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44화 (244/250)
  • #244. 새로운 삶의 시작 (6)

    연말을 맞아 각종 모임이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민준호는 자신도 이제 슬슬 외부 활동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결혼 문제로 칩거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쯤이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졌을 테고, 또 아니라 해도 대놓고 뭐라 하진 않을 거란 생각도 있었다.

    민정현이 아내의 설득에 조금씩 마음 정리를 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그는 잡아 주는 사람이 없는 탓에 여전히 새명 그룹을 포기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기 위해 다각도로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꺼렸던 모임에 나가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은 그저 자신만의 생각일 뿐이었으니.

    “이게 누구야, 민준호 아냐?”

    인도로 가기 전 자주 어울렸던 정하 중공업의 김오준이 알은체를 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봤다. 놀기엔 좋은 녀석들이었지만 약점을 들켜서는 안 되는 놈들이기도 했다. 상대의 약점을 발견하면 집요하게 파고들 정도로 짓궂은 놈들이었다.

    그들은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듯, 때마침 던져진 사냥감에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었다.

    “이야, 민준호. 얼굴 좋네.”

    “하여간 뻔뻔한 새끼, 나 같으면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니지.”

    “야, 인도에 너 자식도 있다며? 언제 데리고 올 거냐? 신고식 한 번 해야지.”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기는. 아닌데 그렇게 소문이 나냐? 암만 그래도 네 새끼는 책임을 져라.”

    같이 놀 때는 쿵짝이 잘 맞았지만 막상 당하는 포지션이 되자 이런 고역이 없었다. 그만하라는 데도 계속 붙잡고 늘어지는데 오늘 일을 두고두고 안줏거리로 삼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나저나 네 동생 요즘 잘나가더라. 드라마 완전 대박 났다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네 동생이 한다는 그 회사 주식 좀 살 걸 그랬어.”

    “그래 봤자 엔터주 얼마나 한다고.”

    “이 자식이 뭘 모르네. 그냥 엔터주가 아니잖아. 한미 합작 드라마? 안 그래도 주식이 평탄했는데 그거 때문에 수직 상승했잖아. 모르긴 몰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재미 좀 봤을걸? 웬만한 대기업 계열사보다 괜찮더라니까.”

    “그래? 누나는 새명 그룹 후계자에 동생은 알아주는 제작사 사장, 민준호 빼놓고 다들 잘나가네.”

    “누가 후계자래?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거든.”

    “아니기는. 그 정도면 끝난 거지 뭐. 솔직히 네가 후계자 될 거라고 뻐기고 다닐 때도 있었는데 이제 완전 끈 떨어진 연 신세 아니냐? 사람 일 어떻게 될 줄 모른다더니, 새명의 황태자가 이 꼴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차라리 어이없는 헛소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나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그런 헛소문은 가라앉을 테니까. 하지만 회사 일에 대해서만큼은 냉정해지기 쉽지 않았으니 민준호는 끓어오르는 속을 다스려야 했다. 만약 여기서 흥분하면 또 뭐라 뒷이야기가 많아질 게 뻔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시달린 후, 그에 대한 관심도 점점 꺼져 갈 무렵, 민준호는 잠시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무리에서 나왔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때마침 그의 앞으로 쟁반 가득 와인잔을 든 웨이터가 지나가고 있었다. 민준호는 그 중 한 잔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와인을 들이켰으니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쁜 놈들.

    속으로 한참을 투덜대던 바로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으니 최영윤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으니 언제라도 한 번은 만나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게 지금일 거라고 예상 못 했다. 하필이면 방금 전 사람들의 놀림을 잔뜩 받았던 데다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자 민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당장이라도 다가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결국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민준호의 모습에 최영윤은 얼어붙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란 생각에 버텼다. 물론 이곳에 오지 말걸 하는 후회가 가장 컸다. 그동안 민준호를 모임에서 보지 못했다는 친구들의 말에 어렵사리 나간 거였는데 하필이면 그가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점점 다가오는 모습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너무 조용해 슬며시 눈을 떠보니 어느새 민준호가 그녀를 스쳐 저만치 가 버렸다. 무슨 소리라도 들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그는 아는 체도 없이 가 버렸다. 잠시 멀어지던 민준호의 뒷모습을 보던 최영윤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돌아섰다.

    한참 걷던 민준호가 마침내 멈춰 섰다. 슬쩍 돌아보니 최영윤이 저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솔직히 미안한 건 아니었다. 기억나지도 않은 일로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몇 번이나 죽으려고 약까지 먹었다는 거, 형 알아?’

    그녀에게 다가간 순간 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느새 꽉 쥐었던 그의 주먹은 힘이 풀려 있었다.

    자신 때문에 죽으려고 약까지 먹었다는 말이 자꾸만 신경쓰였다. 거기다 여기서 무슨 짓을 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어쨌든 다시는 이런 식으로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민준호 역시 돌아섰다.

    * * *

    허름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거실 소파에 앉은 조쉬 길리엄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함께 TV를 보며 드라마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방금 강민이 나온 건물 지하실 앞에 하필이면 스미스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머, 그럼 스미스가 강민을 수상한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거 아냐?”

    “그럴 것 같아요.”

    절반이 한국말이라 자막이 필요한 드라마였지만 조쉬의 엄마처럼 자막이 무용지물인 사람도 분명 존재했다. 해서 경우는 자막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더빙판을 함께 내보내자고 의견을 냈었다.

