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41화 (241/250)
  • #241. 새로운 삶의 시작 (3)

    퇴근 후 경우가 찾은 곳은 누나 민지선이 입원해 있던 대학 병원의 신생아 중환자실.

    의사의 말을 따랐지만 결국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출산을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 바람에 아기는 부모 품에 안겨 보지도 못한 채 벌써 몇 달째 중환자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 중환자실의 모습이 보였다. 조그만 몸으로 여러 기계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아기의 모습에 경우는 안쓰러워졌다. 그런 그의 곁으로 민지선이 다가왔다.

    “왔어?”

    “응. 진작 오고 싶었는데 이제 와서 미안해.”

    “아니야. 그나마 우리 모자가 괜찮은 건 네 덕분이라 생각하는데 뭘.”

    “예준이는 좀 어때?”

    “저 어린 몸으로 심장 수술만 두 번했어. 나 같은 엄마를 둔 죄지. 그놈의 후계자가 뭐라고 내 욕심에 예준이를 너무 힘들 게 한 거 아닌가 싶어. 그래도 전보다 상태가 나아졌다니까 그걸로 만족해야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저 조그만 게 살겠다고 잘 버텨 주고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내가 예준이 생각하면서 미국에서 사 모은 신발이 꽤 되는데 다음에 미국에서 일 끝내고 돌아올 땐 그거 신고 누나랑 매형이랑 같이 마중 나오면 정말 좋겠다.”

    “우리 예준이 괜찮아지겠지?”

    “당연하지. 지금까지도 버텨 왔잖아. 분명 괜찮아질 거야.”

    “미국은 언제 돌아가는데?”

    * * *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먹고 있는 손녀의 모습에 손주옥은 입이 떡 벌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먹는 거야? 미국에서 굶었어?”

    “굶은 건 아닌데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나는 외국에서 살라고 해도 오래는 못 살겠어. 먹는 것 때문에.”

    “출국은 언제야?”

    “다음 주. 사실 경우 씨는 더 있어도 되는데 내가 다음 학기 시작하니까 나 때문에 가야해.”

    “그러고보면 민 서방이 너한테 참 잘해. 결혼 전에 눈치가 하도 없어서 너 고생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할머니도 참. 왜 새삼스럽게 옛날 이야기를 하고 그래. 지금 경우 씨가 나한테 얼마나 잘하는데.”

    “그러니까 너도 잘 해야지. 근데 너 살 좀 찐 거 아냐?”

    “진짜? 안 그래도 요즘 좀 먹긴 했는데 그새 쪘나?”

    “혹시 무슨 좋은 소식―.”

    “아이, 그런 거 아냐!”

    “아니면 아니지 왜 화를 내? 그나저나 민 서방은?”

    “오랜만에 왔잖아. 인사할 곳이 한두군데겠어? 신경 쓰지 마.”

    시간을 확인한 강희주는 지금쯤 경우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시각, 마침 병원을 나온 경우는 오랜만에 해장국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장님이 후다닥 잠에서 깨어났다.

    “어서 오세―. 아니, 이게 누구야? 민 작가, 오랜만이야!”

    “사장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미국에 갔다더니 언제 왔어?”

    “얼마 안 됐어요. 저 지금 식사 돼요?”

    “당연히 되지. 이럴 게 아니라 앉아 있어. 내가 직접 말아 가지고 올 테니까.”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식당 분위기에 경우는 마음이 저절로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앉아 있기도 뭐해 직접 반찬을 덜어 담고 수저에 물까지 세팅하고 나니 사장님이 뜨끈한 해장국을 가지고 나왔다.

    “앉아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해 줄까?”

    “뭐 힘든 일이라고요. 괜찮아요.”

    “하여간 민 작가 보면 참 신기해. 작년에 새로 들어온 우리 아줌마보다 민 작가가 우리 식당을 더 꿰고 있다니까?”

    “그야…… 단골이니까 그렇죠.”

    “그런가? 식기 전에 얼른 먹어.”

    경우는 뜨끈한 해장국을 떠 마셨다.

    “이야, 역시. 미국에서도 이 맛이 그리웠어요.”

    “맛있다니 다행이네. 그래, 일은 잘하고 있고?”

    “그럼요. 근데 다음 주에 또 미국에 가야 해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사장님 해장국을 못 먹어서 그게 아쉽네요.”

    “다녀와서 먹으면 되지. 나는 언제든지 여기 있을 테니까.”

    “네.”

    “그나저나 진짜 고마워.”

