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풍전등화 (2)
예상치 못한 소식에 민정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탓에 보고를 마친 윤 부장은 떨고 있었다.
“윤 부장,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죄송합니다.”
“지금 죄송하다는 말 듣자는 게 아니잖아요. 재경이라니……? 어떻게 재경이 우리도 못 한 걸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이 워낙 구체적이다 보니 마냥 무시하기에도 그런 것 같아서…….”
“그럼 지금, 확실하지 않은 걸 가지고 보고한 겁니까? 윤 부장, 나랑 하루 이틀 일해요? 무슨 일을 그렇게 합니까? 내가 원하는 건 언제나 정확한 팩트라는 거 몰라서 그래요? 다시 가서 재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 오세요! 알겠어요?”
“네, 사장님.”
고개를 꾸벅 숙인 윤 부장이 밖으로 나가자 민정현이 이마를 짚었다.
재경에서 벌써 개발 완성 단계라니, 벌써…….
씨랩스를 인수하려 했던 당시, 민정현은 경음 그룹은 물론 재경에서도 씨랩스에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자동차 춘추전국시대. 어느 곳이 더 낫다, 못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명은 경음, 재경과 함께 경쟁을 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기술을 먼저 내놓는다면 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테니 그만큼 자율 주행은 자동차 산업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게 분명했다.
그 때문에 다른 기업에서도 탐내는 씨랩스를 서둘러 인수했던 거였고 자율 주행 자동차 개발로 시장을 이끌어 가는 건 새명 자동차가 될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 번번이 실패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연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 그런 와중에 후발 주자였던 경쟁사에서 개발 완성 단계라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으니 속이 탈 수밖에. 민정현은 부디 윤 부장의 소식이 잘못된 거였길 진심으로 바랐다.
* * *
그동안 상의할 일이 있다며 도은철과 전화 통화도 여러 번 했으나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자 경우는 감회가 새로웠다.
“드라마 홍보 때 만나고 일 년 만이에요.”
“그러게요. 시간이 참 빠르죠?”
“네. 꽤 오랫동안 고민하시더니 드디어 결정하셨네요.”
“가서 결국 까이고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한 번은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 영영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만약 잘된다면 후배들한테도 길을 열어 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 제의를 받았던 도은철은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누구보다 경우에게 먼저 알렸으니 이 자리는 그런 도은철의 결정을 축하하기 위한 거였다.
“그럼 지금 한창 바쁠 때 아니에요? 준비할 것도 많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뭐, 비자 같은 건 그쪽에서 알아서 해 주니까 별걱정은 없는데……. 사실 영어가 가장 문제예요. 내가 연기는 참 완벽한데 영어가 중학생 수준이거든요. 과외 선생이랑 같이 죽자고 공부하기는 하는데 옛날 어른들 말씀이 왜 그렇게 생각나던지…….”
“어른들 말씀이라면……?”
“나이 먹어서 공부하는 거 아니더라고요. 머리가 터지겠다니깐. 겨우 외웠는데 자고 일어나면 전부 까먹고. 가뜩이나 외국 사람들 만나면 울렁증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이놈의 영어로 대사를 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그쪽에서도 그거 감안하고 캐스팅한걸 거예요. 그리고 대화는 몰라도 대사는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남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참, 민 작가는 영어 잘한다고 했죠? 아, 미국 드라마도 썼다지? 도대체 못 하는 게 뭡니까? 아무리 봐도 뭐 하나 빠지는 게 있어야지.”
“그런 말씀 마세요. 저도 알고 보면 허점투성입니다. 어쨌든 대단하세요. 전부터 느낀 거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이 참 대단하신 거 같아요. 낯선 곳에 가서 연기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게…… 누구 덕분에 확 깨달았거든요. 내가 참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구나.”
“그래서 주말 오후에 하필이면 여기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도은철이 말한 누구가 자신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경우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도은철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 주변으로 수군거리며 카메라로 찍고 있는 여자들이 많았던 탓이었다.
도은철이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곳은 SNS에서 유명한 감성 카페. 맛도 맛이었지만 그보다는 카페 분위기나 예쁘고 아기자기한 모양의 케이크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 때문에 손님의 대부분이 SNS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한 사람들이었고 확실히 여자 친구를 따라온 남자가 아니라면 대부분이 여자 손님이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사진을 찍고 있는 통에 경우는 살짝 부담을 느끼고 있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도은철은 오히려 그런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이게 바로 스타의 삶 아니겠습니까? 이제 미국 가면 이런 거 느낄 새도 없을 텐데 한국에 있는 동안이나 실컷 느껴야죠. 작가님도 즐기세요.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기분 느껴 보겠습니까?”
전보다 성숙해졌다고 느꼈던 것도 잠시, 사람 근본은 참 바뀌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덕분에 스타의 삶이 어떤 건지 살짝 맛본 경우는 급격히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참, 협회장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거액의 기부금을 내셨다고요. 감사합니다.”
“배우로서 당연한 일이죠. 촬영장 불탔다는 소식 들었을 때만 해도 진짜 암담했는데 재건한다니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제 첫 촬영지가 거기였거든요.”
“그러셨군요. 몰랐어요.”
