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31화 (231/250)
  • #231. 풍전등화 (1)

    문을 닫은 지 거의 일 년 만에 북양주 종합 촬영소가 다시 문을 열고 첫 촬영을 시작했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영화사의 작품이 첫 번째 촬영을 하는 행운을 얻었다.

    사실 촬영소가 문을 연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여러 제작사들로부터 촬영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으니 협회에서는 촬영 스케줄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고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장 쉬운 방법인 선착순으로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에 마침 정명도와 함께 상량식에 참석하기 위해 협회를 찾았던 경우가 나섰다.

    “혹시 어떤 영화사인지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마침 영화사와 영화 제목이 적힌 목록을 보게 된 경우는 유심히 한 영화의 제목에 시선이 끌렸다. 테이블 위엔 관련 영화 시놉시스까지 올려져 있었으니 경우는 선 채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저는 이 영화가 좋을 것 같은데 괜찮다면 이 영화사에 먼저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요?”

    “혹시 아는 사람이 하는 곳입니까?”

    “아니요. 그냥 시놉시스 보니까 재밌어서요. 이 영화, 잘될 것 같거든요. 남들은 미신이라고 뭐라 할지 모르지만 뭐든 시작이 중요하잖아요. 처음 촬영한 영화가 잘되면 앞으로 촬영소도 잘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작가님은 그 영화가 잘될 것 같다, 이 말이죠?”

    “네.”

    “그럼, 그렇게 하죠. 가뜩이나 어떻게 할지 난감했는데 잘됐네요.”

    활짝 웃는 경우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던 정명도는 다시 한번 영화 제목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진짜 이 영화사에 지인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왜 자꾸 의심하세요?”

    “아니, 이 영화가 잘될 거라니 그렇죠.”

    “네. 천만까지는 아니어도 한 700만은 가뿐히 넘길 거라고 보는데요?”

    “코미디 영화가요? 요즘 코미디 영화 잘된 거 거의 못 본 것 같은데…….”

    “제 감을 믿어 보세요. 아시잖아요. 저 감 좋은 걸로 유명한 거.”

    “……네, 좋습니다. 뭐, 흥행 여부가 뭐 중요하겠습니까? 작가님 의견이 중요한 거죠. 시간 됐는데 이제 출발하시죠.”

    코미디 영화가 흥행할 거란 생각을 아예 못하는 정명도의 모습에 경우는 피식 웃었다. 하긴, 요즘처럼 코미디 영화가 침체된 적도 없었으니까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근래에 보기 드문 흥행작이었으니 나중에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랄 정명도 생각에 경우는 벌써부터 웃음이 났다.

    어쨌든 두 사람은 그렇게 북양주 종합 촬영소를 찾았다.

    다 타 버린 바람에 시꺼먼 잿더미만 남아 있는 곳에 어느덧 기둥을 세워 뼈대라도 집의 형태가 갖춰진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소식을 듣고 관계자는 물론 취재를 나온 기자들까지 있어 현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붐볐다.

    상량식은 옛날에 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운 후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마룻대를 올리면서 행하는 의식이었다. 어떻게 보면 고사를 지내는 것과 비슷했다.

    집주인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일을 추진해 온 경우와 제작사 협회장을 맡고 있는 정명도가 대표로 절을 올렸다. 물론 목수들이 한잔할 수 있도록 돈 봉투를 두둑이 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드디어 마룻대가 광목 끈에 묶여 위로 올라갔다. 부디 다시는 불에 타지 않고 이곳에서 좋은 영화, 드라마를 만들 수 있길 경우는 기도했다.

    그렇게 상량식이 끝난 후 경우는 조금씩 공사가 진행되는 민속 마을 세트를 돌며 정명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깜빡하고 말씀 안 드린 게 있는데요. 요즘 협회로 민속 마을 재건하는 데 보태고 싶다고 기부금이 많이 들어옵니다. 일반 시민들도 있지만 각 회원사에서 보내온 덕에 재정적 여유가 생길 것 같아요.”

    “그것참 잘됐네요. 처음에 촬영소 인수하자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회원사들이 탈퇴할 거라고 걱정하시더니 꼭 그렇지도 않네요.”

