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득과 실 (3)
새명 그룹 전체에 비상사태가 발동돼 사장단 회의가 열렸다. 여기엔 계열 분리가 되었지만 후계자 경쟁을 하고 있는 민지선과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어쨌든 민준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이는? 얼마나 다친 거고?”
“갈비뼈와 다리가 골절되었고 현재는 수술을 받아서 치료 중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안심할 일이야, 이게? 그동안 쌓아 온 우리 새명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어!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고 사람들은 보이콧을 할 기세라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었다고 해도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를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밟을 여력은―.”
“민정현 사장! 민 사장은 지금 인터넷에 퍼진 그 동영상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네? 동영상이라니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장남의 얼굴에 민 회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각 직원들 동요하지 않게 하고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생각들 하세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회의를 하는 걸로 합시다.”
짧게 회의를 마친 민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 회장의 자식들은 그의 부름에 따로 그의 방으로 모였다.
민 회장은 우선 항간에 퍼지고 있는 동영상을 장남에게 보여 줬다. 사생 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을 찍고 있던 동영상 뒤쪽으로 사고가 난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시청 앞에서 한눈을 파느라 셔틀버스가 오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 아이가 그대로 버스와 충돌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어디에도 아이가 장난치다가 갑자기 버스 앞으로 튀어나왔다는 주장에 맞는 장면이 없었다.
누군가 사고를 목격하고 찍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민정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어딜 봐서 아이가 튀어나온 거야? 그 아이는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당연히 아이를 발견하고 멈췄어야지 왜 버스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직진하냐고?”
“이, 이, 일시적인 결함입니다. 신기술이라는 게 원래 없던 걸 만들어 내다 보니 모든 걸 완벽하게 커버할 수는 없었습니다. 약간의 결함이 있지만 충분히 보완 가능한 사안이고, 또 이건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자동차 회사들도 이 정도의 결함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런 완전하지도 않은 제품에 새명의 이름을 걸고 발표했다는 거잖아?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아, 아버지…….”
“회장님!”
“회장님…….”
회사에서는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던 아버지 말씀을 잊었던 민정현은 아버지가 실수를 지적하자 얼굴이 빨개졌다.
“아이가 갑자기 튀어나왔다느니 아이 잘못으로 몰아가는 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네가 직접 병원에 찾아가 피해자 부모한테 사과해.”
“하지만―.”
“잘못을 했으면 그걸 인정할 줄 아는 것도 회사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네.”
“치료비 전액 지급하는 건 물론 정신적 치료도 보상해 주겠다고 해. 그리고 화정시에 운행 중인 셔틀버스는 결함을 해결할 때까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올스톱한다고 발표해.”
“회장님!”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 들지 마!”
민정현은 아버지가 겨우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갔다간 어떻게 돌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민정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민 회장의 마지막 말이 그를 붙잡았으니.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책임자의 자리에 있는 한 어떤 식으로든 네가 책임을 져야 할 거야.”
그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민준호가 형을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심장을 부여잡는 민 회장의 모습에 민지선이 놀라 물었다.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약 이라도 가져오라고 할까요?”
“괜찮아. 약은 먹었어.”
“제발 진정하세요, 아버지. 그러다 또 쓰러지세요.”
“이 정도론 괜찮아.”
닫히는 문 사이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민정현이 주먹을 꽉 쥐고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머리를 긁적이던 민준호가 결국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던 민지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한테 좀 너무 하셨어요. 오빠도 잘하고 싶어서 그런 걸 텐데요.”
“알아. 내가 왜 모르겠니? 근데 그동안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것 같아. 호랑이는 자기 새끼를 벼랑으로 내민다지. 그래서 살아남는 녀석만 키운다고. 약한 모습 보였다가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이 세상에서 정현이를 너무 가엾게만 생각해서 키웠어. 다 내 잘못이야.”
“그래서 지금 벼랑으로 밀어내시려는 거예요?”
