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새로운 삶의 시작 (2)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경우는 내내 대본 작업에 매달렸지만 다른 때와 달리 진행은 더디기만 했다.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모두 의미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까다로웠던 탓이다.
거기다 데이비드 헨더슨의 작업 스타일 탓도 있었는데 미국 드라마가 대부분 집단 창작을 하는 것과 달리 이번 드라마의 대본은 데이비드 헨더슨과 경우 단 두 사람만의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지금껏 자신이 쓴 작품만 영화를 만들어 왔던 데이비드 헨더슨의 영향도 없지 않았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의논해 결정한 두 사람의 꼼꼼한 작업은 해를 넘기고서야 간신이 끝이 났다.
두 사람이 함께 쓴 드라마 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미국이 테러 조직을 끝장내기 위해 그들의 근거지를 습격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미국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테러 조직은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미국을 혼란에 빠뜨릴 테러를 계획한다. 그것은 세계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테러를 기획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곳은 익숙했던 유럽이 아닌 테러와는 동떨어진 한국.
마침 북한에서 생산하는 무기를 수입했던 그들은 북한 강성파와 접촉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계획을 수립한다.
장기간 평화로운 상태로 안보 불감증에 빠져 있던 한국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테러로 큰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테러의 주범이 누군지 밝히기 전, 북한의 소행이라는 소문에 휩싸이면서 남북한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치닫고 설상가상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마침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껴 한국으로 파견 온 CIA요원 스미스는 테러 현장을 목격한다. 그리고 우연히 얽힌 취준생 박강민과 우여곡절 끝에 테러의 실체를 파헤치고 테러 조직을 소탕하는 한편 전쟁의 위기를 극복해 간다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전혀 다른 환경에 있었던 데이비드와 공동 작업은 경우에게 있어서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의미도 있었지만 그가 지금껏 해 온 어떤 작업보다 힘들었던 탓에 경우는 이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2018년 내내 대본 작업에만 매달려 있던 경우는 2019년 새해를 맞아 마침 학기 말이었던 아내와 한국으로 짧은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거의 1년 만에 찾은 한국.
귀국하자마자 부모님과 할머니를 찾아뵌 후 경우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스튜디오 글로리였으니 그의 등장에 김종수를 비롯해 스튜디오 글로리 식구들이 그를 반겨 주었다.
“작가님,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다들 잘 지내셨죠?”
“당연히 잘 지냈죠. 근데 작가님은 그사이 얼굴살이 너무 빠지셨는데요? 미국에서 고생이 많으셨나 봐요.”
“고생이랄 것까지야…….”
“한국엔 아예 들어온 거예요?”
“아니요, 휴가라 잠시 온 거예요. 본격적으로 촬영하면 미국에서 촬영분이 절반 정도 되니까 그것도 해야 하고 한국에서 촬영 마치면 다시 편집도 해야 하니까 생각보다 일이 길어질 것 같아요.”
“그럼 올해 1년도 미국으로 오가느라 정신없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우리도 작가님이 보내 주신 대본 봤는데 정말 재밌더라구요. 대본도 재미있었지만 영상으로 보면 더 좋을 것 같던데요? 빨리 드라마로 보고 싶은 거 있죠.”
“전 그보다 한국이랑 미국에서 동시 방송된다는 거 그게 진짜 놀랍던데.”
“그러게요. 그 아이디어는 누가 생각해 낸 거예요?”
“웹플릭스도 어떻게 보면 전 세계 동시 방송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데이비드도 그 생각은 못했는지 아주 흡족해하더라고요.”
“역시!”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통에 경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오랜만에 만남이 반가워 그러려니 생각하고 그들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 줬다. 어쨌든 한동안은 꿈에서도 영어를 쓸 정도라 한국말이 그리웠는데 새삼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간단한 근황 이야기를 마친 경우는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듣기 위해 김종수의 방으로 들어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눴다.
“모기범 PD님이 안 보이네요.”
“아, 현장 나갔어요. 지난주부터 새로 촬영에 들어간 드라마가 있거든요. 근데 모 PD는 왜요? 보고 싶어서 일부러 찾는 건 아닐 테고 혹시 일 때문에요?”
