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42화 (242/250)
  • #242. 새로운 삶의 시작 (4)

    촬영은 어느새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날도 촬영을 마친 경우가 촬영본을 확인하기 위해 막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어쩐지 사무실 안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게 어수선했다. 무리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들 중 몇은 평소와 달리 경우의 등장에 눈치를 보며 뿔뿔이 흩어졌으니, 경우는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 같이 촬영장에 나갔다가 사무실로 돌아온 모기범이 무리에 끼어 있던 제작부 신입에게 다가갔다. 입을 여는 대신, 옆구리를 찌르며 실토하라고 압박하자, 역시나 눈치를 보던 신입이 조심스레 모기범에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던 모기범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진짜야?”

    모기범의 물음에 신입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신입마저 제작부로 돌아가 버리자 한숨을 내쉰 모기범이 경우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답니까? 오늘따라 분위기가 영 그런데요?”

    “그게…….”

    살짝 머뭇거리던 모기범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이경표 부장님이 지금 검찰청에 있답니다. 자수를 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연락이 왔다나 봐요.”

    이경표 부장이라면 경우가 처음 스튜디오 글로리의 대표를 맡게 되었을 때 누나 민지선이 보내 준 새명 출신의 회계사였다. 분명 회사 초기엔 그의 도움으로 금전적인 문제를 정리할 수 있어 회사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 모르게 이중장부를 사용해 횡령하고 있었으니.

    하필이면 그때 형인 민준호의 간계에 스튜디오 글로리가 세무조사를 받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경표의 횡령 사실이 드러났다. 그 탓에 스튜디오 글로리는 탈세분과 가산세까지 내야 하는 상황이라 여차하면 회사의 문을 닫을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한식구였는데 믿음을 저버린 그의 행동에 오래 같이 일했던 사람들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막상 자수를 했다고 하니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는 노릇.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어쨌든 일이 터지기 직전, 작정하고 해외로 도피한 탓에 그를 잡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그가 자수를 했다는 사실이 경우는 놀랍기만 했다.

    결국 그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경우는 검찰청으로 향했다.

    * * *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에 깎지 않은 수염, 까칠해진 얼굴까지…… 그냥 길에서 마주쳤다면 노숙자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이경표는 달라져 있었다. 오랜 도피 생활에 그의 건강이 염려될 정도였다.

    다시 만나게 되면 해 줄 말이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정이 무서운 거라고 회사에 안 좋은 일을 한 그였는데도 이런 모습으로 마주하자 미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요.”

    첫마디 말부터 자신을 걱정하는 경우의 모습에 이경표는 자기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 원망 안 하셨습니까? 어디 가서 벼락이라도 맞고 죽으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실은 이세길 부장님 통해서 이 부장님 사정을 들었거든요.”

    자식이 ADHD 판정을 받은 후, 학교생활을 이어 가지 못할 정도로 적응이 힘들다고 들었다. 그러니 외국으로 떠날 수밖에.

    어쨌든 그런 자신을 아직도 사람처럼 대해 주는 경우의 모습에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처음엔 양심 같은 거 버릴 생각이었습니다. 나만 그러는 것도 아닌데, 남들도 그러는데, 나 하나쯤 그런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나 하나 죽을 놈 되면, 그래도 내 가족들은 더 이상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살 수 있겠구나 싶었거든요.”

    이경표의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아 경우는 생수 뚜껑을 따 그에게 건넸다. 수갑을 찬 그가 생수를 받아 목을 축였다.

    “그런데 작가님, 참 대단하시더라고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혼자 도피 생활을 하느라 여기저기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숨어 다녔는데도 가는 곳마다 계시더라고요.”

    경우가 쓴 드라마의 인기가 다른 나라에서도 높아지면서 그의 행보에 관심을 쏟는 이들이 많아졌다. 특히나 미국의 유명한 감독 데이비드 헨더슨과 드라마를 같이 한다니 그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 리 없었다. 발 빠른 곳에서는 아직 제작을 마치기도 전이었지만 판권을 사 방송할 준비까지 마친 곳도 여럿이었다.

    “차라리 안 봤다면 모를까, 어디에 있어도 작가님 소식이 들리니 도저히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못 견디겠더라고요.”

    “혼자 도피 생활을 하셨으면 가족들하고는 연락이 되기는 한 겁니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겠죠. 사실 그 일이 있고 난 직후 아내랑 이혼을 했거든요. 아내한테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애 때문에 힘든 아내한테 더 큰 짐을 지게 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바람이 났다고 거짓말했습니다. 그래야 이혼해 줄 것 같아서요.”

    “…….”

    “죄송합니다. 횡령한 돈은 위자료로 다 줘 버렸습니다. 이기적인 놈이라고 욕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대신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돈…… 갚겠습니다. 그러려고 돌아온 거니까요.”

    시원스럽게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한 것은 물론 경우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런 그를 지그시 보던 경우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그러지 마시지 그러셨어요.”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사모님이 이미 알고 계십니다.”

    눈도 못 마주치던 그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그쪽에 계시지 않을까 싶어 사람을 보내 찾아갔었거든요. 그래서 사모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알고 계셨어요. 죄송하다면서 부장님이 댁으로 보낸 돈도 돌려주셨고요.”

    애써 한 일이 결국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무척 허탈해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 들어 와 계십니다.”

