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외전 2 - 일거양득 (2)
“무슨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해?”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이수현의 매니저 노릇도 겸하고 있었던 김강철은 갑작스러운 예능 출연으로 아무래도 상의할 일이 많았던 탓에 헬스장에 있다는 이수현의 전화에 그리로 향했다.
온몸이 땀에 절어 김이 풀풀 나는 몸으로 여전히 레그 프레스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김강철은 혀를 내둘렀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보 촬영 때문에 슬림하게 빠졌던 허벅지가 근육이 딴딴하게 올라와 쫙 갈라져 있었으니 그동안 얼마나 헬스장에서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야, 너 무슨 국가 대표 선발전 나가냐? 기껏해야 며칠 하는 예능 촬영에 무슨 운동을 이렇게 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몸이 좀 굼뜨는 것 같아서. 그래도 명색이 축구 선수 출신인데 남들이랑 똑같으면 그렇잖아.”
말을 하면서 눈을 빛내는 걸 보니 안 봐도 비디오였다.
이수현이 괜히 유망주가 된 게 아닌 것이 한 번 발동이 걸리면 승부욕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예 그럴 마음이 없을 땐 져 주는 것도 다반사였지만 한번 승부욕이 제대로 일어나면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모델 일에 있어서도 촬영일이 다가오면 물 마시는 것까지 조절하면서 최대한 사진이 잘 나오도록 몸을 만들었으니 브랜드 업계 사람들은 물론 포토그래퍼들까지 그와의 일을 만족했다.
아예 하루 종일 헬스장에서 죽치고 있는 것만 봐도 누군가 자극하는 말을 했던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너도 운동 좀 하는 거 어때?”
“뭐래. 나도 운동은 매일 열심히 하거든.”
“……?”
“숨쉬기 운동.”
“풉!”
자신을 비웃는 이수현을 억지로 끌고 나온 김강철은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본격 촬영이 시작되면 우리 쪽에서 사람을 좀 붙여 줄까 해.”
“며칠 촬영하는 게 전부던데 일을 너무 크게 만드는 거 아냐?”
“그러는 너는 며칠 촬영 때문에 몸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냐?”
“…….”
“됐으니까 내 얘기나 마저 들어. 어쨌든 네가 우리 L’amour의 메인 모델인 건 맞잖아. 그 메인 모델이 케이블이긴 해도 방송에 출연하게 됐는데 회사 차원에서도 홍보에 적극 활용해야지. 너도 출연해 봤으니 알 거 아냐? 촬영할 때 입은 옷, 전부 우리 쪽에서 협찬한 거.”
“새로 운동복 브랜드 런칭했다고 하더니 그거였어? 확실히 소재가 좋긴 하더라.”
“내 말이. 영혼을 갈아 넣어서 만든 옷이라나 뭐라나. 어쨌든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너를 케어해 줄 사람들 몇을 보내 줄 거야. 촬영 스케줄 있을 때면 아침부터 집으로 데려다줄 때까지 풀케어 할 테니까 기대하라고.”
“으, 어쩐지 좀 부담스럽다.”
“그러게 뭐 하러 예능 출연은 한다고 해서는……”
“어째 너는 좀 불만인 거 같다? 왜? 내가 방송 출연해서 네 일이 늘어나니까 싫은 거야?”
“내가 언제?”
“아닌데, 너 그때부터 지금까지 얼굴이 굳어 있잖아.”
“기분 탓이야, 기분 탓. 아무튼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가 알아서 싹 해 줄 테니까, 너는 집에서부터 우리가 골라 준 옷 입고 나오면 돼.”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이수현의 모습에 김강철은 이 프로 계속해도 되겠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아 보인 탓이 컸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혈색이 좋아진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총 4부작으로 제작된 <도장 깨기>.
보통 1회나 2화로 끝나는 파일럿 프로그램과 달리 분량이 많았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프로그램은 손문국 PD의 야망을 그대로 드러낸 결과물이었다.
