를 떼고 경장이 된 조해일이 투덜대며 말했다.

    “솔직히 우리가 먼저 친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결혼식은 저놈만 초대하고. 완전 서운합니다.”

    “형님도 가만히 계시는데 조 순경이 왜 난리야?”

    “조 순경 아니고, 이제 조 경장이거든요.”

    “순경이나 경장이나. 어쨌든 가뜩이나 일은 밀려 있고 일손은 부족한데, 요 앞 예식장도 아니고 제주도까지 결혼식을 어떻게 가냐? 그래서 못 간다고 이야기했고 덕분에 여기까지 배달된 인피니티 그랜드 호텔의 메인 쉐프가 직접 만든 특제 요리를 맛봤으면 되지, 뭘 더 바라? 그날 호들갑 떨면서 사진 백 장 찍으시던 그분은 어디 가셨나?”

    “그거야……. 그래요, 저도 알아요. 근데 그날 먹은 건 이미 다 소화돼서 기억도 안 나거든요. 저도 제주도 가서 야자수도 보고 싶고, 다금바리도 먹고 싶고, 집집마다 감귤 나무도 있다는데 지나가다가 서리도 하고 싶고, 그러니까 그렇죠.”

    “서리? 야, 경찰이라는 놈이 기껏 한다는 소리가 도둑질? 이리 와, 너는 아주 그냥 혼구녕이 나야 정신을 차리지!”

    “손에 든 그거는 놓고 말씀하시죠!”

    좁은 사무실 안에서 마치 톰과 제리를 떠올리는 쫓고 쫓기는 레이스가 펼쳐졌으니, 먼지 풀풀 날리며 뛰어다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노필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경우의 결혼식에 그들 모두 초대를 받았지만 현실적으로는 모두 다 참석하는 게 어려웠으니 하는 수 없이 스케줄 조정이 용이한 교통과 이은석이 대표로 다녀오기로 한 거였다.

    그나저나 결혼할 때 눈이 오면 잘산다고 하던데 노필규는 이제 가정을 이루는 그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 * *

    눈이 내려 걱정을 하긴 했지만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은 덕분에 이은석은 제 시간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뜨자 잔뜩 흐렸던 서울 날씨와는 달리 태양은 유달리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구름이 걷혔으니 한겨울이라 생각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히 포근한 날씨였다.

    택시를 타고 마침내 도착한 별장.

    아무래도 재벌가의 결혼식이라 입구부터 분위기는 삼엄했다. 청첩장을 확인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탓에 깜빡 잊고 청첩장을 가지고 오지 못했다면 제주도까지 와서 결혼식은 구경도 못할 뻔했다.

    신신당부 탓에 청첩장을 가져온 이은석은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 너른 정원을 결혼식장으로 소소하게 꾸민 게 눈에 들어왔다. 가까운 친척과 지인들만 불렀다고 하더니 진짜로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찾아가 일일이 인사를 하는 경우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잠시 그런 그를 이은석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이은석을 발견한 경우가 손을 번쩍 들더니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와 줘서 고마워.”

    “결혼 축하해, 경우야.”

    “참, 우리 어머니께 인사해야지.”

    경우는 머뭇거리는 이은석을 데리고 가 그의 어머니께 인사를 시켰다.

    “어머니, 제가 말씀드렸던 경찰하고 있다는 친구예요.”

    “……이은석이라고 합니다.”

    “경우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여기까지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자신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 윤정숙의 모습에 이은석은 어쩐지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기분을 알지 못한 경우가 이은석을 데리고 신부인 강희주는 물론 누나와 가까운 이들을 소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식장 안을 한 바퀴 돌자 신랑보다도 그가 진이 빠져 있었다.

    “경찰한다는 얘가 체력이 왜 이래?”

    “너도 밤샘 근무해 봐. 이렇게 안 되나. 그나저나 내가 신랑도 아닌데 왜 나를 데리고 인사를 다녀.”

