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34화 (234/250)
  • #234. 득과 실 (1)

    마치 태풍전야라는 표현에 걸맞게 너무 조용했다.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 탓에 더 불안해하던 민정현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바로 화정시 도시계획과에 근무하고 있는 원재형 과장이었다.

    사장인 자신이 일개 행정 도시의 과장과 면담할 일이 뭐가 있나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자신의 선에선 해결할 수 없다는 윤 부장의 말에 결국 그와 마주 앉았으니 원재형 과장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생각 외의 것이었다.

    “지난번 저희 화정시에서 했던 새명 자동차의 모터쇼,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자율 주행 기술을 저희 화정시 셔틀버스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셔틀버스요?”

    “네. 새로운 기술로 앞서가는 새명 자동차처럼 우리 화정시도 다른 지자체보다 앞서간다는 이미지로 홍보를 하면 어떨까 해서요. 새명 자동차와 화정시가 제휴를 맺었으면 합니다. 곧 새명의 복합 쇼핑몰도 문을 열 텐데 이참에 홍보를 제대로 해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지역 경제가 발전해야 결국 지역이 발전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원재형 과장은 그동안 화정시에서 회의했던 내용을 민정현에게 설명했다. 화정시 청사 주변을 도는 셔틀버스를 시작으로 훗날 복합 쇼핑몰이 문을 열면 지하철역을 오고 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게 어떻겠냐는 거였다.

    어쨌든 지자체에서 이렇게 나서서 회사를 홍보해 주겠다고 하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역시나 재경보다 먼저 발표한 덕을 이렇게 본다고 생각한 민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우선 저희 새명 자동차에서 나오는 승합차를 개조해 미니 버스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왕 하는 거 복합 쇼핑몰을 오가는 셔틀버스의 디자인도 새로 뽑는 게 좋을 것 같구요. 뭔가 미래 도시 같은 이미지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동의해 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아이디어도 내 주시고 적극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먼저 제안 주셔서 오히려 저희가 감사하죠. 열심히 해 봅시다.”

    맞잡은 두 손을 흔들었다.

    원재형 과장이 돌아간 사이 민정현은 다시 윤 부장을 불러들였다.

    “어떻게, 결함은 잡아냈다고 합니까?”

    “그게…….”

    “아직도 못 잡았다고 합니까?”

    “죄송합니다. 그런데 화정시 셔틀버스 문제는 어떻게 하기로……?”

    “우리 쪽 승합차를 제공하겠다고 시간을 벌어 놨으니까 그사이 문제를 다 해결하라고 하세요.”

    “네? 전 사장님께서 거절하실 줄 알고…….”

    “적은 비용으로 홍보하기에 그만한 것도 없는데 왜 거절합니다. 아마 우리가 거절했으면 원 과장, 바로 재경으로 달려갔겠죠. 그럼 재경만 좋은 일 시키는 겁니다. 알았어요?”

    “네, 그렇지만 그때까지 해결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

    “언제까지 그쪽에 끌려다닐 셈입니까? 그러니까 그쪽에서 자꾸 이렇게 시간만 끄는 거 아닙니까?”

    “너무 재촉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는 않을까―.”

    “지금까지 그쪽에서 원하는 건 다 해 줬어요. 돈이든 시간이든 전부! 그런데 결과가 지금 어떻습니까? 돈을 받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내놓아야죠. 내 말대로 하세요. 그리고 이번에 제대로 결함을 찾지 못한다면 그동안 받은 돈을 다 토해 내야 할 거라고 겁을 주세요.”

    “사, 사장님…….”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져 봐야 정신을 차릴 것 아닙니까? 됐으니까 그만 나가 보세요!”

    민정현은 어떻게 해서든 화정시에 내놓을 때는 결함 없는 완제품으로 세상에 나갈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 * *

    새명 유통의 복합 쇼핑몰 2호점 오픈이 멀지 않았다. 경우는 누나의 부름에 고정시에 있는 1호점 오픈을 위한 스토리텔링에 도움을 줬던 것처럼 이번 2호점 역시 도움을 주기로 했다.

    “1호점이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당신이 필요로 하는 건 뭐든지 다 있는 컨셉이었다면 2호점은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란 컨셉으로 잡아 봤어. 1호점엔 없는 2호점만의 특별한 서비스에 초점을 맞추는 거야.”

    “내가 특별해 진다라…… 좋은데?”

    “바로 그 점을 이용하는 거지. 여기 내가 생각한 스토리텔링이 있으니까 누나네 전문가들이랑 상의해 봐.”

    “이왕 이렇게 된 거 회의에도 참석하는 거 어때?”

