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30화 (230/250)
  • #230.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알게 하라 (4)

    북양주 종합 촬영소가 다시 문을 연다는 소식은 각종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전해졌다. 전소해 버린 민속 마을을 재건한다는 계획과 함께, 시설 재정비만 마치면 곧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는 소식에 가장 반가워하는 건 아무래도 영화인들이었다.

    드라마는 그나마 방송국 세트장이 있으니 사정이 나았지만 영화는 그렇지 못했다. 규모가 어느 정도 큰 영화사라면 모를까 소규모 영화사는 여러모로 곤란을 겪고 있었으니 어쨌든 이번 소식으로 촬영에 애로를 겪고 있던 영화 제작사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영부위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부산에 촬영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부산까지 촬영소가 완공된다면 영화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거란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덕분에 그간 경우의 능력을 그저 재벌집 아들의 취미 생활이라고 애써 폄하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를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건 당연했다.

    사실 이번 일의 공은 전적으로 정명도에게 있었다. 그 전에도 그렇지만 협회가 생기고 난 후 경우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정명도는 아는 기자를 총동원해 경우의 업적을 일일이 나열하며 그를 찬양하는 수준의 기사를 썼다. 당사자는 무척 당황했지만 주변 이들은 상당히 즐거워했다.

    지금 경우의 눈앞에서 기사를 소리 내 읽고 있는 민지선처럼.

    “평소 열악한 드라마 제작 환경에 관심을 보이며 이를 개선하려 노력하는 민경우 대표는 자신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작은 변화가 온다면 그걸로 만족한다는 소박한 뜻을 밝혔다.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는 민경우 대표의 앞으로 행보가 기대된다.”

    “그만 좀 해. 벌써 몇 개째 읽고 있는 거야?”

    “한 다섯 개만 더 읽자. 이렇게 네 이야기로 기사가 도배가 되는 것도 처음이잖아. 아니다, 예전에 너 말썽 부렸던 거 들통났을 때, 그때도 이렇게 네 기사로 도배됐었지?”

    “아, 누나! 진짜 남의 흑역사를…….”

    “대견해서 그렇지. 말 그대로 개과천선이 따로 없잖아. 과거에 이랬던 녀석이 지금은 이렇게 컸다. 이게 바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 아냐? 솔직히 엄친아는 재미없지. 내가 생각해도 잘난 것들은 재수 없는데 누가 좋아하겠어? 근데 네 이야기는 다르잖아. 뭔가 인간미 같은 게 느껴져.”

    “두 번만 더 인간미 느껴졌다간 땅속으로 꺼지겠어. 도무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어야지.”

    “너는 좀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어. 그런 말도 있잖아? 관종.”

    “지금 나보고 차라리 관심종자가 되라 그 말이야?”

    “아니. 네가 그럴 위인이라도 되니? 내 말은 어차피 네가 하는 일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랬다고 너도 좀 즐기라고. 좋잖아?”

    “동생 놀리는 말을 참 점잖게 길게도 한다.”

    “어머, 들켰네. 근데 대견하다는 말은 진심이야. 원래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할 땐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 제일 중요한 법이잖아. 근데 넌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거잖아. 그런 면에서 우리 동생,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해. 진심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누나의 모습에 경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처음 한웅에게 형들의 약점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을 때 누나까지 포함했던 건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한웅에게 괜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뿐.

    당연히 형들, 특히 후계자에서 밀려난 준호 형에겐 약점 잡을 만한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를 얻었으니 사실 경우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거였다.

    마침내 이야기를 꺼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경우가 누나를 불렀다.

    “누나.”

    “왜? 무슨 일인데 그렇게 목소리를 쫙 깔아?”

    “케이맨군도에 SPDC라는 회사말이야.”

    경우의 입에서 나온 낯익은 이름에 민지선은 당황하다 못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패션관련 회사라고 하는데 실체가 없는 페이퍼 컴퍼니더라고.”