    “그냥……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 만큼은 내가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다는 거 보여 주고 싶었거든.”

    그 말을 하는 경우의 눈빛이 어쩐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아 이은석은 대수롭지 않게 경우의 어깨를 툭 쳤다.

    “짜식! 알았어. 너 진짜 열심히 살았어. 그거 내가 알지. 됐냐?”

    “어. 고맙다.”

    “고맙긴. 친군데 척하면 척이지.”

    이은석의 미소에 경우가 씩 웃었다. 그의 말마따나 경우는 이은석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의 이전 생과 연결된 유일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잠시 후 시작된 결혼식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과 같았다. 참석자들은 행복해하는 신혼부부의 앞날에 좋은 일만 있길 축복했다.

    아무리 포근하다고 해도 겨울임을 감안해 정원 옆 유리온실을 식당으로 꾸며 놓았으니 한결 여유롭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은석은 이런 결혼식은 다시 보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룻밤 묵을 호텔까지 잡아 주었지만 이은석은 마다하고 결국 서울로 돌아왔다. 가 보고 싶은 곳이 생각난 참이었다. 그곳은 바로 할머니가 계신 납골당.

    납골당 안에 할머니의 사진을 보던 이은석이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 나 왔어. 오늘…… 그 녀석 결혼식에 다녀왔어. 할머니도 봤지? 나 그렇게 멋있는 결혼식은 처음 본 거 같아.”

    ‘근데 내 강아지 얼굴이 왜 그래?’

    “그냥…… 기분이 이상하달까? 어머니가 그런 얼굴 하고 있는 거…… 처음 봤거든.”

    ‘그래서 섭섭했어? 너한테는 그런 얼굴 안 보여 줘서?’

    “예전이었으면 그랬을 텐데 지금은 아니야. 내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후회돼?’

    “아니. 미안하지. 후회 안 돼. 난 지금도 좋거든.”

    ‘경우야…….’

    “나 경우 아냐. 이제 내가 이은석이지. 할머니도 이제 그 녀석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아. 그렇지?”

    ‘그래, 내 강아지.’

    잔뜩 눈물이 고인 채로 사진을 보고 있던 이은석이 씩 웃었다. 그는 문득 아주 아주 오래 전 할머니와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은석이 아닌 그가 민경우였던 시절.

    * * *

    “도련님! 막내 도련님!”

    한 기사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골칫덩이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조그만 놈이 그새 또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재벌집 초딩 아들 전담 기사 치고, 제법 많은 월급을 부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일이 많은 것도 많은 거였지만 몸보다는 심적인 고통이 더 컸다. 초딩이라 귀여울 줄 알았건만 몸만 작았지 갑질하는 건 전혀 어리지 않았다.

    이놈의 자식은 사람을 업신여기는 건 기본, 마음에 안 들면 폭언을 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하기 싫으면 학교 수업도 땡땡이 치고 도망치는 건 약과, 동급생을 패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덕분에 한 기사의 인생이 스펙터클해졌다.

    “에이,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일이 힘든 건 둘째 치고, 어린 놈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쓰는 것도 모자라, 노예처럼 인간 취급도 못 받으니 당장이라도 그만 두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오늘도 사표를 낼 용기로 골칫덩이를 찾아다니기에 안간힘이었다.

    “도련님! 어디 계신 거예요, 경우 도련님! 과외 선생님 오실 시간이 됐다니까요?”

    어쨌든 그가 그렇게 찾는 새명 그룹의 막내 민경우는 진작 콜 택시를 불러 타고 유유히 동네를 빠져나왔으니 어딘지도 모르는 최대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무작정 달아났다.

    남들은 부러워할지 모르나 빽빽하게 밀려 있는 수업 스케줄도 답답했고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부모도 싫었다. 아무리 사고를 쳐도 꾸지람 한 번 듣지 않았다. 자꾸 집을 나가는 것도 누구라도 관심을 가져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그만큼 그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내려 무작정 걷다 보니 그곳은 시장 골목. 왁자지껄한 소음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미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져 있던 그는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나물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있는 힘껏 차 버렸다.