    “됐어. 뭘 그렇게까지. 그 사람들도 전문가야. 동생을 믿는 건 좋지만 시안만 잡아 줬으면 됐지, 거기서 발전시키는 건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그런가?”

    “괜히 잘 하는데 나까지 껴들 거 없어. 안 그래?”

    “하긴, 너처럼 잘난 애가 회의에 껴 있으면 부담스럽기는 하겠다.”

    “뭐래. 됐으니까 나가자. 나 배고파.”

    “아직까지 점심 안 먹었어?”

    “뭐야, 점심 때 오라고 해서 같이 점심 먹을 줄 알았더니 의리 없이 혼자 먹었냐?”

    “바빠서…… 나도 샌드위치로 떼웠어. 너도 하나 사다 달라고 할까?”

    “사람을 이렇게 부려 먹어 놓고 겨우 샌드위치? 누나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나라고 뭐 일일이 끼니 챙겨 먹는 줄 알아? 겨우 시장만 요기한다고.”

    “그러니까 얼굴이 그 모양이지.”

    “내 얼굴이 어떤데?”

    “사흘 동안 피죽 한 그릇 못 먹은 얼굴.”

    “넌 무슨 할머니들이나 쓰는 그런 말을 하냐? 드라마 작가라 그런가?”

    “……뭐, 강철이가 나한테 가끔 악덕 업주니 뭐니 하는데 누나가 최고봉이야. 본인이 저렇게 안 먹고 있는데 사 달라고 떼쓰기 뭣하잖아?”

    “미안해. 오픈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요즘 속도 더부룩하고 안 좋아서 그래. 오픈해서 한가해지면 내가 근사하게 한 턱 쏠게.”

    “당연하지. 상다리가 부러지게 먹을 거야.”

    “좋을 대로. 그럼 이제 사무실 들어갈 거니?”

    “밥 먹어야지, 무슨 소리야? 아무리 늦어도 밥은 제대로 먹는 게 내 철칙인 거 잊었어?”

    “그러고 보면 어릴 때는 먹는 거 별로 집착 안 하더니 변했다, 너도? 나이 들어서 그런가?”

    “크흠. 뭐래?”

    “어쨌든 고맙다. 너한테 참 여러모로 신세지네.”

    “하여간 말로만 그러지 말로만. 나 갈 테니까 약속이나 지켜.”

    경우가 막 돌아서던 그때였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던 민지선은 눈앞이 핑 돌며 몸이 휘청였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지만 이내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누나!”

    우당탕 소리에 놀란 경우가 쓰러진 민지선에게로 달려갔다.

    * * *

    힘겹게 눈을 뜬 민지선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새하얀 천장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알코올 냄새.

    “누나, 정신이 들어?”

    “여기가 어디야? 어떻게 된 거야?”

    “기억 안 나? 좀 전에 사무실에서 누나 쓰러졌어.”

    “내가? ……참, 그랬지.”

    경우의 말에 민지선은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누나, 잠은 자는 거야?”

    “자. 아무렴 내가 잠도 안 자고 일하겠어?”

    “몇 시간이나 자는데?”

    “잘만큼 잔다니까 그러네.”

    “매형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

    “하여간 잔소리는. 애가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놀란 건 알겠는데 그럴 거 없어. 나 아직 말짱해. 이건 그냥…… 피로하고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래. 쇼핑몰 오픈하고 쉬면 금방 나아질 거야.”

    “누나, 쇼핑몰은 박 실장님께 맡기고 누나는 당분간 병원에 입원해 있자.”

    “겨우 이 정도로 호들갑 떨 거 없어. 나 괜찮다니까.”

    “누나 임신이래. 초기라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대.”

    경우의 말이 민지선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그녀가 동생을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뭐, 뭐라고?”

    “누나 임신했다고. 하마터면 애 잘못될 뻔했어. 가뜩이나 나이도 많아서 이대로 계속 일했다간 위험할 수 있대. 그러니까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대. 아까 의사 선생님이 누나 깨어나면 부르라고 했어. 다녀올 테니까 꼼짝 말고 있어. 응?”

    그렇게 경우가 병실을 나가고 혼자 남자 민지선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임신이라니…….

    아이를 안 낳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생기면 낳아 열심히 키우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하필이면 지금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뿐.

    민지선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이 속에 작은 생명이 들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곧이어 경우가 데려온 의사 역시 같은 말을 했다. 노산인 데다가 피로가 쌓여 있어서 안정이 필요하다고. 그 뒤로도 의사의 설명을 들었지만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내가 아깐 너무 놀라고 정신이 없어서 매형한테 전화 못 했는데 지금이라도 전화해야겠다.”

    의사가 병실을 나간 후 휴대폰을 꺼내 드는 경우의 손목을 민지선이 잡았다.

