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43화 (243/250)

#243. 새로운 삶의 시작 (5)

주말, 예전 같았으면 평일에 바쁜 대신 가족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였지만 민정현은 아침부터 계속 서재에 틀어박힌 채 심각한 얼굴로 전화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그게 말이 됩니까?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분명 뭔가가 있을 겁니다. 비자금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티끌 만한 거라도 좋으니까 당장 찾아내세요, 당장!”

전화를 끊은 민정현이 의자 깊숙이 몸을 뉘었다. 도대체 맘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주변엔 제대로 일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아직까지 동생의 약점 하나 찾아내지 못한 거겠지.

동생인 민지선은 꽤 오랫동안 새명 유통을 운영해 오면서 적자인 영업이익을 흑자로 돌려놓은 걸로 유명했다. 그러니 그렇게 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법에 어긋나는 일도 했을 거라 믿었다. 그게 알려지면 아무리 새명 물산의 부사장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도 밀어내는 건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티끌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손을 쓴 건지, 그녀는 주변이 깨끗해도 너무 깨끗했다. 이대로 반격도 못 해 보고 당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은 어떻게 해도 동생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옭아매고 있었다.

윤 부장을 닦달하기는 했으나 이쯤 되면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

마침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강한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렸다. 그의 기분처럼 날씨 또한 엉망이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아내 배예원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걱정 가득한 아내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를 띤 그가 아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을 잡은 그녀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기운이 하나 없는 그가 아내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잠시 충전이라도 하는 듯, 그녀에게 기댄 채 그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아내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내의 손길에 민정현은 화가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전화는 다 했어?”

“응.”

“그럼 나와서 밥 먹어. 당신 아침도 안 먹었잖아.”

“조금만. 조금만 이러고 있자.”

“…….”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문 밖까지 들리던 남편의 목소리에 잠시 생각에 잠긴 배예원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 해?”

“당신…… 이제 그만 해.”

아내의 말에 몸을 일으킨 그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도 알고 있잖아.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거.”

그동안 아내에게 회사 일은 이야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도 듣는 귀가 있었다. 심지어 회사 내부에 장인어른이 심어 놓은 사람이 있는 걸로 아는데, 아무것도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자신을 위해 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이런 말을 하니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듯 민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그랬잖아. 우리는 부모님이 정해 주신 대로 우리한테 주어진 삶을 살아왔다고. 당신은 새명 그룹의 후계자가 될 나에게 시집왔고, 다른 삶은 없다고 했던 건 바로 당신이야.”

“그래, 알아. 내가 한 말이니까 내가 똑똑히 기억해.”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당신이 너무 힘들어 보이니까.”

“나 힘들지 않아. 그리고 원래 내 자리였어. 내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당신 변했어.”

아내의 갑작스러운 말에 그는 갑자기 멍해졌다.

“뭐?”

“당신…… 예전하고 달라진 거 알아? 다정다감하고 잘 웃고 호탕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뭐에 쫓기는 사람 마냥 불안해하고 늘 굳어 있고…… 예전하곤 달라졌다고.”

“여보―.”

“이럴 바에야 차라리 새명을 포기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그만…… 포기하자.”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포기하란 말을 할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럼 당신이 힘들어하는 걸 나보고 계속 지켜만 보라는 소리야? 당신이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거, 솔직히 그렇게 살아온 것도 있지만 우리 부모님이나 나 때문에 더 그런 것도 있잖아. 아냐?”

“…….”

그랬다. 금지옥엽 막내딸을 자신의 짝으로 맺어준 것도 그가 새명 그룹의 후계자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자신에겐 아내와 딸밖엔 없는데 혹시라도 버림받는 건 아닌가 싶은 마음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더욱 새명 그룹에 집착하고 있었다.

새명 그룹이 없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그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난…… 예전의 당신이 좋았어. 처음엔 새명 그룹 때문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냐. 지금은 그냥…… 당신의 있는 그대로가 좋아. 그러니까 우리…… 너무 애쓰지 말자. 응?”

“하지만 장인어른이 아시면―.”

“더는 아빠 생각도 하지 말자. 우리 삶이잖아. 지금까지는 부모님이 정해 주신 대로 살아왔지만 더는 그러지 말자, 여보. 애도 있는데 언제까지 부모 품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서 살 수 없잖아.”

“당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응. 힘들어하는 당신을 보느니 차라리 새명을 포기할래. 나한텐 당신이 더 중요해.”

무능력한 자신 탓에 절망감을 느끼던 때도 많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혼자 땅을 파고 있었는데 혼자가 아니라 말해 주는 아내 덕에 민정현은 그녀를 볼 낯이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러자 아내가 다가와 그를 안아 주었다. 자신의 등을 다독이는 아내의 손길에 민정현은 아내를 꼭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 * *

어느새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나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캐롤송이 울려 퍼졌다. 힌 해를 마감하며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뜻깊은 시간이었지만 오연옥은 딱히 그럴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오래 전 가정을 정리해 버린 그녀는 찾아갈 곳도 찾아올 사람도 없는 탓이었다. 그래서 연말은 더욱 쓸쓸했으니 어서 빨리 이 시기가 지나 버렸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이런 날 집에 있지 작업실엔 뭐하러 있어요?”

송지현이었다.

“그러는 송 작가야말로 어쩐일인데요? 송 작가도 작업실에 출근했던 거 아니에요?”

“어라? 딱 들켰네요.”

송지현이 씩 웃자 오연옥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안으로 들였다.

여의도에 작업실이 있었던 탓에 우연히 호프집에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침 서로의 작업실이 멀지 않다는 걸 안 이후 서로 작업실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친해져 있었다.