    “그거야 솔직히 작가님 때문이죠.”

    “저요? 아니 왜……?”

    “잘나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연줄이 닿고 싶은 법입니다.”

    “제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작가님은 가만 보면 본인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요. 이렇게 큰 촬영소를 인수할 수 있을 만한 재력도 있고, 그동안 방송국이 쥐고 절대 놓지 않으려 했던 판권도 제작사 쪽에 돌려주게 할 만큼 힘도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작가님 서포트가 없었다면 판권 문제는 힘들었을 겁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긴 한데요, 그렇다고 연줄 닿아 봤자 이득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요?”

    “워렌 버핏이랑 밥 한번 같이 먹는 게 왜 그렇게 비싼 건데요? 연줄은 그런 겁니다. 굳이 뭘 하지 않아도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발휘하는 거죠. 그나저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 촬영소를 통째로 협회에 내놓은 거 말입니다. 후회하실 것 같은데요?”

    “솔직히 말하면 후회됩니다.”

    “그럼 다시 가져가세요.”

    “싫습니다. 여긴 개인이 소유하는 것보다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으니까요. 만약 스튜디오 글로리 소유로 한다거나 제 개인 소유로 했다가 여차하면 팔아 치울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럼 이번에 겪었던 혼란이 또 생기겠죠.”

    “그래서 협회 소유로 하시려는 거군요.”

    “네. 지금은 아니라지만 저부터 딴마음 먹고 촬영소 문을 닫아 버리면 곤란하잖아요. 그리고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는 어차피 대여료도 안 내는데 길게 보면 손해도 아니죠.”

    “어쨌든 시민들 기부도 이어지고 있으니 민속 마을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는 것도 금방일 겁니다.”

    “아, 협회장님만 괜찮다면 회원사 모임을 한번 가지면 좋을 것 같은데요. 기부금도 냈는데 뜻한 바를 이루게 해 줘야 할 것 같아서요.”

    “좋습니다. 안 그래도 앞으로 협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나 고민이 있었거든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회원사 모아 놓고 안건을 정해도 좋겠군요.”

    “장소는 제가 제공하겠습니다.”

    “참, 다다음 주 토요일 저녁에 시간 좀 내주세요.”

    “다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 이거 어쩌죠? 이번엔 안 되겠는데요. 중요한 거 아니면 다음으로 미루시죠. 집안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서요.”

    “죄송하지만 취소 못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라 웬만하면 작가님이 참석하셔야 해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 평소와 다른 정명도의 모습에 경우는 의아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 * *

    모처럼 민 회장의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름 아닌 집안의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가 있었으니.

    “어머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어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축하드립니다.”

    “그래, 바쁜데 일부러 시간 내서 다들 와 줘서 고맙구나.”

    자식들은 물론 며느리에 사위까지 한자리에 앉은 윤정숙과 민 회장은 흡족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모두 모였어야 할 이 시간에 딱 한 사람 보이지 않았으니 바로 경우였다. 곧바로 민준호가 날 선 눈빛으로 강희주를 째려보았다.

    “제수씨, 경우는요?”

    “저…… 급한 일이 있어서요.”

    “우리도 급한 일 다음으로 미루고 왔는데 이렇게 중요한 날, 막내가 빠지면 안 되죠.”

    분위기가 얼어붙으려던 찰나 윤정숙이 입을 열었다.

    “넌 왜 새아가한테 그러니? 바쁜 일이 있는 건 경운데 괜한 데다 화풀이할 거 없어!”

    “어머니, 화풀이가 아니라―.”

    “진작 나한테도 연락해서 양해를 구했다. 그러니 더는 뭐라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윤정숙의 꾸지람에 기가 죽은 민준호가 결국 입을 다물자 이번엔 민정현이 나섰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날인데 웬만하면 미루지, 경우가 이번엔 좀 너무했네요.”

    “오죽했으면 그랬겠니? 그리고 생일이 이번 한 번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왜들 호들갑이야? 됐으니까 그만들 해.”