    “에구머니나!”

    그 바람에 그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놀라 민경우를 노려봤다.

    “뭘 봐?”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의 새끼를 봤나, 뭘 봐? 야, 이놈의 자식아! 말은 어디다 잘라먹고 뭐가 어쩌고 저째?”

    “이 망구탱이가 뭐래? 냄새나는 할망구, 저리 안 가!”

    “뭐? 망구탱이? 오늘 장사도 안 되던 참이었는데 너 참 잘 걸렸다! 너, 집이 어디야? 어?”

    할머니가 민경우의 귀를 잡아당기자, 그는 눈이 번쩍 뜨이며 생전 겪어 보지 못한 고통에 악을 썼다.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이 싹퉁머리 없는 자식, 네가 누군데? 대통령 손자라도 돼? 아니면 어느 나라 왕자님이라도 돼냐?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럼 이 나이에 내가 너한테 넙죽 엎드리기라도 하리?”

    “나 당신 고소할 거야! 가만 안 둘 거라고.”

    “오냐, 그래 한 번 해 보자! 경찰 불러! 어디 한 번 불러 봐!”

    “내가 부르라면 못 올 줄 알고? 흥!”

    전화기를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택시비를 쓰느라 가지고 있는 돈도 다 떨어진 상태.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할머니가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으며 한발 한발 다가갔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인 모양인데,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망가뜨리는 건 재물 손괴죄야. 경찰을 부르면 내가 잡혀가는 게 아니라 네놈이 먼저 잡혀 들어갈거다. 알고나 주둥이 나불거려, 이 망할 놈!”

    “저, 저까짓 거 며, 몇 푼이나 한다고 돈 주면 될 거 아냐! 돈!”

    “됐네, 이 사람아. 오늘 장사 재끼면 나도 그만이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네놈 하고 다니는 꼬라지를 보니 애비, 애미 쌍판을 굳이 보지 않아도 알겠구나. 돈푼깨나 있는 집안인 모양인데 싸질러 놨다고 다 사람인가? 너 같은 놈은 어딜 가나 천덕꾸러기. 남의 손가락질이나 받으며 평생 살 팔자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정곡을 찌른 듯 정확히 보는 그녀의 시선에 민경우는 화가 났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거지 같은 할망구한테 전부를 들킨 것 같아 더 화가 났다. 그래서 뒤돌아 걸어가는 할머니를 밀어 버렸다.

    “아이쿠!”

    민경우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달아났다. 그리고는 정처 없이 한참을 걸었다. 다리가 아파 멈춰 섰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이상하게 아까 왔던 그곳으로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귀신한테 홀린 건지 조금 전 자신이 밀친 할머니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민경우는 덜컥 겁이 났다.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달아나 봤자, 다시 여기로 와 버리면 그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머뭇거리던 그때 그의 눈에 보이는 공중전화박스.

    하는 수 없이 민경우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기사가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도련님. 도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도망쳐 왔는데 결국 그를 불러들였다는 생각에 졌다고 여긴 민경우는 걱정하는 그에게 되려 큰소리를 쳤다.

    “뭐 해? 문 안 열어?”

    그의 악다구에 괜한 걱정을 했다며 중얼거린 한 기사가 문을 열었다. 서둘러 운전석에 앉은 그가 표정을 고치고는 경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잠깐, 잠깐만…….”

    “왜요?”

    조금 전 할머니가 있던 곳을 보니 마침 자기 또래 만한 남자아이가 할머니에게 달려가 안기는 모습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예쁜 건지, 거친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는 할머니의 모습에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민경우의 눈에 들어왔다.

    “출발해.”

    “네, 도련님.”

    차가 출발하고 그들이 눈에서 멀어졌지만 그 두 사람의 모습은 그의 마음 속에 이미 박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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