“글쎄. 그보다 지금이라도 그놈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편이라고 할까? 아까 그놈 눈빛 봤잖니? 아직도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눈치야.”
“…….”
이제 민 회장은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딸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지선아. 그동안 내가 너한테 참 무심했어. 내 원망 많았지?”
“아니에요.”
“제대로 돌봐 준 적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커 줘서 대견해.”
“그런 말씀 마세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봤을 땐 네 오빠보다 네가 새명의 후계자로 더 맞는 것 같아.”
“아버지…….”
“그러니 이번 일 어떻게 수습할지 방법을 생각해 보려무나.”
민지선은 이것이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테스트라는 걸 깨달았다. 오빠가 걱정되는 한편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 *
바에 들어간 민정현은 다짜고짜 독한 술부터 들이켰으니 그의 모습에 민준호조차 한숨을 내쉬었다.
“대낮부터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쩌자고? 그러다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진짜 형, 어떻게 될지 몰라.”
“이미 됐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아까 아버지 하시는 말씀 못 들었어? 책임지라는 말.”
“그게 뭐?”
“아직도 모르겠어? 사장 자리 내놓으라는 거잖아. 어디 한직으로 쫓아 버릴 생각이신가보지.”
“진짜? 그런 뜻이었어?”
민정현의 폭탄 발언에 결국 민준호도 그의 술잔을 빼앗아 벌컥 들이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그의 머릿속도 복잡해지기는 마찬가지.
경우가 줬던 그 보고서에는 씨랩스 구성원들이 휴대폰 음성 인식 기술을 개발해 낸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개발에 참여했던 건 다른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그냥 이름만 올린, 그것도 초창기 멤버일 뿐이라는 사실이 쓰여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민준호는 당연히 그들이 자율 주행 기술을 완성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이 문제로 질질 끌게 된다면 이런 사실을 들어 형에게 책임을 지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은 그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 버렸다.
이대로 형에게 붙어 있어야 하나, 아니면 이제라도 누나에게 붙는 쪽이 좋을까 생각하던 그는 양쪽 모두를 취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려면 일단 믿음을 심어 주는 게 급선무.
“실은 형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
민준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씨랩스에 대한 이야기를 형에게 털어놓았다. 물론 경우가 준 자료에서 봤다는 것은 말하지 않고 개발이 늦어져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아봤다고 둘러댔다.
“뭐야? 그게 사실이야?”
“응.”
문득 쓰러졌던 아버지가 깨어나고 얼마 뒤 씨랩스 인수 건에 대해 물으면서 신중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던 일이 떠올랐다. 만약 이 사실까지 알려진다면 진짜 벼랑 끝으로 몰린다는 위기감이 닥쳐왔으니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술잔을 들이켠 민정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예전부터 했던 고민을 이제 끝낼 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준호야.”
“왜 그렇게 불러? 심장 떨어지게.”
“우리 동맹…… 아직까지 유효한 거지?”
“갑자기 그건 왜?”
“일이 이렇게 된 건 아버지 책임도 있어.”
“형!”
“아버지가 진작 나한테 새명을 물려주시겠다고만 했어도 조급한 마음에 내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 놓고도 아버지는 내 탓만 하시니…… 나도 아버지께 책임을 물어야겠어.”
“책임을 묻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쿠데타라도 일으키겠다는 거야?”
“쿠데타라니. 편찮으니 아버지를 편히 모시려는 거지. 너도 봤잖아. 아버지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거. 이제 쉬실 때도 됐잖아.”
형형한 형의 눈빛에 민준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 * *
집으로 돌아온 민지선은 서재에 앉아 자료들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그런 아내가 걱정된 안청모가 마실 것을 가져와 책상 앞 한쪽에 놓아두었다.
“아, 여보. 아직 안 잤어요?”
“당신이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자요?”
“미안해요. 요즘 회사가 비상이라. 그룹 차원으로 나도 같이 해결 방안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근데 형님은 괜찮아요?”