애초 전국에 있는 조기 축구회와의 대결을 목표로 한 것이었기에 단 4부로 끝날 일은 아니었던 셈. 그는 어떻게든 이 프로그램을 띄워 레귤러 편성을 받는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해서 조기 축구회라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컨셉이었지만 지금까지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스포츠 스타 전태림과 모델계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난 축구 선수 출신 이수현을 앞세워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첫 방송의 날이 밝았다.
* * *
―미친, 운동선수 출신은 뭘 해도 다르네.
―이수현 나올 때 슬로우 걸린 거 봤냐? 완전 CF!
―이거 왜 이렇게 재밌냐?
―뭔가 스포츠 드라마 같다.
―신은 불공평해. 한 사람한테 어떻게 이렇게 재능을 몰빵할 수가 있지?
―다음 주가 마지막 회라니!! 그럼 도장 깨기를 어떻게 해?
―정규 편성이 시급하다.
2퍼센트로 시작한 시청률은 마지막 4부엔 5퍼센트로 마감했으니 케이블 시청률치고는 꽤 잘 나온 편이었다. 거기다 시청자 게시판의 반응도 나름 폭발적이었다.
처음 시청률을 이끌었던 건 단연 전태림과 이수현. 은퇴 후 해설 위원으로 간간이 출연했던 전태림은 물론, 모델로 활약 중인 이수현의 첫 예능 출연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4부에 걸쳐 꾸준히 시청률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축구를 대하는 출연자들의 진심 때문이었다. 선수 출신인 이수현을 제외하면 선수단은 거의 다 축구에 문외한인 사람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스포츠 스타부터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축구 실력은 형편없었다.
거기다 선수 출신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운동에 손을 놓은 이수현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그 결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른 조기 축구회와의 대결도 5 대 0으로 완벽한 참패.
하지만 시청자들은 경기의 내용보다도 축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이들이 서서히 축구에 열정을 가지고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개인적인 실력보다도 팀워크. 경기에 진 것보다도 자신 때문에 팀에 피해를 준 게 아닌가 싶어 눈물을 삼키며 어떻게든 팀에 보탬이되고자 노력하는 출연자들의 진심이 진한 인상을 남겼다. 그 결과 <도장 깨기>는 정규 편성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도장 깨기>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건 역시 이수현이었다. 시청자 게시판에도 그의 지분이 가장 많았다.
특히나 그가 입은 옷, 모자, 신발, 가방 등등 그가 하고 다닌 모든 것들에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당연히 새명 유통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발 빠르게 제품 정보를 제공했으니 협찬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찰떡같은 소화력에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건 당연했다.
영향력 있는 연예인 못지않게, 이수현의 착장은 완판으로 이어졌고, 그 덕에 모델이 된 후 뭔가 도움이 됐다는 생각에 그 역시 뿌듯했다.
그런 그를 손문국 PD가 불렀다.
“수현 씨도 알다시피 우리 <도장 깨기>가 정규 편성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우리 프로에 계속 출연해 주셨으면 해서요.”
처음 그가 출연에 응했던 건 전태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4부작이라 한시적으로 진행된다는 것도 결정하는 데 한몫을 차지했다.
애초 정규 편성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잘나가던 예능 프로도 하루아침에 종영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방송가에서 파일럿 예능이 정규 편성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고정 출연은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한참 생각을 마친 이수현이 입을 열었다.
* * *
송일 그룹에 소속되어 있던 송미디어가 새명 홈쇼핑에 매각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름도 송미디어에서 S&Media로 바뀌었다. 일반 시청자들은 단순히 어제까지 보던 케이블 채널의 회사명이 바뀐 것에 불과했지만 방송가에서는 다르게 느끼고 있었다.
일단 평PD부터 시작해 전무까지 역임한 임장효가 사장을 맡은 것부터 파격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드라마 부분에선 단연 <열세 번째 달>이 화제의 중심이었다. 인기 작가인 송지현은 물론 경우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작품이었다. 거기다 미국의 작가이자 연출가로 유명한 제임스 로이건의 합류로 시청자들의 기대감이 한껏 높아지고 있었다.
자본력으로 공격적인 투자를 앞세운 대기업이 해외 유명 연출가를 섭외해 결국 방송가를 장악하고 지상파를 위협하는 공룡 미디어가 탄생하는 건 아닌가 사람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작품,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바로 <도장 깨기>.