    “뭘요.”

    “민 작가가 해마다 보내 준 건강 검진권이 아니었으면 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내 몸 속에 그런 게 있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정말 고마워.”

    이전 생에 사장님은 췌장암을 너무 늦게 발견해 증세가 나타난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부고를 들었음에도 장례식을 찾아가지 못했던 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던 경우는 해년마다 건강 검진을 받게 했다. 이전 생과 달리 검진 결과는 늘 괜찮았다. 건강 검진 덕분에 나름 건강 관리를 잘해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하필 경우가 미국에 있을 때 암이 발견되었다. 다행히 초기라 수술은 어렵지 않았다. 아직은 조심해야 하는 단계지만 그렇다고 걱정할 단계도 지난 상태였다.

    “그래도 도움이 돼서 다행이에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24시간 문 열어 놓는 것도 그만하시고요.”

    “그건 안 돼. 이른 새벽에 일 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늦은 밤에 일 끝나서 집에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 식당마저 문을 닫으면 든든하게 한 끼를 어디서 떼우겠어?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속이 채워지지 않겠어?”

    남들처럼 하루에 정해진 양만 팔고 문을 닫으면 좋았을 테지만 혹시라도 늦은 밤, 일이 끝나 돌아가던 길에, 아니면 이른 아침 출근하기 전 속을 채우려는 몇 안되는 사람들을 위해 사장님은 늘 그렇게 식당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경우는 아무것도 없던 시절, 자신에게도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장님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걸 아니까.

    오랜만의 한국 방문으로 회포를 푼 경우는 얼마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했다. 그리고 자그마치 6개월 동안 미국에서 촬영을 마치고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왔다.

    * * *

    긴장감이 감도는 마포대교 위.

    평소라면 씽씽 오가는 차들로 가득했을 마포대교가 오늘은 텅 비어 있었다. 바로 드라마 의 촬영을 위해 오늘 하루 통제를 한 덕분이었다.

    한쪽에선 스탭들이 촬영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와중에 작가 겸 연출을 맡은 경우가 배우들에게 디렉팅을 하고 있었다. 오늘 마포대교 위에서 찍을 장면은 테러 현장을 우연히 발견한 CIA요원 스미스가 테러범들을 뒤쫓는 장면이었다.

    배달 알바를 하고 있던 취준생 박강민의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그들을 추격하는 장면이었으니 액션까지 가미된 꽤 까다로운 장면이었다.

    스미스 역엔 경우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인연을 맺어 한국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해 지금은 할리우드의 대표 배우로 자리매김한 혼혈 배우 준 리차드가, 취준생 박강민 역에는 <셀룰러 메모리>의 주인공 우재환이 맡게 되었다.

    두 사람은 김준원 작가의 드라마 <비밀 요원>에서 캐스팅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각각 국정원 요원과 킬러 역할로. 하지만 킬러 역할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경우의 조언에 결국 준 리차드의 출연은 불발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 드라마에서 CIA요원과 취준생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을 보며 경우는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생각보다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사실 준 리차드가 이번 드라마의 출연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데이비드 헨더슨의 공이 컸다.

    ‘경우가 설정한 그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스미스가 혼혈이라는 설정. 더군다나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한테 버림받고 조국이라 여긴 한국에서도 차별받자 결국 미국으로 가는 거요.’

    ‘그냥 미국인이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런 사연이 있다면 스미스가 달라지는 모습을 그리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 같거든요. 스미스는 한국에 애정이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다른 외모 탓에 소속감도 느끼지 못하고 차별받았던 차가운 나라거든요. 그런데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특히나 보통 사람 박강민을 만나면서 인식이 달라지게 되는 거죠. 그럼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어질 것 같거든요.’

    ‘확실히 사건 자체에만 주목하는 것보다 그렇게 개인의 서사를 담는 게 이야기를 훨씬 풍부하게 하죠. 그래서 스미스로 누굴 캐스팅할까 고민했는데 준 리차드 씨 어떻습니까?’

    ‘네? 준이요?’

    ‘그러고보니 경우 드라마에도 카메오 출연을 한 적이 있죠?’

    ‘그렇죠. 준 리차드 씨가 캐스팅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네요.’

    그렇게 추진된 일이었다. 할리우드의 대세 배우로 잘나가는 준 리차드는 당연히 데이비드 헨더슨의 제안보다는 경우와 함께하는 드라마라는 소리에 배역이 뭔지 알기도 전에 두말 않고 캐스팅을 받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할 박강민이 고민이었고 평소 두 사람이 한 드라마에 나오는 걸 꿈꿨던 경우의 추천으로 우재환까지 합류하게 되었으니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합류하게 된 두 사람은 열심히 대본을 숙지하며 경우의 디렉팅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러분들의 안전이 더 중요합니다. 아시겠죠?”

