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39화 (239/250)
  • #239. 새로운 삶의 시작 (1)

    진찰을 마친 강희주는 떨리는 마음으로 의사 앞에 앉았다.

    “음…… 특별히 몸에 이상이 있거나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피로가 쌓여 있고 스트레스 지수도 높네요.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난임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의사의 말에 강희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쁜 놈 잡는 검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 꿈 하나만 보고 지금까지 달려왔다. 미친 듯이 공부했고 재벌집 손녀라는 색안경에도 오히려 씩씩하게 굴며 검찰청 안에서도 조금씩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우를 만나고 그와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되면서 자신이 오랫동안 바라 왔던 일이 행복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어떻게 해야 하나 강희주는 고민이 많아졌다.

    * * *

    지난번엔 스튜디오 글로리의 사무실에 만났던 두 사람은 이번엔 데이비드 헨더슨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함께 했다.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 바쁜 일이 있었어요.”

    “이거 어쩌죠? 이제 내일이면 제가 미국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라는 말씀이군요.”

    “네.”

    임시주총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강희주에게 미리 상의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지 못한 게 아쉬웠다. 예전이었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결정을 내렸을 테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도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다.

    아무래도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데이비드 헨더슨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 제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마디 덧붙이자면 제가 말씀드린 협업은 단순히 저희 쪽 일에 민 작가가 합류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가 말씀드렸죠? 은 물론 한국의 상황이 무척 인상 깊었다고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드라마의 무대를 미국과 한국으로 나눠 비슷한 시각, 두 나라에서 각각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되는지를 그리고 싶었어요.”

    “그 말씀은…….”

    “네, 한국 사람이 한두 명 등장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는 소리죠.”

    “그럼 자막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갈 텐데요? 미국 사람들은 자막 보는 걸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은 보지 말라고 하죠.”

    “네?”

    “어차피 자막이 많아도 볼 사람은 봅니다. 그렇지 않나요?”

    경우가 스튜디오 글로리 뉴욕 지사에서 제작한 <뷰티풀 라이프> 는 송지현이 쓴 원작이 있었지만 배우들은 물론이고 대본도 미국에 맞춰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다. 단순한 리메이크 작업이 아니었다. 거기다 일부를 제외하면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 미국 사람. 한국 사람이 살짝 발을 걸친 미국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데이비드 헨더슨의 말에 따르면 상상하던 것 그 이상이 될 거라던 그의 말처럼 이건 경우가 생각했던 수준을 웃돌았다. 놀란 경우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답을 고르는 사이 그가 다시 말했다.

    “사실 나도 드라마는 처음이에요. 그냥 을 보면서 아이디어들이 떠올랐죠. 그래서 이왕이면 을 만든 민경우 씨와 같이 해 보고 싶다 생각했던 겁니다.”

    “만약 여기서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나요?”

    “아니요, 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는 거겠죠. 미안하지만 난 작품에도 맞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이야기를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모인 거라 여기거든요. 그런데 만약 민경우 씨가 못 하겠다고 한다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 겁니다.”

    “생각보다 부담을 주시는군요.”

    “그럴 리가요. 묻는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드리는 겁니다.”

    두 번 다시 없는 기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우는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마저도 자신을 압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새명 물산으로 첫 출근한 민지선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다.

    꽤 오랫동안 오빠인 민정현이 일해 왔던 곳이었고 그가 새명의 차기 회장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새명 물산의 부사장으로 다른 사람도 아닌 민지선이 오게 되었으니 혹시라도 민정현의 사람들이 남아 있어 텃세를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회사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실력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녀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훈훈했다.

    그렇게 부사장실에 입성한 민지선은 천천히 방안을 둘러봤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박힌 명패……. 그토록 바라던 자리에 올랐지만 그녀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당분간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이제 겨우 고비만 넘겼을 뿐이에요. 아시죠?’

