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33화 (233/250)
  • #233. 풍전등화 (3)

    2017년이 가고 2018년이 되어서야 드라마 제작사 협회의 첫 번째 회원사 모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50여 개가 넘는 회원사가 모두 참석을 희망한 탓에 그 스케줄을 다 맞추다 보니 자연히 모임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런 모임을 통해 경우를 볼 수 있게 된 각 드라마 제작사 대표들의 얼굴은 밝았다. 어떻게든 경우에게 말이라도 붙여 보기 위해 그들은 얼마 전 방송이 끝난 송지현의 드라마로 말문을 텄다.

    “작년엔 특히나 스튜디오 글로리의 해가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상반기에는 이 휩쓸었다면 하반기에는 <미스터 가디언>이 휩쓸었잖아요?”

    “작년 은상 예술 대상에 이 후보에 오르는 걸 그렇게 반대하더니 그럴 일이 아니었어요. 스튜디오 글로리가 이제 웹플릭스하고만 일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SBC만 해도 이번에 <미스터 가디언>이 시청률 25퍼센트 찍지 않았습니까?”

    “그러게요. 요즘 시청률 예전 같지 않아서 25퍼센트면 정말 기록이에요, 기록. 어차피 이 바닥에서 아예 안 볼 사람들도 아닌데 자기들 뜻이랑 안 맞는다고 제작사를 홀대하다니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되죠.”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그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들의 아부에 경우는 낯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그런 그의 속내를 잘 알았던 정명도가 끼어들었다.

    “자, 자, 여러분들. 오늘 모임의 목적을 잊으신 모양인데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앞으로 드라마 제작사 협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지 또는 드라마 제작을 하는 데 도움을 줬으면 하는 게 뭐가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정명도의 지적에 목을 가다듬던 사람들이 하나둘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언제까지고 가족극만 할 것도 아니고 스타 트랙이나 마블 시리즈 같은 드라마 만들 때도 됐잖아요? 전보다 비중이 늘어난 특수 효과나 CG를 어떻게 해야할지 그게 고민입니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서 소재가 다양해지기는 했죠.”

    “요즘은 액션물에도 특수 효과나 CG가 많이 쓰이잖아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게 드라마의 성공을 좌우하지 않나 싶습니다.”

    “영화 촬영에 쓰일 대형 크로마키 세트장이 몇 안되는 걸로 아는데 촬영소에 특수효과 시설을 더 확충할 수는 없을까요?”

    “참, 도 특수 효과가 꽤 많이 들어간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한 겁니까?”

    “맞아요. 안 그래도 민 대표 만나면 묻고 싶었는데 잘됐군요.”

    또다시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경우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민 대표, 민 대표. 거 알랑방귀도 적당히들 하세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우를 찬양하기는 했으나 물론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했다. 바로 화진 픽쳐스의 김원오 대표가 그랬다.

    “이봐, 김 대표! 알랑방귀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심하다니요. 지금 대표님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그런 말씀 하시는 겁니까? 저기 민 대표가 재벌집 아들이니 어떻게든 연이 닿아 보겠다고 아까부터 꼬리 치는 거 여기 있는 사람이면 다 동의할 겁니다. 보이지도 않는 꼬리를 뭐 그렇게 빨리도 흔드는지.”

    “김 대표!”

    “아, 이거 왜들 이러십니까? 그만들 하세요? 네? 김 대표가 사과드려!”

    “제가 왜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게 잘못입니까? 솔직히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건 협회장님 책임도 조금은 있습니다.”

    불똥이 자신에게 튀어 오자 정명도가 의아한 듯 물었다.

    “나?”

    “네. 전에 스튜디오 글로리 소속 작가 작품을 내일 프로덕션에서 제작했잖아요. 제작비를 새명 그룹에서 댔다면서? 그 인연으로 지금 협회장까지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다들 재벌 옆에 붙어 있으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저러는 겁니다.”

    “그게 뭐가 나쁩니까?”

    갑작스러운 경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물론 김원오의 시선까지.

    “아까부터 재벌, 재벌 하시는데 화진 픽쳐스는 PPL은 안 받고 드라마를 제작하는 모양이죠? 제가 알기론 방송국에서 나오는 제작비로는 드라마 제작이 불가능할 텐데 그 비법이 궁금하네요. 한 수 가르쳐 주시죠?”

