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37화 (237/250)

#237. 득과 실 (4)

경우와 이야기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데이비드 헨더슨의 수행 비서나 다름없는 클레어 퀸이 불만을 터뜨렸다.

“데이빗, 난 왜 당신이 그 동양인 남자한테 집착하는지 모르겠어.”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건데?”

“그렇잖아? 솔직히 그 사람 재능 있는 거 인정해. 하지만 그 정도의 재능 있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어. 기고만장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거기까지 찾아갔는데 당연히 고맙다고 그 자리에서 오케이 해야 하는 거 아냐?”

“날 높게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그렇다고 상대방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무례한 거야.”

“그건…… 내가 실언했어. 못 들은 걸로 해 줘.”

“어쨌든 클레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신중한 태도가 더 마음에 들어. 그 자리에서 오케이 했더라면 아마 내가 실망했을 거야.”

“하여간 당신 고집을 누가 꺾겠어? 아마 그 남자가 싫다고 해도 당신은 어떻게든 그 사람과 일하겠지?”

“물론. 마음먹은 건 뭐든 해냈잖아.”

“이쯤 되면 당신이 불쌍한 건지 그 남자가 불쌍한 건지 모르겠네.”

투덜대는 클레어 퀸을 내버려 둔 채 데이비드 헨더슨은 창밖을 바라봤다. 마침 차는 한강 다리 위를 달리고 있었으니, 이국적인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그곳 또한 영화에 어떻게 쓰일지 그려지고 있었다.

* * *

일이 터지고 다음 날, 새명 그룹 사장단 회의가 다시 열렸다. 단상에 선 사람은 민지선이었다.

“제가 외국의 저명한 박사님들과 화상 회의를 한 끝에 얻은 결론은 아직 자율 주행 기술이 완벽하게 구현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민지선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탄식했다. 특히 민정현의 얼굴은 터질 듯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 민 회장도 더는 아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럼 재경 그룹은요? 듣자 하니 그쪽도 자율 주행 기술이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고 하던데요?”

“네.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그거 확실한 정보입니까? 우리를 안심시킨 뒤 나중에 뒤통수치는 건 아니고요?”

“그건 내가 재경 그룹 김 회장께 직접 물었어. 그쪽도 아직까진 돌발 상황을 완전히 컨트롤할 수 없는 모양이야. 도로 위의 다른 차나 신호등까지는 어느 정도 커버가 되지만 돌발 상황은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니 이번 셔틀버스처럼 운전석을 아예 없애는 것 자체가 시기상조라고 하더군.”

재경 그룹과 사돈지간이라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었을 거라 짐작한 다른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민 회장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으니까.

대신 그런 상황까지 알지 못했던 민정현은 오히려 더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지선 대표가 하고 싶은 말은 뭔데?”

“저는 과장 광고였다고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물론 타격은 있겠지만 오히려 감추고 변명만 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사태를 더 빨리 수습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기술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보다 과장 광고였다?”

“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속뜻은 비슷하다고 해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빼 버리면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다르게 느껴질 수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민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민지선이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마케팅 쪽으로 해결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마케팅.”

“네. 광고를 만드는 겁니다.”

민지선의 생각은 이랬다. 화정시에서 자율 주행 셔틀버스를 운행하기는 했지만 소수만 이용했을 뿐, 아직까지 자율 주행 기술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먼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은 거였다. 그러니 신청자를 받아 직접 자율 주행 자동차를 체험해 보는 게 어떠냐는 요지였다.

“분명 이번 일로 자율 주행이 아직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직접 체험해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그리고 단순히 이벤트로 끝내는 게 아니라 광고로 제작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하려 했던 기존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친숙한 이미지를 내세워 이미지 전환을 시도한다는 계획이었다. 위험 부담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대신에 이번 사태가 빠르게 수습될 거란 기대에 그녀의 제안이 그렇게 나쁘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해서 15초 남짓의 광고론 부족하다며 인터넷에 전 과정을 보여 주는 것도 좋겠다는 새로운 의견까지 더해졌다.