    혹시라도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알리지 않았던 그녀는 아예 병원에서 출퇴근을 하는 중이었다. 부디 아기가 버텨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던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이제부터 그녀를 담당하게 될 김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껏 그녀의 수족 노릇을 해 왔던 박 실장은 그동안 애지중지 키워 왔던 새명 유통에 남았다. 이제부터 함께하게 될 사람들은 모두 새명 물산 쪽 사람이었다.

    “부사장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알았어요.”

    부 사장인 그녀의 방과 아버지가 계신 회장실까지는 불과 3층 사이.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를 실감한 그녀가 마침내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민 회장이 용건부터 꺼냈다.

    “정현이 거취 말이다. 이번 일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정현이는 우리 모두를 기만했어. 그로 인해 회사에 큰 손실을 끼쳤고. 그런데도 회장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대로 놔둔다면 직원들 볼 면이 서지 않아. 그러니 화학으로 옮기는 게 어떨까 싶은데.”

    울산에 사옥이 있을 정도로 생각보다 한직이었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오빠를 그곳으로 보내는 것을 보니 이번 일로 마음이 많이 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넙죽 받을 일은 아니었다.

    “오빠는 그대로 자동차에 놔두는 게 어떨까요?”

    “뭐라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네. 오빠는 지금껏 자신이 새명 그룹의 차기 회장이 될 거라 믿고 있었을 거예요. 지금 그걸 놓친 것만 해도 뼈아플 거라 생각돼요. 그런데 자동차에서도 밀려 지방으로 가게 된다면 오빠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아요. 책임을 묻는다면 감봉 정도로 하시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게 보기에도 좋을 것 같아요.”

    “괜찮겠어? 그렇게 한다면 후환을 남겨 두는 게 될 텐데.”

    혹시라도 나중을 걱정한 아버지의 배려라는 걸 민지선은 깨달았다. 한 회사의 수장으로 그의 입장이 있다면 아버지로서의 입장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빼앗기게 된다면 제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렸으니 민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을 내려 준 딸이 더 고마워졌다.

    * * *

    인천 국제 공항 출국장.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탑승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경우는 꼭 잡은 강희주의 두 손을 쉽게 놓지 못했다.

    “그만 울어요. 누가 보면 아예 멀리 떠나는 줄 알겠네.”

    “흑흑, 멀리 가는 거, 흑, 맞잖아요.”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금방 다시 만날 텐데요. 뭘.”

    “그래도요. 매일 보다가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마음이…….”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다.”

    경우의 말에 그제야 그의 손을 놓은 강희주가 옷 소매를 쓱쓱 눈물을 닦았다.

    “얼굴 상해요.”

    “괜찮아요. 어서 가요. 그래도 비행기 놓치면 안 되지.”

    “알았어요. 도착하는 대로 전화할게요. 그렇다고 전화기만 붙잡고 있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요. 응?”

    “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겨우 돌려 경우는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결국 경우는 데이비드 헨더슨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일하는 것도 물론 그랬지만 자신이 아니면 이 이야기는 그대로 묻힌다는 그의 말이 경우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건 곧 자신밖에 할 수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 없었으니까.

    경우는 그날 밤, 의논도 하지 않고 이미 결정을 내린 이 일을 아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 고민이 무색하게도 아내의 반응은 생각보다 산뜻했다.

    ‘그럼 미국으로 가야 하는 거예요?’

    ‘한국에서의 촬영도 있긴 하지만 드라마 다 끝날 때까진 아무래도 미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 거 같아요. 미안해요. 진작 상의하려고 했는데 요즘 일이 많아서 그러지 못했어요.’

    ‘알아요. 난 괜찮으니까 미국 가요.’

    ‘정말요? 정말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대신에 나도 데리고 가요.’

    ‘예? 희주 씨. 그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설마 나 때문에 희주 씨 일, 포기하려는 건 아니죠?’

    평소 아내가 자신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았던 그였기에 그런 아내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만 두려는 게 아니라…… 알아보니까 검사들도 해외 연수가 있더라고요.’