“네. 대본 작업은 끝났으니까 곧 촬영을 시작해야죠. 미국에서 촬영 마치면 곧바로 한국으로 들어와 촬영을 진행할 생각이에요.”
“그럼 준비할 게 많겠군요. 모 PD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어요.”
“그러니까 대표님께서 같이 도와주셔야죠. 솔직히 대표님껜 늘 죄송하네요. 크루즈 여행 한 번 보내드리고 너무 부려 먹는 것 같아서요.”
평소라면 이쯤에서 김종수의 반박이 나왔어야 했는데 잠잠했다. 그러고 보니 <뷰티풀 라이프> 때문에 미국을 갔었을 때 경우가 없어 힘들다고 투덜대곤 했어도 표정은 밝았는데 이번엔 근심 가득한 그의 얼굴에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었다.
“대표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요즘 고민이 많았어요. 언제고 민 작가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이 딱 그때인 것 같아요. 큰일 앞두고 있는 사람한테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이제 나도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대표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만둘 때라니요?”
“솔직히 이만하면 할 만큼 했잖아요. 민 작가랑 투자자와 대표로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그러고 보니 벌써 십 년이 지났네요. 시간이 참 빨라요, 그쵸?”
작정을 했다는 듯 김종수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시청률만 신경 쓰는 방송국에서 더는 못해 먹겠다면서 뜻 맞는 사람들끼리 소소하게 세운 스튜디오 글로리가 정말 이렇게까지 크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이거 다 민 작가 덕분이에요. 민 작가 아니었다면 평생 못 겪어 봤을 일을 많이 겪었어요. 그래서 민 작가한테 고마워요.”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어요. 대표님 힘드셨을 걸 헤아렸어야 하는데……. 직원을 더 뽑아서 업무를 덜어드릴 테니까―.”
“민 작가, 그런 뜻 아닌 거 알고 있잖아요?”
“…….”
“사람이 물러날 때를 알아야 추해지지 않는 법입니다. 실은 몇 년 전부터 감이 떨어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어요. 근데 민 작가가 워낙 나를 믿고 있고 작가로서 본분에 충실하려는 뜻도 알고 있어서 모른 척 버티고 있었는데 이젠 정말 아닌 것 같아요.”
“대표님…….”
“영훈이랑 은호한테도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그 친구들 두말 않고 찬성하더군요. 적당한 시기에 말하려고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보니 지금까지 왔습니다. 이제 막 한국 돌아온 사람한테 이런 말해서 정말 미안한데…… 내 뜻, 헤아려 줘요.”
그런 김종수에게 반대만 할 수 없었던 경우는 생각해 보겠다며 대답을 미뤘다.
회사에 있는 것도 심란해 그는 결국 촬영장으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바쁘게 돌아가는 촬영 현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질 때가 많았다.
현장에선 드라마 아케데미에서 경우에게 지도를 받았던 설영선의 드라마가 촬영 중이었다. 그동안 단막극과 짧은 분량의 웹 드라마를 써 왔던 그녀가 드디어 미니시리즈를 할 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이 대견했다.
경우는 자신이 왔다는 소식은 알리지 않은 채 뒤쪽에서 리허설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배우들을 디렉팅하는 PD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그럴 겁니다. 윤이강 PD라고 이 작품이 저 친구 입봉작이거든요.”
인기척에 돌아보니 그곳엔 김동권의 뒤를 이어 MBS 드라마국의 국장 자리를 꿰찬 김은기가 서 있었다. 경우의 첫 드라마 <셀룰러 메모리>를 함께 했던 그를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 경우는 무척 반가웠다.
“PD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아, 이젠 국장님이시네요.”
“오래간만입니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 작가한테 그렇게 불리니까 정말 감회가 새롭네요. 미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한국엔 언제 온 거예요?”
“얼마 안 됐어요.”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됐을 텐데 벌써 현장 나온 걸 보면 민 작가도 참 어지간합니다.”
“그러는 국장님은 여기 어쩐 일이신데요? 설마 PD가 입봉작이라니까 걱정돼서 오신 건 아닐 테고요.”
