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29화 (229/250)
  • #229.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알게 하라 (3)

    어두운 사무실 안. 조명도 켜지 않은 채 캄캄한 사무실에 앉아 있던 경우는 창밖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낮에 형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형이 원하는 게 뭔데?’

    대답 대신 민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가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뭔지 경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형! 그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잖아! 이미 누나한테 지분도 넘겨서 나한텐 새명에 대한 그 어떤 권리도 남아 있지 않다고. 그건 형이 잘 알잖아.’

    ‘누가 지분 달래? 지분이 아니라도 찾아보면 방법이 있지 않겠어? 그런 성의라도 보여야지. 그러니까 찾아 봐. 네가 날 위해 뭘 해 줄 수 있는지. 그래도 동생 부탁이니까 당분간 촬영소는 그대로 둘게.’

    ‘…….’

    ‘근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 너도 알다시피 내가 변죽이 죽 끓듯 하잖아. 그래서 밀어 버리면 큰일 아냐?’

    경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차라리 무릎을 꿇으라고 하지. 나쁜 자식!”

    자신을 도발하던 형의 얼굴을 떠올린 경우는 차라리 북양주 종합 촬영소를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그곳에 남아있는 인프라가 너무 아쉬웠다.

    전소한 민속 마을 세트야 그렇다 쳐도 다시 문을 연다면 당장 촬영 가능한 실내 스튜디오는 물론, 각종 제작 장비들까지 있었으니 이만한 제작 시설을 갖추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건 분명했다.

    한 번 눈독을 들이자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특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준호에게.

    “이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는데…….”

    경우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

    소주 한잔을 쭉 들이켠 김강철이 지글지글 익은 삼겹살을 집게로 들고 가위로 먹기 좋게 잘랐다. 그리고는 앞에 앉은 한웅의 앞접시에 담았다.

    “얼른 먹어. 여기 냉동 안 써서 고기가 신선해. 맛있어.”

    “형도 드세요.”

    “네가 먹지 말라고 해도 알아서 먹으니까 걱정 말고 먹어. 그래도 너랑 이렇게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냐?”

    뿌듯해하는 김강철을 보며 한웅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두 사람의 처음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새명 유통의 남성복 브랜드 L’amour 전속 모델 이수현을 관리하고 있던 그는 신상이 나올 때 맞춰 찍은 화보를 공개할 때마다 달리는 악플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처음엔 악플을 삭제해 보기도 하고 신고도 해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익명성에 숨어 다른 사람을 상처 줄 수 있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그를 보며 가만 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해 상대에 대한 것을 모조리 털어 냈다. 그렇게 김강철은 한웅이 살고 있는 집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막상 만난 한웅은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긴 어린애였다. 거기다 학창 시절 왕따를 당한 탓에 공황장애는 물론 대인 기피증까지 심해 결국 학교도 그만두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게 2년째였다.

    하필 왕따를 주도했던 애가 이수현과 비슷하게 생겼다나 뭐라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수현이 왕따를 주도했던 애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 만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어린애한테 악플을 받았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신고해 봤자 벌금 몇 푼 나오면 그뿐, 아무리 본인에겐 이유가 있다고 해도 죄 없는 사람을 상처 주는 일이 정당화될 순 없었으니 자신만의 방식으로 벌을 주겠다며 김강철은 그 뒤로 틈만 나면 그의 집을 찾아갔다.

    싫다는 애를 붙잡고 이야기도 하고 억지로 밥도 먹고 급기야는 게임을 하자며 자꾸 귀찮게 굴었다.

    처음엔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했지만 익숙해진 한웅은 차츰 마음의 문을 열어 갔다. 덕분에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한웅은 처음으로 병원도 가게 되었고 자기가 한 잘못을 반성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그렇게 친해진 뒤로도 형 동생 하면서 친분을 유지하다 보니 모르던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한웅이 집 밖을 나가지 못한 덕분에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는 사실.

    김강철은 그를 결국 경우에게 소개해 줬고 한웅에 대한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했던 경우는 바쁜 김강철을 대신해 한웅에게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처럼 밖에 나와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던 중 한웅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경우의 전화임을 확인한 그는 혹시 몰라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서둘러 비상구로 간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난데.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네, 말씀하세요.”

    [우리 형들이랑 누나 알지?]

    “네.”

    […….]

    “듣고 있어요. 말씀하세요.”