어쨌든 해결의 기미가 보이자 회의 분위기는 조금 밝아졌다. 물론 민정현은 빼고.

그는 당장이라도 회의실을 나가고 싶었으나 그렇게 해 버리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했기 때문에 꾹 참고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하나 더 제안하자면 새명 자동차의 개발비 대부분이 지금 자율 주행이나 전기차 배터리 개발에 쓰이고 있는데요, 그 일부를 수소차 개발에도 투자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다시 갑작스러운 발언으로 회의장은 웅성거렸으니.

“말이 쉽지 전임 사장도 여러 번 실패한 일이야. 그런데도 다시 수소차를 꺼내는 건 뭔가 생각이 있어서겠지?”

민 회장의 물음에 민지선은 지난번 경우가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 변화 때문이라도 각국 정부는 점점 탄소 배출량을 제한할 겁니다. 그럼 도로 위에서 매연을 뿜어내고 있는 수많은 차들이 문제가 될 테죠. 전기차 좋죠. 하지만 전기차만이 그 대안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다시 연구를 재개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수소가 흔하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순수한 상태를 쉽게 얻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만큼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고요.”

“맞습니다. 거기다 수소차 충전소가 턱없이 부족해요. 집 주변에 충전소를 찾을 수 없는데 누가 수소차를 사겠습니까?”

새로운 화력으로 불을 지피자 회의장의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민지선은 그들의 질문을 모두 예상했다는 듯 하나하나 답변을 해 나갔다.

거기에 카이스트에서 연구 중인 윤희태 박사까지 화상 연결을 해 회의를 진행하자 보다 심도 깊은 질문이 오고 갔다. 그 결과 그동안 중단된 수소차 연구를 다시 진행하는 쪽으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시작은 자율 주행차의 사고였지만 앞으로 새명 자동차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이어졌으니 회의가 끝난 후 다들 만족한 얼굴이었다. 특히나 민 회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고생했다.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해내리라곤 생각 못 했어.”

“회사가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에 매달리다 보니…….”

“좋아, 좋아. 아주 장하구나. ……근데 무슨 땀을 그렇게 흘려?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아니에요. 이런 자리는 처음이다 보니까 긴장을 해서…….”

“그래. 그러고 보니 사장단 회의는 처음이지? 너무 잘해서 처음인 줄 몰랐구나.”

동생의 어깨를 다독이는 아버지를 본 민정현은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따르는 민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 시작해. 정확히 일주일 후야.”

“진짜 할 거야? 형!”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형의 모습에 민준호는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형의 결정이 아예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랬다. 양쪽 모두 발을 걸치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 * *

바쁜 손녀가 집으로 찾아와 기뻐하는 것도 잠시 손주옥은 손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걸 보고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할머니. 남자들은 전부 다 자식을 원할까?”

“왜? 민 서방이 애 안 낳는다고 뭐라 해?”

“아니, 그건 아니고……. 솔직히 난 우리 둘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했거든. 생기면 낳겠지만 안 생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민 서방이 눈치 줘?”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러게 애부터 낳으라고 해도 듣는 척도 안 하더니……. 너희 삼촌, 원래 애들 얼마나 안 좋아했는데. 그래도 낳아 놓으니까 지 자식이라고 이뻐하잖니. 남자들은 다 그래.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자식 욕심 많아.”

할머니까지 그렇게 말하니 강희주의 생각도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이 그랬을 뿐 그녀라고 아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아이가 생기지 않아 그녀의 고심도 깊어 가는 중이었다.

괜찮으면 민 서방도 같이 저녁이나 먹자는 손주옥의 말에 그녀는 경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빠요?”

[네, 회사에 일이 생겨서 늦을 것 같아요. 희주 씨는요?]

“난 오늘 일찍 퇴근해서 할머니 댁에 왔어요.”