“안 괜찮아도 어쩌겠어요.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어떻게든 수습해야죠. 나는 괜찮으니까 당신 먼저 자요. 내일 지방 촬영 가느라 새벽에 나가야 한다면서요?”
“괜찮겠어요?”
“당신이 이러고 있는 게 나를 더 불편하게 해요. 가뜩이나 챙겨 주지 못해 미안한데. 난 사무실에서도 틈나면 쉬면 되니까 얼른 가서 자요. 내일 촬영 잘하려면 집에서 푹 쉬어야죠.”
“알았어요. 그럼 나 먼저 잘 테니까 너무 늦게 자지 말아요.”
“네.”
그렇게 남편을 침실로 보낸 민지선이 열심히 서류들을 살피고 있었다.
“아!”
순간 배에 통증이 느껴졌으니.
“아가야. 지금 엄마가 중요한 시기야. 조금만 버텨주면 안 될까? 응?”
말을 듣기라도 한 듯 통증이 가라앉았다. 민지선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미국으로 밤샘 화상 회의까지 하면서 그녀는 그렇게 일에 매달렸다.
* * *
스튜디오 글로리 회의실 안엔 생각보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듣자 하니 데이비드 헨더슨의 한국 일정은 생각보다 빠듯했다. 그런 와중에 일부러 시간을 내 찾아온 걸 보면 이번 일이 그에게도 중요한 일임을 경우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무조건 저자세로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감독인 그가 한국까지 직접 영화 홍보차 온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긴 했다.
“제안을 하고 싶으시다는 게 뭐죠?”
“저희 플루토 픽처스와 스튜디오 글로리가 협업해서 드라마를 제작해 보고 싶어서요.”
“저희와 같이요?”
“네.”
“한국 드라마에 진출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 테고 굳이 저희와 함께 드라마를 만들고 싶으시다는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사실 이번에 을 아주 감명 깊게 봤습니다. 내전 중인 나라는 있지만 분단국가는 한국이 유일하지 않습니까? 그런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미국과의 관계도 깊고 중국, 러시아, 일본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어도 전혀 밀리지 않잖아요?”
“…….”
“생각보다 강한 나라더군요, 한국은. 최근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해외에서 강세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드라마 제작 경험이 있는 민경우 씨와 같이 드라마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가 세계적인 반열의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이유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한 탓이라 들었는데 그게 자신에게도 기회로 오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플루토 픽처스와 협업하지 않고도 저희는 충분히 미국 시장에 어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요. 굳이 협업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경우의 말에 데이비드 헨드슨과 함께 온 그의 스탭들이 탄식하고 말았다. 당연히 오케이할 줄 알았던 경우가 생각 외의 반응을 내놓자 어이가 없어진 탓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태도였다.
“알고 있습니다.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투자한 <크리미널 리포트>가 벌써 여덟 번째 시즌까지 방송되지 않았습니까? 9번째 시즌을 제작 중이라고요.”
“네.”
“작년에 <뷰티풀 라이프>를 세 번째 시즌까지 방송하고 완전 끝을 내셨지요. 아쉬워하는 팬이 상당했습니다. 더 이어 갔어도 됐을 텐데요.”
“인기를 끈다고 해서 계속 이야기를 질질 끌 순 없거든요. 끝날 때를 알아야 합니다. 끝을 잘 맺어야 이야기가 완성된다고 믿고 있거든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을 보면서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환경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저희와 협업하게 되면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 될 겁니다. 말로만 협업할 생각이 아니거든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실험적인 걸 꽤 좋아합니다.”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경우는 분명 그와 함께 일한다면 꽤 괜찮은 작업이 될 것 같다는 예감 같은 게 들었다. 하지만 쉽게 승낙하면 재미없어 지는 법.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이죠.”
그렇게 말했지만 데이비드 헨더슨은 이미 확신에 가득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