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45화 (완) (245/250)
  • #245. 새로운 삶의 시작 (7)

    오랜만에 한잔하고 들어온 민 회장은 밤이 늦도록 거실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 윤정숙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싸늘하게 돌아보는 눈빛이 매섭기 그지 없었다.

    “여, 여보. 아직 안 잤어?”

    “당신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자요?”

    “늦을 거니까 먼저 자라고 했더니만…….”

    “그래서 나보고 먼저 자라고 한 거예요? 당신, 이렇게 늦게 들어오려고? 요즘 식단 조절도 잘한다 싶더니 다시 원상복귀예요?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예요?”

    “많이 마시지 않았어. 그냥 조금 마신 것뿐이야.”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죠. 아직은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때인 거 잊었어요? 그러다 큰일 나면 어쩌려고요?”

    “큰일 나면 안 되지. 당신이 이렇게 챙겨 주는데 큰일 날 일이 뭐 있겠어. 안 그래? 술 한 잔 먹었다고 그렇게 큰일 나진 않아.”

    “하여간 입만 살아서는 말은 참 잘하네요.”

    잔소리하는 아내의 모습에 민 회장이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어요?”

    “그러게. 당신한테 잔소리 들으며 혼나고 있는데, 그게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

    그거야 걱정하는 마음이 있어서 잔소리가 늘어 간다는 것을 두 사람은 모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윤정숙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앞으론 웬만하면 술은 입에 대지 말아요. 알았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도 조심하고 있으니 당신까지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서 요즘 일은 지선이한테 거의 맡기고 있잖아.”

    “예준이 챙기느라 바쁜 애한테 너무 떠미는 거 아니에요?”

    “이제 예준이도 많이 건강해졌잖아. 여차하면 안 서방 들어앉히면 되지. 안 그래?”

    “하여간 자기 딸밖에 몰라. 사돈댁에서 들으면 퍽이나 좋아하시겠네요.”

    “그만큼 새명엔 지선이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야.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지선이가 일에 있어서 만큼은 똑부러지잖아.”

    “하여간 못 말려.”

    “그나저나 막내는 언제 들어오는 거야? 드라마 끝난 지가 언젠데 왜 아직도 안 들어와?”

    “무슨 시상식 때문에 그렇다잖아요.”

    “아, 그 에미상인가, 그거?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요.”

    “그럼 그거 끝나면 오려나?”

    “새아가 예정일이 얼마 안 남아서 거기서 애를 낳고 들어올 생각인가 봐요.”

    “손주녀석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군. 이참에 우리가 미국으로 가는 건 어때? 애 낳으면 얼굴도 보고 겸사겸사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말이야.”

    “좀 느긋하게 기다려요. 어련히 때 되면 올까. 괜히 사장어른도 계시는데 우리까지 가면 불편하죠.”

    “그럴까? 그나저나 우리 애 때문에 사장어른까지 너무 고생이군.”

    “그러게요.”

    이야기가 거기까지 미치자 두 사람은 한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며느리에겐 친정 식구가 더 편할 것 같아 직접 가 보고 싶은 걸 참았으니, 그 탓에 연로한 손주옥이 고생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많아진 탓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각과 달리 손주옥은 직접 손녀를 돌볼 수 있어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 * *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와 로스엔젤레스 클리퍼스의 홈구인장 스테이플스 센터에 레드 카펫이 깔렸다.

    수많은 배우와 방송 관계자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가운데 레드 카펫으로 들어가기 위한 차 안에서 경우는 초조하게 앉아 있었다. 멋들어지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그가 의외로 초조해하는 모습에 데이비드 헨더슨이 웃으며 물었다.

    “시상식이 처음도 아닐 텐데 긴장되는 모양입니다?”

    “실은 지금 아내가 진통이 시작돼서 병원으로 갔다는 연락을 받아서요.”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예정일이 얼마 안 남았다고 그랬죠. 첫아입니까?”

    “네.”

    “그럼 걱정 꽤나 되겠군요.”

    “아마 애프터 파티에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시상식 끝나고 곧장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했거든요. 여기 오기 전에 진통이 왔다면 아마 참석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들이라고 했죠? 굿보이네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차는 어느새 레드 카펫 앞에 멈춰 섰다. 이제 밖으로 나가야 할 차례. 심호흡을 하자 문이 열렸고 경우가 먼저 내렸다. 레드 카펫에 발을 딛고 서자 순간 경우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아득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경우는 그 순간에도 이성을 잃지 않았고 자신에게 집중된 스포트라이트에 미소를 잃지 않으며 여유롭게 손까지 흔들었다.

    뒤이어 내린 데이비드 헨더슨은 그런 여유로운 경우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내가 걱정된다며 긴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쇼맨십에 능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으니 오늘 스테이플스 센터의 주인공은 단연 경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은 센터 안으로 입성했다.

    시상식 안에서 만난 수많은 배우들은 물론 방송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눈 끝에 경우는 정해진 자리에 앉았으니 잠시 후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막상 시상식이 시작되자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진 덕에 조금씩 시상식을 즐기고 있었다.