    “…….”

    “왜 말씀이 없으시죠? 어차피 화진도 PPL 받아서 드라마 만들면서 이렇게 따지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단지 제가 재벌 아들이라서? 색안경부터 끼고 보시는 건 아닙니까?”

    “이거 봐요, 민 대표!”

    “네, 아까부터 보고 있었습니다, 김원오 대표님. 대표님께서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저, 쉽게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다. 이 바닥에 들어와 10년 동안 열심히 일했습니다. 네, 새명 도움 받아 편히 드라마 제작했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게 새명이 힘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굳이 새명이 아니었다고 해도 제작비 대겠다고 나선 회사들이 많았거든요.”

    “…….”

    “대표님은 제가 아버지 회사인 새명 덕을 보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대표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바닥은 실력이 전부인 거. 학연이니 지연이니 아무리 인맥으로 드라마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해도 실력이 받쳐 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분명 표정은 온화했지만 눈빛은 살벌했고, 세 치 혀에서 나오는 말은 따끔했으니 지켜보고 있던 다른 제작사 대표들도 넋이 나가 있었다.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건 정명도 하나.

    그는 문득 예전이 떠올랐다. 과거 고명희 문제 때문에 그에게 약점이 잡힌 것도 모자라 내일 프로덕션에서 잘나가는 김경진 작가와 정해용 감독 콤비를 내보내라고 했던 때가 문득 떠올랐으니 경우 모습이 딱 그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그렇게 말을 했으면 좀 들어야지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굳이 건드리는지, 정명도는 궁지에 몰린 김원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화진 픽쳐스…… 시청률이 제일 잘 나왔던 드라마가 뭐였죠? 아, 예전에 송지현 작가님 드라마였죠? 송지현 작가님 나가고 나서 화진 픽쳐스가 침체기에 들어간 건 화진 픽쳐스가 원래 잘했다기보다 순전히 송지현 작가님 실력 아닙니까?”

    “그건 스튜디오 글로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송지현 작가님께만 매달리진 않거든요. 송지현 작가님의 드라마가 시청률이 잘 나오긴 하지만 다른 작가님들 작품도 못지않아요. 계속 신인 작가들을 뽑고 교육하고, 나름의 커리큘럼도 잘 갖추고 있습니다만. 그만큼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부터요. 근데 화진 픽쳐스는 무슨 노력을 하고 있나요? 저한테 이러시는 걸 보면 뭔가 특별한 게 있나 봅니다?”

    “…….”

    “그게 아니면 괜한 자격지심인가?”

    결국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김원오는 이렇다 할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민 대표. 김 대표 저 친구가 예전엔 저렇게까지 날이 선 사람은 아니었는데.”

    “전임 대표님 물러나시고 김 대표가 회사를 맡으면서 제작사가 예전만 같지 않아서 저러는 거예요. 특히나 화진 픽쳐스의 자랑인 송지현 작가가 스튜디오 글로리로 옮겼으니 민 대표한테는 유감이 많을 겁니다.”

    “그게 어디 민 대표 잘못입니까? 솔직히 송 작가가 스튜디오 글로리로 가기 전에 이미 화진하고는 끝이 났잖아요. 붙잡지 못한 걸 두고 다른 사람을 탓하다니요? 말도 안 되는 거죠.”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하던 이야기 마저 하시죠.”

    방금 전까지 그런 말을 해 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 짓는 경우의 모습에 사람들은 생각했다. 경우는 절대 적으로 돌려선 안 되는 사람이라고.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뼈도 못 추릴 거란 위기감이 엄습했다.

    * * *

    새명 유통의 복합 쇼핑몰 2호점이 건설 중인 화정시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새명 자동차의 자율 주행 모터쇼가 진행되고 있었다. 앞으로 오픈할 복합 쇼핑몰 2호점도 홍보할 겸 그곳이 좋겠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민정현은 어쩔 수 없이 따랐다.