    한국의 지상파 방송에서 해외 드라마를 방송할 땐 더빙을 하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출연 배우의 원래 목소리로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해서 인기 드라마일 경우엔 자막 버전과 더빙 버전 두 가지를 모두를 제공했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경우는 미국에서도 이 같은 서비스를 해 보기로 한 거였다. 애초 2가지 버전을 송출하기만 하면 TV 설정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선택이 가능한 비교적 쉬운 일인 덕분이었다.

    그 덕에 조쉬의 엄마도 딱히 조쉬의 도움 없이 드라마를 즐길 수 있었지만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던 만큼 그녀는 드라마 못지않게 아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다다다 이야기를 하던 아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생각에 조쉬 엄마가 아들을 불렀다.

    “조쉬? 왜 그래? 무슨 일 있니?”

    “아니에요, 엄마. 갑자기 생각난 게 좀 있어서요.”

    사각사각. 연습장에 무언가를 쓰고 있는 소리가 들리자 조쉬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지금 아들이 악상이 떠올라 적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한 번씩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면 멋진 곡을 만들어 냈으니 그녀는 아들이 자기 할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둔 채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조쉬 길리엄은 어린 나이에 우연히 경우를 만나고 그의 앞에서 음악적 천재성을 발휘한 덕분에 <뷰티풀 라이프> OST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뒤 여러 드라마와 영화의 OST는 물론 개인 앨범까지 내 사람들에게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자신에게 찾아온 이런 변화가 경우 덕분이라 생각한 그는 그에 대한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에 대한 홍보를 이어 나갔고, 급기야 곡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며칠 후, 조쉬 길리엄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동영상 파일이 하나 올라왔으니 서정적인 느낌의 기타 연주곡이었다. 평소 그가 하던 밝은 색깔의 음악과 달리 무거운 분위기의 연주에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곡에 대해 묻자 조쉬 길리엄은 곡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을 올렸다.

    이번 곡은 그가 을 보고 주인공 스미스의 심정을 헤아려 쓴 곡이었으니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못하고 스스로 이방인처럼 느끼는 장면을 보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순간 자신 역시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며 그때의 감정을 떠올려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덕분에 을 보지 않은 사람들도 드라마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연주 동영상을 경우 또한 보고 있었다.

    “곡 좋은데요?”

    휴대폰을 통해 들려오는 연주 소리에 데이비드 헨더슨이 반응했다.

    “아, 제가 아는 친구가 스미스를 위해 테마곡을 만들어봤다고 해서요. 제목이 <이방인>이랍니다.”

    “스미스의 처지와 딱 맞는군요. 가만…… 이 기타 연주, 혹시 조쉬 길리엄 아닙니까?”

    “인기가 많아졌다고 하더니 연주만 듣고도 알아차릴 정도인 줄은 몰랐네요.”

    “드라마나 영화 관계자라면 당연히 모를 수가 없죠, 조쉬는. 그나저나 경우는 한국 사람인데도 나보다 미국 사람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럴 리가요.”

    “어쨌든 조쉬 길리엄에게 좋은 음악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이번 OST도 그에게 맡길 걸 그랬습니다.”

    “아마 스케줄 때문에 어려웠을걸요. 밀린 작업이 많다고 들었거든요.”

    “그럼 더 고마워해야겠네요. 그런 와중에 스미스를 위한 곡을 만들어 줬으니까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럼 또 시작해 볼까요?”

    드라마 촬영을 할 때보다도 오히려 방송이 시작된 지금 경우는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드라마를 동시에 시작하는 건 많은 장점이 있었으나 한 가지 단점도 존재했으니 바로 양국의 스케줄을 소화해야 한다는 거였다.

    처음엔 미국에서 드라마 홍보를 시작했지만 해가 지나고 드라마의 인기가 갈수록 더해지면서 양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거기다 유명 프로그램에서 섭외까지 들어오자 경우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말처럼 웬만하면 참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드라마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찾는 곳이 너무 많아 정말이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몸은 피곤했으나 이 모든 게 드라마의 인기 덕분이었으니 경우는 피곤한 줄도 몰랐다. 하지만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를 홀로 두는 게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보낼 수도 없는 게, 강희주가 아직 한 학기가 남아 있는 탓이었다.

    해서 경우는 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손주옥 여사는 집안일을 봐주는 예산댁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덕분에 마음 편히 스케줄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다른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바로 옆에서 전화를 받던 데이비드 헨더슨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해 있었으니 무슨 일이 터진 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었다.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예.”

    심각한 표정의 데이비드 헨더슨의 얼굴에 경우 역시 덩달아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안 좋은 일입니까? 곤란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그게…… 이 에미상 후보에 오를지도 모르겠다는 소식입니다.”

    말을 하고는 짓궂게 웃어 보이는 데이비드 헨더슨의 모습에 경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예?”

    “실은 그쪽 심사 위원 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한창 작품 선정 중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드라마를 본 사람들 반응이 꽤 괜찮았다고 합니다. 이러다 진짜 상이라도 받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 경우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영화엔 오스카상이 있다면 방송엔 에미상이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은상 예술 대상에 견줄 정도로 방송에 관련된 권위 있는 시상식이 바로 에미상이었다.

    오스카상이 유명하기는 했지만 대체 가능한 상이 많았던 반면 에미상은 대체할 만한 상이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해 시상식에선 유색 인종이 수상한 적이 아예 없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아직 확실해진 건 아니었지만 그런 곳에서 한국 배우가 한국어로 연기하는 장면이 절반가량 차지하는 드라마가 긍정적으로 비췄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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