    다만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휴대폰을 자꾸 꺼내 봤으니 혹시나 연락이 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병원에 도착했다는 문자 말고는 별다른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후로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언제 끝이 나나 싶은 그때, 마침내 이 후보에 오른 작품상 시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붉은 드레스가 우아하게 어울리는 배우 앨래나 리즈가 단상 앞에 섰다.

    70~80년대를 풍미한 대표적인 할리우드 스타인 그녀는 역시나 영화배우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72년 데뷔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은 물론 에미상 여우주연상도 수차례 수상한 전설적인 여배우였다.

    특히나 흑인 인권 운동, 반전 운동 등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쏟은 것으로 유명했으니 에미상 작품상의 시상자로 나온 건 꽤나 뜻깊은 일이었다.

    최근엔 기후 문제에도 관심이 깊은 그녀가 환경을 위한 메시지를 짧게 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상의 순간, 그녀는 들고 있던 카드의 열었다. 잠시 카드 안에 적힌 내용을 읽은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어떤 작품이 상을 받을지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그때,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The Emmy goes to…… !”

    마침내 작품상으로 이 호명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함께 참석한 주연 배우들의 축하를 받으며 이 드라마를 만든 경우와 데이비드 헨더슨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비극적인 삶을 끝내고, 민경우로 다시 한번 삶이 주어졌을 때 그는 그저 원하는 드라마를 자신의 이름으로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남이 뭐라하든,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삶이 아닌 오직 자신 만을 위한 삶을 살길 바랐던 그는 자신이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이렇게 인정받는 순간이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감격에 겨운 경우는 데이비스 헨더슨 다음으로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우는 천천히 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제게 제안을 준 데이비드 헨더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덕분에 지구 반대편, 전혀 다른 환경에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열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드라마를 만드는 시간은 어떻게 보면 그동안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가끔 제게 이 한국 드라만지, 미국 드라만지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이야기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인종, 국적, 성별, 그 어떤 것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저처럼 편견을 뛰어넘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더 많은 콘텐츠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거기까지 말을 마침 경우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영어로 했던 것과 달리 마지막은 한국말로 했으니.

    “고국에서 지켜보고 계실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I appreciate it!”

    고개를 숙이자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데이비드 헨더슨과 함께 단상 아래로 내려간 경우가 다급하게 전화를 확인했다.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던 그때 진동이 울린 탓이었다.

    지금까지 분만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내가 아기를 낳기 위해 분만실로 들어갔다는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저,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경우의 다급한 표정에 상황을 파악한 데이비드 헨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아요.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서 가 봐요.”

    “고맙습니다.”

    “천만해요. 그리고 축하해요.”

    “데이비드도요.”

    돌아서 달려가는 그의 모습에 데이비드 헨더슨이 미소 지었다. 그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은 본 탓이었다. 축복이 그에게 함께 하길 기도했다.

    시상식장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탄 경우는 출발하는 차 안에서 간단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차는 재빨리 LA공항으로 달려갔다. 비행기를 타고도 다시 6시간의 걸친 비행을 하고서야 겨우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민 서방, 이제 오나?”

    아내가 입원해 있던 병실에 들어가자 손주옥 여사가 그를 맞아 주었다. 잠들어 있는 아내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고생했을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아내의 옆쪽 아기 침대에 막 태어난 아이가 잠들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경우는 자기도 모르게 그곳으로 이끌리듯 다가갔다.

    “한 시간 전쯤 낳았어. 손가락, 발가락 다 5개씩이고 건강하다네.”

    양수에 퉁퉁 불어 쭈글쭈글한 모습이 외계인처럼 보이긴 했으나 어쩐지 경우는 감격스러웠다. 쭈글쭈글한 와중에도 어딘가 자신을 닮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네를 쏙 닮았어. 그렇지?”

    “네. 정말 그러네요.”

    조심스러워 차마 손도 대보지 못한 경우가 머뭇거리자 손주옥이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경우에게 내밀었으니.

    “괜찮으니까 한 번 안아 봐.”

    “제, 제가요?”

    그러자 손주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우는 손주옥이 내민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작고 가벼웠다. 조금만 세게 안아도 부서질 것 같았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뜻깊은 날 태어난 소중한 자신의 아이였다.

    경우는 손주옥 여사를 보며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어딘가에서 할머니가 자신을 보고 있지는 않을까, 그랬다면 기뻐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아이에게 할머니가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어 줬던 것만큼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연말인 탓에 연말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로 공항은 북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기가 오래 비행을 견딜까 싶어 퇴원을 한 뒤로도 미국에서 석 달을 더 지냈던 경우는 마침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자리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며 경우는 감회에 젖어 있었다.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2021년, 그가 이은석으로 살다 죽음을 맞은 때가 2021년이었다. 그동안은 미리 살아 본 덕분에 앞날을 예측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 시작될 시간은 그조차도 겪어 보지 않은 새로운 시간들이었다.

    물론 그가 미래를 알고 있었던 덕분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해서 경우는 알 수 없는 미래가 두렵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좌절을 겪을 수도 있을 테지만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자신을 닮은 아들은 물론 친구와 가족들이 있었다. 처음 이곳에 민경우로 깨어났을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지금껏 해 왔던 대로 앞으로도 자신을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비행기는 한국에 도착했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경우는 새롭게 느껴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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