    물론 처음엔 동생 지선이만 좋은 일 시키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잘만 하면 복합 쇼핑몰이 들러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만큼 모터쇼는 생각보다 성황을 이뤘고 새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더라도 장치를 달기만 하면 기존 자동차를 자율 주행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할 거라는 계획 발표에 지켜보던 시민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민정현은 몇 년 전, 고정시에서 복합 쇼핑몰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가 떠올랐다. 유능한 동생을 바라만 보며 마음에도 없는 축하를 건네야 했던 그때.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으니.

    “고생 많았다. 우리 장남, 아주 장해!”

    “축하해, 오빠.”

    “고생 많았어, 형.”

    툭툭 어깨를 두드리던 아버지의 손길에 민정현은 가슴이 벅차오를 것 같았다. 모터쇼를 하게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 준호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깨달을 새가 없었다.

    사실 민준호는 이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자율 주행 기술이 벌써 완성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경우가 거짓된 서류로 자신을 낚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어차피 금방 들통날 일이니 그럴 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형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 아닌가 오히려 불안해졌다. 그런 그에게 민지선이 다가왔다.

    “오빠 참 대단해. 난 처음에 오빠가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성공한 걸 보면 오빠도 한 칼은 있었던 모양이야.”

    사심 없이 말하는 누나의 모습에 민준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 그렇게 여유 부릴 때야?”

    “어차피 이번 일로 모든 게 판가름 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이번 일로 새명 자동차 실적이 급증하면 어떻게 될까? 쇼핑몰에서 아무리 옷을 판다고 해도 차 한 대 파는 것에 비할까?”

    “비교도 안 되겠지. 하지만 옷은 누구나 살 수 있어도 자동차는 아무나 못 사잖아? 간단한 문제는 아냐.”

    “당당해서 좋겠네.”

    “설마 지금 내 걱정 하는 거야? 난 너 오빠랑 손잡은 줄 알았더니?”

    “걱정을 하긴 누가 걱정했다고? 그냥…… 그동안은 아버지 마음이 누나한테 가 있었던 건 사실이잖아. 이번 기회로 형한테 주목을 뺏겨서 어떤가 궁금했던 것뿐이야. 머지않아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면 볼만하겠어.”

    투덜대며 돌아서는 동생을 보며 민지선은 생각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어쨌든 아버지와 오빠의 다정한 모습에 민지선은 씁쓸함을 삼키고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런 누나를 보며 민준호 또한 생각했다. 경우가 그 서류를 자신에게만 줬을까? 누나에게 주지 않았을까?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그날, 밤이 늦은 시간, 민정현은 주방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침 자다 깬 아내 배예원이 놀란 얼굴로 나와 남편 옆에 앉았다.

    “당신, 안 자고 뭐 해?”

    “그냥…… 잠이 안 와서.”

    “왜? 오늘 모터쇼 잘했다며?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문제는 무슨. 그런 거 없어.”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그런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 믿을 사람이 어디 있어?”

    “내 얼굴…… 이상해?”

    “그래. 무슨 일인데? 말해 봐, 응?”

    “그냥…… 오늘 아버지 좋아하시는 얼굴 보니까 마음이 좀 그랬어.”

    “하긴. 아버님이 그동안 당신한테 너무 무심하셨어. 원래 안 그러던 분이 그러니까 얼마나 서운했다고.”

    “당신 서운했어?”

    “당연하지. 어머님은 몰라도 아버님은 항상 날 먼저 챙겨 주셨는데 작년 어머님 생신 때만 해도 그래. 만날 새아가, 새아가. 이젠 동서만 챙기고 얼마나 서운했다고.”

    “거긴 막내고 결혼한 지도 얼마 안 됐으니까 더 신경 쓰여서 그러신 거지. 으이구, 우리 여보. 질투 났구나?”

    “질투는 무슨…….”

    “얼굴에 쓰여 있는데 뭘. 이러다 잠 깨겠어. 나 한 잔만 더 마시고 들어갈 테니까 당신 얼른 들어가 자. 응?”

    “딱 한 잔만 해야 해.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알았어.”

    아내가 들어가자 홀로 남은 민정현은 술병을 들었다. 취하지도 않았는데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으니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잡았지만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사실, 다른 누구보다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입단속을 시켜 모터쇼도 무사히 끝냈지만 이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는 거.

    괜한 짓을 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좋아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 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부족한 기술이 완성되길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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