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38화 (238/250)
  • #238. 득과 실 (5)

    도착했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 음성에 윤 부장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도착이라고 했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거로 생각된 로펌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린 윤 부장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변호사 사무실이라면 이쪽 말고 뒤쪽에 있어요.”

    그 말에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자 비로소 보이는 J&B로펌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엘리베이터도 없는 꽤 허름한 건물의 꼭대기 층에 위치해 있었다. 가뜩이나 나잇살이 늘고 체력이 약해진 지금 헉헉대며 계단을 올라 사무실로 들어간 그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변호사님 휴가 가셨는데요?”

    “휴, 휴가요? 어디로……?”

    “보라카이를 가신다고 했던가? 아마 지금쯤 출국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출국이요?”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3월에 휴가를 간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동안 변호사님이 따로 휴가도 없이 계속 일만 하셨거든요. 안식년이라나? 일 년까지는 아니고 딱 두 달만 쉬시기로 하셨거든요. 사건 수임 때문에 오신 거예요? 전 변호사님 말고 박 변호사님도 있는데.”

    “아니, 그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변호사님을 찾아봬야 할 일이 있어서 온 거였는데…….”

    잠시 생각하던 윤 부장이 다시 물었다.

    “혹시 최근에 변호사님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거나 그런 건 없었을까요?”

    “변호사님이야 사람들이 매일 찾아오죠. 꼭 수임이 아니더라도 법률 상담 같은 거 받으러 오시니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뭐라고 물어야 하나 싶었던 윤 부장은 애꿎은 머리만 긁적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안된 모양인지 직원은 지나가는 듯한 말로 입을 열었다.

    “휴가 가신다고 진작부터 말씀해 놓은 상태여서 제가 아는 한 사흘 전부터는 아무도 변호사님을 특별하게 찾아오지 않았어요.”

    “정말이죠? 확실해요?”

    “댁으로 찾아가셨다면 모를까, 사무실로 찾아온 사람은 없긴 하지만 확실하냐고 물으시면 대답 못 하구요.”

    어쨌든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윤 부장도 더는 미련을 떨 수 없었으니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민정현에게 그 일에 대해 보고를 했다.

    “어떻게 할까요?”

    “이미 출국을 해서 이 나라에 없는 사람한테 뭘 부탁할 순 없는 거잖아요. 지금쯤 비행기 안에 있을 테니 통화도 불가능할 테고……. 우리 쪽에 확보된 지분이 어떻게 되죠?”

    “44퍼센트입니다.”

    “저쪽은요?”

    “39퍼센트 정도일 겁니다.”

    승기가 확실히 기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윤 부장이 뒷말을 이었다.

    “그 어르신이 가지고 있던 지분이 4퍼센트입니다. 그걸 그쪽에서 확보했다고 해도 43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소액주주들이라 일일이 찾아 위임장을 받았으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기 힘들 겁니다.”

    “네, 압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찮은 건 어쩔 수 없네요.”

    아무래도 아버지를 밀어내는 일이었다. 아버지만이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시절이 떠오른 민정현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 쪽에 선 사람들한테 전화 한 번이라도 더 돌리세요. 마음 바뀌지 않도록 주총까지 단속 또 단속하시구요. 주총이 있을 때까지는 마음을 놓아선 안 됩니다.”

    “네.”

    민정현의 지시에 윤 부장이 사무실을 나갔다. 드디어 새명의 새 시대가 오는 날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임시주총이 열렸으니 주주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명 그룹 회의실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편에 서기로 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나누며 마지막 당부를 하던 민정현은 마침 회의실로 들어오던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민정현은 최대한 당당한 모습으로 아버지께 다가가 인사를 했다.

    “네가 서운했다는 거 안다. 그런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니?”

    “저를 이렇게 만든 건 아버지세요.”

    “나는 늘 너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네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 거야.”