    “경우야! 잠깐, 잠깐만.”

    “왜? 매형도 이 소식 들으면 좋아하지 않겠어?”

    “나중에 내가 말할게. 지금 병원에서 이러고 있는 모습 청모 씨가 보면 걱정 많이 할 거야.”

    아무리 좋은 소식이라도 누나의 이런 몰골로 듣는다면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설 게 분명했다.

    “이 링거까지만 맞고 좀 나아지면 집에 가서 내가 직접 네 매형한테 말할 테니까 당분간은 비밀로 해 줘. 응?”

    “집이라니 당장 입원을 해야 한다니까?”

    “집이 편해. 너도 알잖아. 나 병원 싫어하는 거.”

    “모르겠는데. 누나…… 혹시 속으로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이상한 생각이라니 무슨 생각?”

    자신을 말갛게 보는 누나의 눈빛에 경우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매형한테 될 수 있으면 빨리 말해. 그리고 이제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응?”

    “그래, 알았어.”

    “어쨌든 누나 축하해. 이제 누나도 엄마가 되는 거네. 누나가 엄마가 된다니 실감이 안 난다. 참, 누나는 아들이 좋아, 딸이 좋아? 윤아 보니까 딸이 예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누나 생각하면 아들이 먼저 떠오르긴 해.”

    “왜?”

    “누나 보면 딱 여장부잖아. 누나 닮았으면 온 집안을 쓸고 다닐 텐데 딸 보다는 아들이지.”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 없어.”

    “하긴. 건강하게만 잘 자라 주면 바랄 게 없겠다.”

    “됐으니까, 넌 그만 가.”

    “링거 다 맞으면 집까지 바래다 줄게.”

    “내가 갈 수 있어. 회사 바로 앞이잖아. 박 실장한테 차 이쪽으로 보내라고 하면 돼. 너 있으면 나만 불편해.”

    “그래, 간다 가. 하여간 동생을 못 쫓아내서 안달이야. 그럼 몸조리 잘해. 일도 쉬엄쉬엄하고. 응?”

    “알았어. 경우야, 고마워.”

    “별소릴 다한다. 갈게.”

    경우가 나가고 잠시 후 결국 민지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에 꽂혀 있던 링거를 뽑을 수밖에 없었다. 안정도 중요했지만 지금 바로 눈앞의 일이 그녀에겐 더 중요했다. 잠깐 쉬었으니 뱃속의 아기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결국 병실 밖을 나갔다.

    * * *

    병원을 나온 경우는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늦은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때 마침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으니 아내였다.

    [어디에요? 사무실?]

    “누나 사무실에 볼일 보러 왔다가 점심을 못 먹어서 점심 먹으러 갈까 하고요.”

    [어? 나랑 통했네. 나도 아직 점심 전인데.]

    “아직도 점심 안 먹었어요? 그 회사 못 쓰겠네. 사람 밥은 굶기지 말아야지.”

    [그럼 우리 같이 점심 먹을래요?]

    “점심시간 이미 지난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요?”

    [까짓것 땡땡이 치죠, 뭐.]

    “좋아요. 그럼 내가 희주 씨 회사 앞으로 가서 전화할게요. 조금 이따가 봐요.”

    검찰청 앞으로 간 경우는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고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다 식당 앞에 있는 신생아 용품점을 발견했으니 자석에 이끌리듯 경우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손바닥 안으로 들어오는 조그만 사이즈의 신발을 구경하던 경우는 누나에게 선물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고르던 중이었다. 알았다고 했지만 일에 빠지면 다른 건 생각도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사무실 책상 위에 아기 신발이라도 놔두면 아기 생각에 자중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정신없이 신발을 고르던 그때 누군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놀라 돌아보니 어느새 강희주가 와 있었다.

    “여기서 뭐 해요?”

    “잠깐 아기 신발 좀 고르고 있었어요. 예쁘죠?”

    “……네. 예쁘네요. 근데 경우 씨 아기 갖고 싶었어요?”

    걱정스럽게 보는 아내의 얼굴에 경우는 의도를 깨닫고는 웃고 말았다.

    “아, 그런 거 아니에요.”

    “…….”

    누나가 임신했다고 말을 할까 하다가 누나가 했던 말도 있고 해서 당분간 비밀로 하기로 한 경우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아는 사람 선물로 주려고요. 근데 이거 진짜 귀엽죠. 나도 사무실에 장식으로 하나 놔둘까 봐요. 잠깐만요.”

    신발을 2개나 골라 계산하는 경우의 모습을 보며 강희주는 만감이 교차했으니 혹시 경우가 아기를 바라는데 자신 때문에 말도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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