[잘했네. 나 많이 늦을 것 같거든요. 괜찮으면 거기서 자고 와요.]

“알았어요. 일해요, 그럼.”

전화를 끊은 강희주는 괜히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전화를 끊은 경우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의 앞에는 김강철이 있었으니.

“아까 했던 말 다시 해 봐. 형이 뭘 한다고?”

“주주들을 만나고 다녀. 전엔 준호 형이랑 같이 움직였다면 지금은 각자 움직여. 꽤 신속하달까?”

“그리고?”

“찌라시에 회장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퍼지고 있어. 주로 건강에 대한 이야기야. 집무를 보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말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혹시 그것도 정현이 형이 퍼뜨린 거야?”

“그건 모르지. 근데 뭔가 예감이 안 좋아.”

잠시 생각하던 경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정현이 형이 아버지를 밀어내려는 게 아닐까?”

“뭐? 아니, 왜?”

“이번 일로 형은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상황이야. 거기다 누나가 이번 사태를 해결할 대책까지 세워 왔으니 새명 자동차 사장 자리도 위태롭다고 느꼈을 거야. 그러니 주주들 모아 이번에야말로 아버지를 밀어낼 생각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주주들은 가만히 있고?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상황을 모르진 않을 거 아냐?”

“그렇지. 근데 각자의 이해타산이라는 게 있잖아. 사실 형으로 회장이 바뀌길 바라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래야 지금 아버지 사람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새 사람들로 채우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니……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겠구나?”

“그렇지.”

경우의 말에 듣고 있던 김강철의 얼굴로 심각해졌다.

“그럼 이제야말로 네가 지난번에 준비했던 그거 시작할까?”

경우는 지난번 두 형들이 만나고 다니던 주주들의 약점을 따로 챙겨 놓으라 그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여차하면 그걸로 협박해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속셈이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던 그때 김강철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너 데이비든가 뭔가 하는 그 사람 만났다며? 무슨 일인데?”

“같이 일하자고.”

“그럼 미국으로 가야 하는 거냐? 너까지 없으면 회사는 어쩌고?”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에 그 문제까지 걸려 있었으니 경우는 더욱 심란해졌다. 바로 그때 경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지만 경우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최영윤이에요.]

어딘지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경우는 그녀를 떠올리느라 한참이나 걸렸다.

* * *

전화를 받고 바에 들어온 민준호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형을 불렀으면 지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투덜대던 그의 앞으로 매니저가 다가왔다.

“민준호 전무님이시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를 받아 간 곳은 룸으로 된 곳이었으니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이미 한잔하고 있던 경우를 본 민준호가 그의 앞에 앉았다.

“네가 어쩐 일이냐? 나를 다 불러내고?”

“지금 정현이 형이랑 일 꾸민다며?”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민준호가 태연히 술잔을 들이켰다.

“그걸 네가 왜 궁금해하는데?”

“설마…… 아버지 밀어내려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어쩔 건데? 왜? 아버지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게? 할 수 있으면 해, 얼마든지.”

경우는 대답 대신 형의 앞으로 사진들을 펼쳐 놓았다. 바로 최영윤에게 붙여 놓은 사람들을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조병배와 접촉하는 것까지 있었으니 사진만 봐도 조병배가 사람을 시켜 최영윤을 미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진을 본 민준호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뭐? 내 부하 직원이 충성심이 높아서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 모양인데―.”

“형은 궁금하지 않아? 하마터면 내 형수님이 될 뻔한 그 아가씨가 형한테 왜 그랬는지?”

궁금했다. 아주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유라도 알면 화를 내고 뭐라 화풀이라도 할 텐데 이유를 모르니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역시 네놈이 결혼식 날 그 여잘 빼돌린 거야, 그렇지? 이유가 뭔데? 왜 그랬던 건데?”

“쉽게 가르쳐 주면 재미없잖아, 안 그래?”

미소 짓는 동생의 모습이 민준호는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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