    “그랬더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주지 말지 그러셨어요. 전부 내 것인 것처럼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빼앗아 가시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

    “이번 일은 모두 아버지가 자초하신 일이에요.”

    이미 부자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었지만 민정현은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 새명 그룹의 임시 주주총회가 시작되었다. 안건은 민홍준 회장의 해임안이었으니 곧바로 투표에 들어갔다. 참석한 사람들 면면을 확인한 민정현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제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새명 그룹의 차지 회장 자리에 올라선다고 믿었다.

    안심하고 있던 바로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경우가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직 주주총회 끝난 거 아니죠?”

    “네가 여긴 왜 와?”

    가지고 있던 지분을 모두 민지선에게 넘긴 경우가 왜 주총에 참석한 건지 민정현은 날을 세웠다.

    “위임장을 가지고 왔는데요? 안 될까요?”

    그가 품 안에서 꺼낸 것은 어머니 윤정숙의 위임장. 그러고 보니 어머니 윤정숙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어머니 대신이라면 이미 예상 가능한 범위였으니 민정현은 별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다시 투표가 이어졌다.

    잠시 후 투표가 모두 끝났다. 결과만 남겨 두고 있는 상황. 사회를 맡은 손석중 실장이 단상 앞에 섰다.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참석자 중 과반수 이상의 반대로 민홍준 회장 해임안이 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부, 부결이라니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사실에 흥분한 민정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단상으로 간 그가 거칠게 손석중의 멱살을 잡았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손 실장, 당신 결과 조작했지? 그렇지?”

    “조작이라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투표 결과에 따라 정확히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확인해 보시죠?”

    멱살을 잡고 있던 민정현의 손을 털어 낸 손석중이 구겨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를 믿지 못하면서도 불안한 눈빛으로 민정현은 주주들이 투표를 한 용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한쪽에 놔둔 경우가 가지고 온 위임장을 발견했으니.

    “J&B로펌 갔었다면서요?”

    다른 사람도 아닌 경우의 입에서 로펌 이름이 나오자 민정현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박경덕 어르신이 가지고 있던 주식은 어머니께 모두 양도되었어요.”

    “그럴 리가…….”

    “혹시 이런 일이 있을까 봐 그대로 놔뒀다가 임시 주총이 있다는 걸 알고 급하게 처리했거든요.”

    경우는 박경덕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 주식 양도 절차를 밟기 위해 요양 병원으로 찾아왔던 전정민 변호사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어머니 윤정숙은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경우 네가 가지고 있는 건 어떻겠니?’

    ‘혹시 제가 그걸로 새명에 들어가길 바라시는 건 아니고요?’

    ‘아니라곤 못 하겠구나.’

    ‘그럼 받지 않겠습니다. 어머니께 괜한 미련 남겨 두고 싶지 않거든요.’

    ‘매정한 녀석.’

    ‘어머니 알아서 하세요. 어쨌든 어르신이 어머니께 남기신 거잖아요.’

    그때 당시 윤정숙은 민 회장과 완전히 화해하기 전이었으니 혹시라도 있을 나중 일을 위해 자신의 명의가 아닌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겨 두기로 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니까.

    임시주총이 열린다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윤정숙 명의로 완전히 처리를 했고 그것을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까지 모두 경우에게 위임했으니 이런 사실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민정현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죽은 박경덕의 주식이 더해진다고 해서 판이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이야, 윤 이사장님 막내 아드님을 여기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호탕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명동에서 사채업을 하고 있는 홍 사장이 반가워하는 얼굴로 경우에게 다가갔다.

    “어머니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사장님.”

    “뭐,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을 텐데요.”

    “아닙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도움을 주셔서 항상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채업을 하는 홍 사장과 어머니가 잘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에 민정현은 경악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홍 사장이 가까이 다가가 은밀히 말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웬만하면 민 사장님 손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윤 이사장님이 워낙 무서운 분이라……. 진짜 미안하게 됐수다.”