    “네.”

    “자, 그럼 리허설 시작하고 바로 촬영 들어갑시다.”

    리허설을 마치고 드디어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여의도의 한 건물에 폭탄이 터졌다. 평화롭던 일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엎치락뒤치락 도망치는 사람들,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며 의외로 차분하게 머리가 식은 스미스.

    그때 검은 헬멧을 쓴 채 오토바이에 탄 두 사람이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혼란에 휩싸인 사람들과는 무척 대조적인 모습이었으니 마치 스미스와 비슷했다.

    수상하다는 생각에 스미스는 그들을 쫓는다. 다행히 테러로 일대의 도로가 대 혼란을 겪으면서 오토바이의 속도도 더뎠다. 하지만 언제까지 두 다리로 오토바이를 쫓는 건 불가능했으니.

    그때 스미스 눈에 들어오는 건 이런 상황에서도 배달을 마치고 오토바이에 올라탄 한 청년의 모습.

    다짜고짜 오토바이를 빼앗아 타려던 스미스를 청년은 의외로 완강히 버틴다.

    “이 양반 뭐야? 백주 대낮에 주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도둑질? 아무리 난리가 났어도 그러지. 사람이 할 짓이 있고 못 할 짓이 있는 겨, 이 양반아. 엥? 외국 사람이네? 크흠, 아, 유, 크레이지?”

    “됐으니까 오토바이 좀 빌립시다. 돈은 줄 테니까…….”

    생각보다 유창하게 나오는 한국말에 당황해 아무 말 못하는 거였으나 스미스는 그가 여전히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거라 여겼으니, 안 되겠다는 듯 주머니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래도 그건 좀…….”

    “저놈들 잡으면 따따불.”

    “신속 정확하게 모시겠습니다.”

    돈을 받자 여분으로 놔둔 헬멧까지 스미스에게 씌운 박강민이 오토바이에 올라타 테러범을 쫓기 시작했다. 달아나는 놈들 못지 않은 곡예 운전에 스미스도 살짝 당황하고 있었으니.

    “꽉 잡아요, 떨어지기 전에. 뭐 하시는 분인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취준생을 우습게 보지 마쇼. 내가 먹고살라고 안 해 본 알바가 없다니까.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고요!”

    그렇게 두 오토바이는 마포대교 위로 올라섰다.

    차들이 뒤엉켜 복잡한 도로와 달리 마포대교는 아직 차들이 몰리기 전이라 시원하게 뚫려 있었으니 테러범들이 탄 오토바이가 부아아앙하고 소리를 내며 멀어지고 있었다. 딱 봐도 올 블랙의 잘 빠진 두가티. 박강민의 250cc의 국산 중고 오토바이와 성능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 못한 스미스가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봐, 조금 더 빨리 달릴 순 없어? 이러다 저놈들 놓치겠다고!”

    그의 말에 박강민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감히 대한민국 취준생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

    액셀을 확 당기자 두 사람이 탄 오토바이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미친 듯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얼추 비슷한 위치에 오자 상대를 향해 손을 뻗어 보는 스미스. 하지만 그런 스미스의 행동에 오토바이가 휘청이자 박강민이 소리를 질렀다.

    “아, 그럼 위험하잖아요.”

    그러자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들었으니 그 바람에 박강민은 더욱 식겁했다.

    “니미럴. 따따블이라고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오토바이를 멈추게 하려고 바퀴에 총을 쏘지만 맞지 않고 오히려 테러범들도 총을 꺼내 반격하게 만들었으니 마포대교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마침 빗맞은 총알에 앞서 가던 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나면서 자동차가 회전을 하며 멈춰서자 테러범의 오토바이가 멈추지 못하고 부딪쳤다.

    결국 대교 위를 데구르르 구르는 테러범들. 서둘러 멈춰선 스미스 역시 그들이 있는 곳을 쫓지만 두 테러범은 이미 마포대교 난간 위. 두 사람은 헬멧을 쓴 채 돌아보더니 그대로 다리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리 아래 받침대로 두 사람이 내려앉는 순간.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경우의 외침에 의 첫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열연을 펼친 배우들은 물론 스탭들까지 무사히 첫 촬영을 마친 안도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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