    ‘해외 연수요?’

    ‘네. 사실 나도 요즘 마음이 좀 그랬거든요.’

    ‘…….’

    ‘오랫동안 일해 왔잖아요. 그래서 번아웃이라고 할까? 이대로 계속 하면 아예 이 일을 못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조금 들었어요.’

    ‘희주 씨. 힘들었으면 진작 나한테 말을 하죠.’

    ‘그래서 휴직을 할까 생각도 했었거든요. 근데 경우 씨가 미국으로 가는 거라면 이참에 해외 연수를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혹시 내가 같이 간다고 실망한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희주 씨한테 미안했는데 잘됐죠. 근데 그거 신청한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거예요? 대기자 밀려 있고 그런 건 아니에요?’

    ‘글쎄요? 근데 내가 가겠다고 하면 어렵진 않을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전부터 부장 검사님이 권했거든요.’

    ‘예? 부장검사님이요?’

    ‘나보고 똘아이라고 커버하기 힘들다나 뭐라나. 아니, 글쎄 그 인간이 자기는 총장까지 해 먹어야 하는데 나 같은 똘아이가 같은 부서에 있으면 출세가 힘들다고, 빨리 그만두고 개업이나 하든가 아니면 자기 근무하는 동안 만이라도 해외 연수 나가 있으라고 하는데 그 인간을 내가 진짜!’

    말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흥분한 머쓱한지 씩 웃었다.

    ‘아…… 나도 모르게 흥분했네. 헤헤.’

    ‘그 인간 못됐네, 아주 그냥. 총장은 무슨. 내가 보기엔 차장도 달기 전에 떨어질 걸요.’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의 모습에 강희주는 씩 웃었다.

    사실 난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걱정이 많아진 그녀는 일을 그만둘 생각까진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해 방법을 찾던 중이었으니 이렇게 된 거 해외 연수를 가는 게 아무래도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어쨌든 아내가 그렇게 나오자 일은 생각보다 술술 풀렸다. 회사 문제 등등 남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던 강희주는 더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오기로 하고 경우 먼저 미국에 가기로 했다. 얼마 후면 만날 거란 걸 알면서도 이별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렇게 탑승구를 찾아 가는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으니.

    “민경우?”

    돌아보니 그곳에 박현호가 서 있었다.

    “박현호? 어디 가나 보지? 그럼 잘 가라.”

    “그러는 너는? 아, 데이비드 헤더슨하고 같이 일하기로 했다며? 설마 그 일로 가는 거야?”

    “남의 회사 사정에 너무 빠삭한 거 아니냐? 부담스러워. 그리고 나 지금 비행기 시간이 빠듯하거든?”

    이만하면 놔 달라는 소리였으나 그는 쉽게 놓아주지 않았으니.

    “너만 바쁘냐? 나도 바빠. 미국가거든, LA.”

    무슨 일로 가는지 물어봐 달라는 표현을 온 몸으로 하고 있었으니 불쌍한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물었다.

    “LA엔 무슨 일로 가는데?”

    “스튜디오 글로리가 세계적으로 놀길래, 우리도 세계적으로 놀아 보려고. 미국 드라마를 제작해 볼 생각이거든. 하긴 한국은 너무 좁아. 크게 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지.”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었다. 일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스튜디오 글로리 때문에 일을 만들러 LA에 간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더는 그런 걸 따질 시간도 없었다.

    “그럼, 열심히 해. 나중에 만나면 술이나 한잔하자.”

    경우는 그렇게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러자 그의 뒤통수에 대고 박현호가 외쳤다.

    “지금 잘나간다고 재는 모양인데 조금만 기다려. 우리 유니언 스튜디오가 금방 따라잡을 테니까. 아마 우리한테 납작 엎드릴 날이 올 거야, 두고 봐.”

    “왜 저래, 진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서둘러 탑승구를 찾아 겨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펼쳐질 일들이 비로소 실감 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경우를 실은 뉴욕 행 비행기가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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