    그렇게까지 엄포를 놓으니 민준호는 물론이고 민정현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경우를 비호하는 이유도 곧 알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가족이 거실에 둘러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은상 예술 대상 시상식. 강희주가 손에 땀을 쥔 채 지켜보고 있었으니 마침내 시상자가 카드를 열었다.

    “제53회 은상 예술 대상. 공로상 수상자는…… 민경우 작가님, 축하합니다.”

    멋지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경우가 단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알 만한 배우들 사이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았으니 그의 모습에 강희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좋아서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마침내 상패를 받은 경우가 마이크 앞에 섰다. 순간 모두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쏟아져 나오는지 집중하느라 숨죽이고 있었다.

    “아직 공로상을 받을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특별한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도 많은 스탭들과 연기자들은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바꿀 순 없겠지만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시청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집에서 방송을 보고 있을 가족들과 제 아내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경우의 마지막 말에 다들 윤정숙에게 시선이 향했으니 살포시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드럽고 편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뭐라 해야 하나 어색해하는 그때 민지선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축하해, 올케.”

    “축하합니다, 처남댁.”

    “제가 한 게 있어야죠.”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다. 경우의 경사가 곧 새아가의 경사나 다름없지. 그리고 새아가가 내조를 잘하니 경우가 밖에서 저렇게 인정받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 축하받을 만해.”

    “감사합니다, 어머님.”

    “축하해, 동서.”

    “축하해요, 제수씨.”

    윤정숙의 말 때문이었는지 민준호와 민정현도 마지못해 강희주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흉악범을 취조해도 떨지 않는 그녀였건만 확실히 남편 없이 혼자 방문한 시댁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혹시나 실수하지 않을까 내내 마음 졸이고 있던 그녀는 그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근데, 솔직히 경우 말마따나 공로상을 받기엔 경우 나이 아직 어리지 않나? 내가 듣기론 공로상은 주로 원로 배우들이 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장인어른, 주최 측에서도 꽤 곤란했던 모양이에요.”

    민 회장의 물음에 답한 건 그쪽 사정을 잘 아는 안청모였다.

    “곤란하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사실 이번에 처남이 만든 이라는 드라마가 뜨거운 감자였다고 하더라고요.”

    “그 드라마, 뉴스에도 많이 나왔던 것 같은데. 아시아에서 뭐 1등 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뜨거운 감자라니…….”

    “처남이 드라마를 꽤 잘 만들었어요. 덕분에 우리나라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웹플릭스가 자리 잡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고요. 문제는 처남이 만든 드라마가 방송국에서 방송한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에요.”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 어차피 드라마잖아.”

    “네. 사람들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방송국 측에서는 그렇게 느끼지 않은 거겠죠. 이번에 이 흥행한 걸 보고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거든요. 갈수록 방송국들의 시청률은 줄어가고 있는데 웹플릭스는 흥행하니 큰 위협으로 느껴졌을 겁니다. 그래서 은 전파를 탄 방송 프로그램이 아니라고 후보에 오르는 것조차 반대했던 모양이에요. 안 그러면 은상 예술 대상을 아예 방송하지 않겠다고 보이콧 선언까지 했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거기다 처남이 드라마 판권을 제작사 쪽에 돌려주는데 힘을 쓰는 바람에 미운털이 박혔거든요. 그런데 북양주 촬영소 문제를 해결했으니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라도 처남의 공을 모른 척하기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로상을 준 거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지. 시대가 바뀌고 있는데 그런다고 변화를 막을 수 없는 노릇 아냐.”

    “그러게요. 트렌드에 민감하다고 할 수 있는 방송 관계자들이 저렇게 꽉 막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놀랍네요.”

    민 회장의 분개에 윤정숙까지 거들고 나섰으니 분위기는 삽시간에 가라앉아 버렸다. 그때 민 회장의 시선이 장남 민정현에게로 옮겨갔다.

    “그나저나 그 자율 주행은 어떻게 되고 있어? 연내에 나올 것 같으냐?”

    “그럼요, 아버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습니다. 곧 있으면 시제품이 나올 겁니다.”

    “그래. 이왕 시작한 거 경쟁사보다 우리가 먼저 선점해야 한다. 알았냐?”

    “네, 아버지.”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형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음을 민준호는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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