    “어떻게 알았어? 너 혹시 내 뒷조사 같은 거 하고 다니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비슷해.”

    동생의 입에서 그 회사의 이름을 들을 줄 몰랐던 민지선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케이맨군도는 조세 회피 지역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재벌들은 해외에 페이퍼 컴퍼니나 위장 계열사를 차려 두고 거래를 위장해 세금을 탈루하는 방식으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했다. 국내에 있는 회사가 조세 피난처의 페이퍼 컴퍼니와 거래가 있는 것처럼 속여 대금을 지급하거나 실제보다 과다하게 대금을 지급해 자금을 유출했다.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새명 유통뿐이었던 민지선은 재벌들에게 익히 알려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비자금을 마련했고 경우에게 지분을 산 돈도 이런 식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경우야!”

    “딱히 누나가 나쁘다고 책망하는 거 아냐. 아버지도 그런 방식으로 모아 놓은 돈 좀 있지 않겠어? 다른 재벌들도 다 하는 방법인데, 뭘. 희주 씨 외삼촌도 그 문제 때문에 한 번 시끄러웠잖아. 결국 부하 직원이 책임지는 걸로 해결됐으니까.”

    “…….”

    “사업하다보면 불법 하나씩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해. 불법이라기보다 어떻게 보면 법을 교묘히 이용하는 거지. 절세라고 하잖아? 근데도 내가 이런 말을 꺼내는 건…… 누나는 희주 씨 외삼촌이랑은 다르잖아. 사방에 적이 깔려 있는데 누나가 실수하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미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조심하라고.”

    재벌들이 조세를 피해 해외에 재산을 은닉하는 건 거의 통상적인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휘청이고 예전만 같지 않다는 위기 속에 세금 한 푼이 아쉬운 각국 정부는 조세 피난처를 대대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세계의 은행이라 불리는 스위스조차도 은행 고객의 명단을 공개하는 판에 누나가 감춰 놓은 비자금이 언제까지고 안전하게 비밀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 누구한테 무슨 소리라도 들은 거야?”

    “아니, 아직까진 없으니까 걱정 마.”

    그렇다는 건 앞으론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나 진배없으니.

    “그나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 알게 된 걸 다행이라 여겨. 만약 형들이 먼저 알았다면 어떻게든 이 문제를 더 키웠을 거야. 후계자가 문제가 아니라 검찰청 앞 포토 라인에 서야 했을지도 모르지.”

    “그래, 고맙다. 조심할게.”

    경우가 돌아간 이후 생각에 잠긴 민지선은 이내 키폰 버튼을 눌렀다.

    “박 실장, 내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대표님.]

    민지선은 박 실장이 오기 전까지 창밖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 * *

    민준호는 형이 막 결혼했을 때 한 번 와 본 이후로 발걸음하지 않았던 그의 집을 찾았다.

    함께 저녁을 먹고 거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현의 아내 배예원이 윤아를 재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은 부엌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민준호의 잔에 술을 따르던 민정현이 피식 웃었다.

    “왜?”

    “아니, 네가 우리 집에서 이러고 있는 게 신기해서.”

    “형제끼리 술도 한잔 할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래, 그렇긴 한데…… 늘 아버지 집에서만 먹었잖아. 근데 우리 식구만 있던 집에 네가 오니까 우리 집이 약간 낯설다고 할까? 아무튼 좀 이상해.”

    “나쁘다는 건 아니지?”

    “그럼. 좋아. 앞으로 종종 와. 밖에서 먹는 것도 괜찮지만 이렇게 집에서 먹으니까 난 더 좋은 것 같다.”

    “하여간 눈치도 없어. 내가 자주 오면 형수가 좋아하겠어? 가뜩이나 나 어려워하는데.”

    “그러려나?”

    “결혼도 안 한 나보다도 모르면 어쩌자는 거야?”