“솔직히 크리스마스가 별건가? 그냥 예수님 탄생 기념일이잖아요. 왜 예수님 생일에 자기들이 촛불 불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게요. 어제랑 다를 거 없는 똑같은 날일 뿐인데 말이죠.”

“내 말이요. 작가님은 역시 내 마음을 알아줄 것 같아서 왔죠. 마침 작업실에 얼마 전에 선물 받은 좋은 와인이 있었거든요.”

“잠깐 기다려요. 냉장고에 치즈 있을 테니까 꺼내 올게요.”

어느새 한 상 차려 놓은 두 사람은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일 프로덕션은 어때요? 난 솔직히 작가님이 거기 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정명도 그 인간, 되게 깐깐하잖아요.”

“참, 초창기에 같이 일하셨다고 했죠?”

“예. 남의 대본 들고 와서는 빨간펜으로 죽죽 그으면서 이건 안 된다, 이거 예산이 얼마나 나오는지 아느냐, 뭐든 돈으로 따지는데…… 솔직히 그건 사업가의 수완이지 드라마는 영…….”

“그렇다면 내가 운이 좋았네요. 솔직히 정 대표하고 얼굴 마주할 새도 없거든요. 협회 일이 바빠서.”

“참, 협회장 맡았다고 했죠?”

“네. 그래서 큰 결정은 정 대표가 하긴 하지만 실무는 한 이사가 다 하는 편이라 같이 일해 본 적은 없네요.”

“차라리 잘 됐어요. 그 편이 낫죠. 근데 난 작가님이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로 오는 줄 알았는데…….”

“아예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근데요?”

“음. 나랑 안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보기보다 줏대도 없고, 다른 사람한테 영향을 잘 받는 편이거든요. 특히 상대가 나보다 잘났다고 느꼈을 땐 더욱. 그래서 민 작가한테 휘둘리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하긴, 그럴 수 있죠. 나도 그런 생각하거든요. 분명 나보다 한참 어리고 작가 생활도 내가 훨씬 선밴데 가끔 선배님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근데 그 선배가 너무 트랜디해서 나도 모르는 요즘 애들 문화도 섭렵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죠.”

송지현의 말에 오연옥이 피식 웃었다.

“참, 요즘 그쪽 드라마 때문에 난리도 아니던데.”

“아, 맞다. 오늘이 첫 방송이에요.”

“그래요? 그나저나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뭔데요?”

“그 드라마…… 한국 드라마에요, 미국드라마에요?”

“예?”

“그렇잖아요. 미국에서도 촬영하고 한국에서도 촬영하고 대본도 같이 쓰고 첫방송도 같은 날짜에 하면―.”

“같은 날짜긴 해도 한국 시간이 빠르니까 한국이 먼저 시작할 걸요.”

“그래요? 그렇다면 더 헷갈리는데요?”

“그래서 민 작가는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한미 합작 드라마.”

생각보다 어이없는 대답에 오연옥은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문현답이네요.”

“그게 뭐 중요하겠어요? 시간도 다 된 거 같은데 같이 봐요. 솔직히 회사 내부에서 시사회니 뭐니 했는데 난 안 봤거든요. 뭐니 뭐니 해도 드라마는 집에서 이렇게 TV로 보는 게 제 맛이니까.”

“그렇죠.”

마침 TV를 켜니 의 오프닝이 시작하고 있었다. 광고가 나올 거란 예상과 달리 로켓이 발사되기 전 countdown을 외치는 것처럼 화면 속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사이 보이는 의문의 컷들…….

마침내 0에 이르자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첫 장면부터 대규모 폭발씬이었으니 압도하는 시작에 두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거 드라마 맞죠? 우리가 지금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를 보고 있는 거 아니죠?”

“그러게요.”

어안이 벙벙해진 두 사람은 거의 영화에 버금가는 드라마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마치 2시간짜리 영화를 한 시간으로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빠른 전개는 물론이고 그러면서 흡입력 있는 전개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한편으론 내내 이런 전개면 버겁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완급 조절이 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한 건 두 사람 만은 아니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난 후 인터넷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으니 게시판은 아예 접속자가 너무 많아 접속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바람에 소식이 미국까지 전해졌고 왜 한국에서 먼저 방송을 하느냐는 말도 안 되는 투정이 나올 정도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12시간 후 미국에서도 첫 방송이 시작되었다.

마침 미국에 머물고 있는 경우는 아내와 함께 첫 방송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한국에서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 감상을 문자로 보내온 탓에 일일이 확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다른 드라마보다 배는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든 드라마가 좋은 반응을 얻자 그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걱정했던 부분도 많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드라마가 잘 나온 것 같아 그 역시 내심 뿌듯했다. 그는 곁에서 함께 본 아내의 반응이 가장 궁금했으니.

“드라마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솔직히 말해서……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의외의 반응에 경우가 놀랐다.

“아니, 왜요? 생각보다 재미없었어요?”

“그게 아니라…… 경우 씨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요. 내내 그 생각하느라 집중을 못 해서……”

어제 결혼기념일도 바빠서 대충 보낸 탓에 토라진 건 아닌가 싶어 경우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때 강희주가 수줍게 조그만 막대를 내밀었으니 경우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임신 테스트기.

“나, 아무래도 임신한 거 같아요.”

“저, 정말이요? 정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경우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 번도 아이를 가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을 하긴 했지만 그게 당연한 거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자신을 닮은 자식이 생겨난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벅찬 마음을 느끼게 했으니 경우는 아내를 번쩍 안아들고 한 바퀴를 빙 돌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생각했던 것보다 기뻐하는 경우의 모습에 강희주도 다행이라 여겼다. 아까부터 두 사람의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지만 이미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진 두 사람의 귀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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