“<도장 깨기>가 각본 없는 드라마로 시청자들에게 소소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축구의 규칙조차 제대로 모르는 오합지졸이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한 스포츠맨으로 거듭나고 있다. 선수들의 성장에 시청자들 역시 감독이나 코치가 된 기분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파일럿부터 시작한 조기 축구회와의 대결에서 전패를 이어 가고 있는 <도장 깨기>팀의 첫승을 기대한다.”
기사를 읽던 김강철은 경우가 흡족해하는 모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기자도 매수했냐?”
“그럴 리가. 요즘 <도장 깨기>가 인기 좋잖아? 그러니까 그 인기에 힘입어 기사도 이렇게 나오는 거지. 처음엔 이 프로가 이렇게 잘될 줄 몰랐는데 아무튼 다행이야.”
하지만 경우의 해명에도 김강철의 미간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수상해.”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
“그렇잖아. 멀쩡하게 잘 지내는 애한테 갑자기 예능 출연을 권하지 않나, 그런데 공교롭게도 출연한 케이블 방송국을 사들이지를 않나?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방송국 인수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이참에 방송국 홍보하려고 친구를 팔아먹은 것 같다, 이 말이지.”
“야, 아무렴 내 얼굴이 그 정도로 두껍겠냐? 사람을 뭘로 보고?”
“뭘로 보긴. 솔직히 요즘 너 하는 짓 보면 재벌가 사람 맞는 거 같거든. 어떻게 지선 누나랑 하는 게 갈수록 비슷해지냐고?”
“크흠, 기분 탓이야, 기분 탓. 어쨌거나 그래도 수현이가 다시 축구 한 건 다행이지 않냐?”
“하긴. 수현이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지난 주말, 오랜만에 모인 술자리에서 이수현은 두 사람이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했으니.
‘뭐? 연예인 축구단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 했는지 그 이유를 잊고 있었더라고.’
의아해하는 두 친구에게 이수현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처음엔 전태림 선수가 너무 멋있어 보여서 그런 선수가 되고 싶단 생각에 축구부에 들어갔는데 내가 진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던 건 축구를 진짜 좋아해서였더라고. 근데 그게 일이 되면서 이유는 사라지고 목표만 남았던 거지. 남들이 알아주는 유명한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근데?’
‘이뤄야 할 목표가 없으니까 온전히 축구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더라고. 솔직히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축구 해 본 적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괜찮겠어?’
‘당연하지.’
활짝 웃는 이수현의 모습에 덩달아 경우와 김강철의 긴장도 풀려 버리고 말았다.
“수현이 그렇게 웃는 거 참 오랜만인 것 같더라.”
“거봐, 그 프로 나가길 잘했지?”
“얼씨구, 너는 꼭 수현이가 자기도 모르는 속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당연하지. 그래서 너랑 수현이한테 얻어맞을 각오 하고 이야기한 거 아냐.”
“…….”
“어쨌든 수현이가 축구 할 때 멋있어 보이는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
사실 김강철은 일부러 축구를 피하는 이수현 탓에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마음의 상처는 다 치유되었는데도 아직 그를 환자 취급한 건 아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면 역시나 이수현을 가장 잘 이해하는 건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이렇게 컸냐?”
“뭐래. 누가 들으면 수현이가 네 자식인 줄 알겠다. 그리고 키는 원래 너보다 수현이가 더 컸거든.”
자기 말을 하는 줄도 모르는 경우를 보며 김강철은 피식 웃었다. 이럴 때 보면 헛똑똑이였으니.
“우리 다음에 촬영에 따라갈까? 요즘 물올라서 첫 승 할 것 같던데?”
“그럴 시간이 되고?”
“뭐래, 나 사장인 거 잊었어?”
“니예, 니예. 알죠. 잘 알고 있습니다요.”
그렇게 두 사람이 참석한 촬영에서 대전팀과 경기를 하게 된 <도장 깨기> 팀은 이수현이 내리 두 골을 넣으며 드디어 첫 승을 달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