    말을 마친 그가 민 회장을 향해 살짝 인사를 하곤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순식간에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버린 민정현은 망연자실, 넋이 나가 버렸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더욱 못마땅했던 민 회장이 입을 열었다.

    “다행히 회장직을 계속 이어 갈 수 있게 되었어. 그래서 첫 번째 지시를 내릴까 하는데. 민지선 대표!”

    “네!”

    “정식으로 발령을 낼 테지만 민지선 대표를 새명 물산의 부사장으로 임명할까 해.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잘해 주길 바라.”

    “감사합니다, 회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집 나간 새명 유통도 새명 그룹 품 안으로 들어와야지?”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렇게 지시를 내린 민 회장이 회의실을 떠나자 다들 민정현을 힐끔거리며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바빴다.

    “새명 물산 부사장이라니…….”

    새명 물산 부사장.

    민 회장이 선대 회장인 민판섭 밑에서 일했을 당시 직함이 새명 물산 부사장이었다. 그 말인즉슨 새명 그룹의 후계자는 민지선이라고 못을 박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더는 회의실에 남은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민정현의 편에 섰던 사람들조차 눈치를 살피다 다들 자기 갈 길 바빴으니 홀로 남은 형의 모습에 민준호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그날 동생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게. 남의 집 귀한 딸한테 모멸감을 주면 안 되지. 형은 그 말도 몰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잖아.’

    ‘내, 내가?’

    ‘기억이 안 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러게 술 좀 작작 마시지 그랬어? 그랬으면 그럴 일도 없었잖아.’

    ‘그, 그럴 리가 없어. 선보기 전에 걜 만난 적도 없―.’

    그때, 집으로 바래다주던 차 안에서 최영윤이 한 말이 있었다.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술에 취해 기억을 못 하는 거라고.

    ‘이제 생각이 나나 보네. 형이 뭘 잘했다고 미행을 해서 사람 겁을 줘? 그 아가씨, 몇 번이나 죽으려고 약까지 먹었다는 거, 형 알아? 그런 일이 퍼지면 새명 건설 전무 자리도 위태한 거 아닌가? 사실 형이 아니라도 이번 판 충분히 엎을 수 있어. 근데 안 하려고. 괜히 주주들한테 적대감을 심어 줄 필욘 없잖아. 안 그래?’

    자신을 협박하던 동생의 모습에 결국 민준호는 동생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으니 자기 자리라도 보전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을 지켜보던 경우가 회의실 밖으로 나와 누나에게 다가갔다.

    “축하해. 드디어 그렇게 원하던 새명 물산의 후계자가 되었네. 참, 안 그래도 누나한테 줄 선물이 있었는데.”

    지난번 누나의 임신 사실을 알고 샀지만 바빠서 주지 못했던 아기 신발을 주려 가방을 열던 참이었다.

    “경우야…….”

    자신의 팔목을 꽉 움켜 쥔 누나의 핏기 없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경우가 고개를 들자 아랫배를 감싼 채 고통에 일그러진 누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 * *

    소식을 듣고 안청모가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

    “처남! 이게 무슨 일이야?”

    “들어가 보세요.”

    굳어진 경우의 표정에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한 안청모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스르륵 문이 닫히고 이내 들려오는 누나의 울음소리.

    누나의 우는 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누나는 어릴 때도 사람들 앞에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누나가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게 경우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는 병실 복도를 걸으며 의사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솔직히 산모도 그렇지만 아기가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러게 그때 입원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선생님, 도와주세요. 제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제 말씀을 꼭 따라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아버진 내일 당장이라도 새명 물산으로 출근하라 하셨지만 무리였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도 없어서 적당한 핑계를 대 잠시 미루기로 했다.

    경우는 아기 신발을 다시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조카가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 줘도 늦진 않을 테니까.

    긴 복도를 한참이나 걸은 후 마침내 병원 건물 밖으로 나오자 경우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I think I gave you enough time. Did you think about it?]

    잊고 있었던 데이비드 헨더슨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