    “어쩌긴. 그래도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잖아. 그러니까 너도 결혼해.”

    “형!”

    “알아. 네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아무렴 형이 너 놀리려고 그러겠어? 형은 말이다, 네가 어서 빨리 결혼해서 안정을 찾았으면 좋겠다.”

    “갑자기 뭔 소리야? 술 취했어?”

    “아니, 정신 말짱해. 솔직히 난 네가 지금까지 결혼 못하고 있었던 건 그 여자 때문도 있었지만 조건만 따지다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서. 조건…… 중요하지. 근데 마음이 맞는 게 더 중요하더라. 가화만사성이라고 심리적으로 안정이 돼야 일도 더 잘되는 거 아니겠어? 임원들이 너를 보는 시선도 달라질 거고.”

    “여자나 소개해 주고 그런 말해.”

    “그럴래? 정말 여자 소개해 줘?”

    “됐어. 하여간 형한테 내가 이런 소리를 들을 줄 몰랐다. 근데…… 명하일보 금지옥엽 막내딸이랑 결혼한 형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네 형수랑 선봐서 결혼하기는 했어도 난 첫눈에 반한 케이스라고. 아마 그때 반하지 않았다면 네 형수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진짜라니까.”

    본인은 아니라지만 살짝 취기가 돈 탓에 평소보다 긴장이 풀어져 있던 형의 눈치를 살핀 민준호는 슬쩍 화제를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형 일은 잘 되고 있어? 그 자율 주행인가? 그거.”

    “갑자기 그건 왜?”

    “아니, 결국 자동차 쪽으로 옮겨 간 것도 결국 씨랩스 때문이잖아. 그거 인수 안 했으면 형이 자동차로 옮기진 않았을 거 아냐?”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어쩌면 아버지는 대표로서 내 능력을 보고 싶으셨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지선이도 유통 대표로서 자기 몫을 해내고 있는데 내 능력이 어디까진지 확인하고 싶으셨던 거겠지. 그러니 굳이 씨랩스 인수가 아니더라도 아버지는 나를 다른 곳에 발령을 내셨을 거야. 뭐, 씨랩스가 아니었다면 자동차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발령 났었을 지도 모르겠다.”

    민준호는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생각했다. 제3자인 자신이 봐도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원래 당사자가 되면 판단이 흐려지는 법이었으니 형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그럼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이 후계자 선정의 성패를 가르겠네?”

    “아무렴 이 한 가지로 판단하려고? 아버지가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리시겠냐?”

    “왜 저자세야? 자신 없어? 그래서 발 빼는 거야?”

    “발을 빼기는 무슨. 내가 언제 그랬다고.”

    괜히 발끈하는 형의 모습에 민준호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어쩌면 경우가 준 그 서류의 내용이 사실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형이 딴마음을 먹으면 그 서류가 자신에게 무기가 되어 줄 거라 여겼다.

    “형, 우리 동맹은 아직까지 유효한 거지?”

    “당연한 걸 뭘 물어. 너한테 내가 필요하듯 나에게도 네가 필요해. 내가 회장, 네가 부회장. 그때까지 우리 동맹은 계속될 거야.”

    “그런 의미에서 건배할까?”

    “좋지.”

    민정현과 민준호는 서로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건배를 외쳤다.

    “형의 성공을 위하여!”

    “위하여!”

    하지만 그들의 동맹은 바닷가에 쌓은 모래성과 같다는 걸 민준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술을 마시며 곁눈질로 형을 보던 민준호는 피식 웃었다.

    ‘저 헛똑똑이. 다른 데 정신 팔려서 진짜 봐야 하는 건 제대로 못 보고. 쯧쯧, 어떡하냐, 우리 형?’

    물론 민정현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으니.

    ‘내가 회장이 될 때까지만이야. 회장만 되면 동맹이야 얼마든지 깰 수 있는 아니겠어?’

    서로의 진심을 숨긴 두 사람은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술잔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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