경우의 말에 정곡이 찔린 김은기가 웃고 말았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에 경우의 근심, 걱정 또한 멀리 달아났다.
“하여간 민 작가한테는 속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니까요. 걱정돼서 오기는 했는데 역시나 기우였던 모양입니다. 알아서 다 잘할 텐데 솔직히 저 친구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거겠죠.”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레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
“입봉작이면 단막극 연출도 안 해 보고 바로 넘어왔나 보네요?”
“네. 누구랑 비슷하죠?”
“그 말씀은 저한테 견줄 만한 실력이다, 이 말씀이신가요?”
“그게 또 그렇게 됩니까? 하하.”
경우가 처음 단막극 경험도 없이 낙하산으로 편성을 따냈다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들도 있었지만 결국 실력으로 모든 걸 이겨 냈으니 옛 생각이 떠오른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웃었다.
“기대가 크신가 봐요. 신입 PD한테 미니시리즈까지 맡기고 이렇게 현장까지 나오신 걸 보면 말이에요.”
“솔직히 기대도 되지만 걱정이 더 큽니다. 어느새 저 친구하고 운명 공동체가 되어 버린 것 같거든요. 저 친구가 잘돼야 내가 잘된다는 그런 게 있어요. 반대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내가 우겨서 저 친구한테 맡긴 거라.”
“잘될 거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그나저나 대단하세요. 저라도 신인 작가에 신입 PD 조합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은데.”
“왜요? 그때 우리 같이했던 <셀룰러 메모리>도 있었잖아요.”
“그거야 그땐 국장님이 계셨잖아요. 제가 실수해도 잘 이끌어 주실 거란 믿음이 있었거든요.”
“그게 민 작가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걸요? 그때 우리를 보는 사람들은 우리한테 기대감이 전혀 없었던 거 알아요? 오죽했으면 김동권 국장님도 몇 번씩 불러다가 진행 사항 묻고 그랬으니까요. 근데도 신기하게 민 작가만 그렇게 확신했죠. 나조차도 이 드라마가 잘 굴러갈까 걱정했었는데 민 작가는 자신만만이더라고요.”
“잘될 거라는 확신 비슷한 게 있었거든요.”
“덕분에 나까지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결과도 좋게 나왔고, 어쨌든 고맙게 생각해요.”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그러고 보니까 드라마판만큼 실력이 있다면 오래하는 직업도 없는데 모르는 사이에 이쪽도 세대교체가 많이 진행된 것 같네요. 새로운 얼굴이 꽤 늘어난 걸 보면 말이에요.”
“비켜 줘야죠. 나 같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으면 저렇게 새 사람들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싶어도 못 할 테니까요.”
다짐하듯 말하는 김은기의 모습에 그를 지그시 보던 경우가 말을 이었다.
“아직도 현장이 많이 그리우신가 봐요.”
“네, 솔직히 지금도 허락만 한다면 현장에서 다시 일하고 싶어요. 옛날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거든요. 근데 그건 욕심이고 미련일 뿐입니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저 친구만큼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거든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것 아닙니까?”
경우의 말에 김은기가 고개를 저었다.
“해 보나 마납니다. 제가 왜 연출 경험이 없는 저 친구한테 미니시리즈를 맡겼는데요? 될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아마 제가 평 PD 때 저런 후배를 만났으면 도망갔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지금 만난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니까. 이제는 후배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돕는 거, 그렇게 이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가 물려주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국장님이 이 정도로 신뢰하는지 윤 PD는 알까요?”
“알았다간 도망갈지도 모르죠. 이제 이렇게 몰래 지켜보는 것도 그만해야 할까 봐요.”
처음부터 끝까지 후배들을 챙기는 김은기의 모습에 경우는 김종수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더욱 마음이 씁쓸해졌다. 김종수의 진심이 뭔지 엿본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다음날 사무실로 출근한 경우가 김종수의 방문을 두드렸다.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이야기하시죠.”
그렇게 다시 마주 앉은 두 사람.
“대표님 뜻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경우의 말에 김종수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민 작가, 내 뜻 헤아려 줘서 정말 고마워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네? 조, 조건이라니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김종수는 어리둥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