    “그랬군요.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는데 제가 괜한 짓을…….”

    “사모님께서는 어떻게든 부장님의 죄를 덜고 싶으셨던 거겠죠.”

    “혹시 그럼 저희 애 소식도 들으셨습니까?”

    “네, 미국에서 꽤 괜찮아진 모양이에요. 지금은 한국에서 일반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생각보다 적응을 잘하는 것 같더라고요.”

    내내 어딘가 불안하던 그의 얼굴이 조금은 안도하는 듯 보였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이런 선택을 내려 주셔서 다행이네요. 이 부장님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지만 그래도 사모님 얼굴을 봐서 선처해 달라고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죗값 치르고 나오세요. 그리고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시고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쨌든 이경표가 자수한 일은 정말 다행이었다. 검찰청을 나오는 경우는 오랜만에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 * *

    늦은 밤, 퇴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던 경우는 문득 자신의 방 맞은편 대표실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간 그가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사무실의 불을 켜자 텅 빈 방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얼마 전까지 김종수가 쓰던 방이었다.

    김종수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이 세운 스튜디오 글로리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에 경우는 그의 결정을 존중해 줬다. 대신 자신이 미국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대표 자리를 맡아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대표직은 그만두지만 고문으로 남아 앞으로도 스튜디오 글로리 문제를 상의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뒀다. 그 만큼 스튜디오 글로리의 정신적 지주는 없으니까.

    미국 촬영을 마친 경우가 돌아오자마자 김종수는 그렇게 회사를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했으나 은퇴 후 시작될 제2의 인생도 잘해 나가길 사람들은 바랐다.

    그동안은 그에 대한 의리도 있었고 혹여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던 탓에 내버려 두었지만 더는 이 방을 빈방으로 놔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다음 날, 경우는 김종수, 이세길과 함께 스튜디오 글로리의 창립 멤버였던 김영훈과 오은호를 불렀다.

    “제가 두 분을 이 자리에 부른 이유, 잘 알고 계시죠?”

    경우의 말에 김영훈과 오은호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더는 대표 자리를 비워 두기 그래서요. 그래서 새로 대표를 뽑았으면 하는데…… 솔직히 저는 두 분 중에서 한 분이 맡아 주셨으면 해요. 창립 멤버이기도 하시고, 스튜디오 글로리에 대해서 속속들이 잘 아시잖아요. 그리고 누구보다 스튜디오 글로리를 아끼시고요.”

    경우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김영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민 작가, 지금 민 작가가 어떤 마음인지 잘 알지만 솔직히 나나 여기 있는 은호도 대표 자리가 별로 내키지 않아요.”

    “김 이사님…….”

    “솔직히 이사라는 직함도 달아 주니까 받기는 했지만 난 나이가 들어도 현장에서 일하는 PD이고 싶지, 사무실에서 서류 보고 그러는 거 영 내키지 않아요.”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덕분에 주식 부자도 됐는데 여기서 더 바라면 그건 양심 없는 거죠.”

    “솔직히 종수 형님이나 되니까 그 자리 앉은 거죠. 우리가 형님께 억지로 떠민 거거든요. 우리는 어림없어요. 괜히 깜냥도 안 되는데 대표 자리 앉았다가 회사 말아먹기 십상입니다. 세길이 형님이라도 있었으면 그 형님이 맡았으면 딱 좋았을 텐데…….”

    이세길 부장의 아내가 생각보다 병세가 좋아져 곧 있으면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이란 소식을 전해 오긴 했지만 그런 그가 회사로 돌아올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이 생각보다 완강하게 버티니 경우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 외부에서 영입하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네요.”

    경우의 말에 오은호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민 작가가 단독 대표를 하면 안 됩니까?”

    “네?”

    “굳이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것도 그럴 것 같아서요. 솔직히 드라마판이 잘되면 돈은 되잖아요. 괜히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와서 돈만 따지고 그러면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 정신을 해칠까 솔직히 걱정이 돼서요.”

    “나도 민 작가가 하겠다면 찬성입니다.”

    “저를 좋게 봐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한텐 그런 능력이 없어요.”

    “왜요? 종수 형님이 그러시던데요. 사업 수완은 자기보다 민 작가한테 더 있다고. 역시 재벌집 아들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눈치 없이 그런 소리를 한다며 김영훈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수? 그렇잖아요. 솔직히 나만 해도 민 작가가 처음 대표가 된다는 거 영 탐탁지 않았다고요. 민 작가가 싫어서 그랬다기보다 민 작가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겨우 드라마 한 편 써 본 작가가 이 바닥에 대해 뭘 알까, 사실 걱정이 많았거든요. 근데 지금은 우리가 다 알잖아요. 민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하긴. 종수 형님이 그러셨어요. 중요한 결정은 자기 혼자 내리지 않는다고. 민 작가랑 상의해서 한다고. 거의 민 작가 뜻을 따르면 다 맞다고 하던데요. 그냥 은호 말대로 당분간 지금의 체제를 유지해 보는 건 어때요? 정 민 작가가 힘들어 못하겠다고 하면 그때 다시 생각해도 늦진 않잖아요.”

    혹 떼려다 혹 붙인다고 경우는 지금이 꼭 그런 기분이었다.

    확실히 오랫동안 함께해 온 사이라 그런지 호흡이 잘 맞았으니, 경우는 도망갈 빈틈도 없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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