“제가 남들보다 데뷔가 늦었어요. 군대 제대하고 했으니까. 아무것도 몰라서 어리버리하게 첫 촬영을 나간 기억이 아직도 나요. 근데 그런 곳이 불탔다고 하니까 제 추억이랑 그런 게 다 사라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민 작가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괜히 부끄럽네요.”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를 훈훈하게 이어 가고 있던 그때 서빙하는 직원이 먹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예쁜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저희 이거 안 시켰는데요.”
“그게, 저쪽 테이블에 앉으신 손님이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서빙 직원의 말에 그쪽을 돌아보자 예쁜 두 아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부끄러워 손으로 얼굴을 반쯤은 가리면서도 경우와 도은철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도은철이 감사의 뜻으로 살짝 눈인사를 하자 여자들이 자지러지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도은철이 서빙 직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맙다고 전해 주시고 괜찮으시면 가실 때 사진 촬영해드리겠다고 전해 주세요.”
“저기, 그게…….”
도은철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서빙 직원이 이내 입을 열었으니.
“실은 저 손님이 이거 드리는 분은 이쪽 분이시거든요.”
도은철이 아닌 경우를 가리키는 서빙 직원의 모습에 도은철은 물론 경우도 깜짝 놀랐다.
“네? 저요?”
“네. 분명 민경우 작가님 팬이라고…… 작가님께 드리라고 하셨어요.”
순간 민망해하는 도은철과 눈이 마주친 경우는 이런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우면서 웃겼으니 애써 웃음을 참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저는 사진까지는 안 될 것 같은데요.”
“네,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저기, 그리고…….”
용건은 끝난 것 같은데도 머뭇대는 서빙 직원의 모습에 경우가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실은 저도 작가님 팬인데요, 여기다 사인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방금 전까지 점잖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흥분한 채 앞치마를 들이대며 사인을 요구하는 서빙 직원의 모습에 경우는 무척 당황했다. 간절한 모습에 결국 사인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경우가 앞치마에 사인을 하는 동안 도은철은 식어 버린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사인을 받은 직원이 행복한 얼굴로 돌아가자 토라진 도은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기부금, 취소해도 됩니까?”
먹기에도 아까운 케이크는 어느새 도은철의 배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 * *
이 일을 어떻게 보고해야 하나 싶은 윤 부장은 한참 동안 사장실 앞에서 차마 들어가지도 못한 채 서성이고 있었다. 분명 민정현이 알면 날벼락이 떨어질 일이었다. 망설이던 끝에 한숨을 내쉰 그가 결국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청명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민정현의 앞으로 윤 부장이 다가가자 서류를 들여다보던 민정현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재경 쪽에서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고 합니다. 계획대로라면 내달쯤 발표를 할 거라고 합니다.”
“뭐라고요? 그거 확실해요?”
“네, 제가 내부 관계자를 통해 어렵사리 얻은 정보입니다. 벌써 여러 번 시험 운전을 마쳤고 내년 2월쯤엔 모터쇼까지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르고 있었다면 한 방 먹을 뻔했다는 생각에 민정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도 해결 안 됐답니까?”
“그게…… 100㎝가 고빈 것 같습니다.”
“100㎝가 고비라니 그건 무슨 말입니까?”
“장애물 높이가 100㎝만 넘어도 인식을 해서 멈추는데 그 정도 높이가 안 되면 복불복이라 인식을 못 하고 멈추지 않을 때가 있다고…….”
불호령이 내려질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민정현은 잠잠했다. 윤 부장의 말에 그는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윤아 키가 몇 센치였더라?’
생각을 하던 민정현이 이내 입을 열었다.
“100㎝면 한 4~5살 정도의 아이, 아닙니까?”
“그, 그렇죠.”
“근데 요즘 같은 세상에 4~5살 짜리 아이를 혼자 밖으로 내보내는 부모는 없겠죠?”
“그럼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그런 어린애를 혼자 내보내겠습니까?”
“그러면 100㎝에 연연해하지 말라고 전하세요.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자전거, 비슷한 크기의 차를 제대로 인식해서 멈출 수 있는지 그걸 중점적으로 확인하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쩌시려고 그러시는지…….”
“이 바닥에서 두 번째는 의미가 없습니다. 무조건 첫 번째여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어차피 애들은 혼자 다닐 일 없으니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만 잘 커버된다면 재경보다 우리 쪽에서 먼저 발표하는 겁니다. 날짜를 보니…… 1월 6일 토요일이 좋겠네요. 그래야 사람들도 많이 오고 홍보가 될 거 아닙니까?”
“사장님! 지, 지금 그 말씀은 미완성인 채로 발표를 하―.”
“미완성이라니요! 윤 부장, 말씀 가려 하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세상 어느 차든 약간의 결함은 있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리콜이 왜 있는데요? 결함이야 차차 보완하면 되는 거죠. 어차피 자율 주행이 나왔다고 해서 사람들이 지금 당장 차를 바꾸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첫 번째라는 선점이 중요해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
“……네, 사장님.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준비 서두르세요. 당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윤 부장이 사장실 밖으로 나왔다. 꽉 조인 넥타이를 당겨 느슨하게 풀었지만 어딘지 답답한 이 마음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벌자고? 발표를 먼저 하고?
이런다고 사람들이 속아 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이 일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윤 부장은 너무 암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윤 부장의 그런 마음과 달리 민정현은 이번 일을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한다는 강박 탓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