    [약점 좀 찾아 줘. 뭐가 됐든 상관없으니까 알려지면 문제가 될만한 것들, 이를 테면 비자금이라든가 그런 거 말이야. 내말 무슨 뜻인지 알겠니?]

    “네. 찾는데까지 최대한 다 쓸어 볼게요.”

    [그래. ……이런 부탁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강철이한텐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그래, 끊을게.]

    목소리가 가라앉은 게, 자신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경우의 마음도 편치 않다는 것을 한웅은 알 수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갔더니 김강철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전환데 나가서 받고 와?”

    “뭐, 별거 아니에요…….”

    “별게 아닌데 왜 숨겨, 수상하게?”

    그에겐 말하지 말라던 경우의 말도 있었으니 어떤 핑계를 대야 하나 머릿속으로 궁리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여자냐?”

    “예?”

    “맞네. 여자네. 여자가 있었어, 그치?”

    “아니,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야? 아, 썸이구나. 아직 여자 친구라고 말하기 그런 거? 근데 어차피 그거나 저거나. 야, 너 재주도 좋다? 막 썸도 타고. 좋냐? 말 좀 해 봐? 어떻게 만났는데?”

    차라리 이편이 나은 것 같아 한웅은 그냥 그가 오해하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확실히 봄은 봄이구나. 사랑의 계절. 경우도 결혼하고 웅이도 여친이 생기는데 나만 참…….”

    “형님은 인물도 괜찮고 대기업 다니시니까 곧 생길 겁니다.”

    “어쭈, 지는 있다고 여유 부리는 거지. 됐으니까 오늘은 네가 쏴!”

    “형이 쏘신다면서요? 밥 사줄 테니까 나오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요?”

    “왜? 썸도 타면서 이 형님 밥 사주는 것도 아깝냐? 이깟거 몇 푼이나 한다고 내가 먹는 게 아까워?”

    아까부터 자꾸 소주를 들이켠다 싶더니 어느새 취해 있었다. 취하면 감당하기 힘들어졌으니 한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마를 짚었다.

    * * *

    ‘잠깐 기다리시라니까요.’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소란스럽더니 이내 문이 벌컥 열렸다. 민준호는 경우와 비서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김 비서는 그만 나가 봐.”

    민준호의 말에 비서가 인사를 꾸벅하고는 나가며 문을 닫았다. 잔뜩 굳은 얼굴로 소파에 앉는 동생을 보며 민준호는 그 맞은편에 가 앉았다.

    “벌써 온 걸 보면 마음이 급하긴 했나보다. 왜? 형이 밀어 버릴까 봐 걱정했어? 아무렴 내가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을라고. 그냥 너 놀리려고 그랬던 건데. 얼굴 풀어.”

    경우는 대답 대신 서류 봉투를 하나 내밀었으니 민준호는 기쁜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하지만 서류의 내용을 확인한 민준호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그것은 그동안 그가 건설사에 자재를 바꿔치기하고 단가를 속여 빼돌린 이중장부에 관한 내용이었으니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동생을 노려봤다.

    “너, 이게 뭐 하자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인지는 형이 더 잘 알 텐데?”

    “야, 민경우!”

    “그동안 형이 그 자리에 앉으면서 빼돌린 돈이 생각보다 많아. 그렇지?”

    “그래서 지금 너 나 협박하는 거야?”

    “어. 그러게 넘기라고 했을 때 아무 말없이 넘겼으면 좋았잖아. 그랬으면 형한테 고마워서라도 나중에 보답하지 않았겠어?”

    “그래서 이걸로 뭘 어쩔 건데? 아버지한테 이르게? 아버지는 모를 줄 알아? 이 돈의 일부는 아버지한테도 들어갔거든. 어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 봐. 아예 검찰에 갖다 찌르지 그래? 그렇게 나오면 내가 뭐 겁낼 줄 알았나 보지?”

    “내가 왜 검찰로 이걸 가지고 갈 거라고 생각해?”

    “뭐?”

    “형…… 내가 바본 줄 알아? 아무리 이쪽 일에 문외한이어도 그 장부가 진짜 뜻하게는 뭔지 알아.”

    불길한 예감에 굳어진 그를 향해 경우가 가까이 다가가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건들지 말아야 할 사람을 왜 건드려서. 형은 강우창 사장님이 무섭지도 않은가봐?”

    “……!”

    그동안 겪은 일들로 안 그래도 조심성이 있었던 민준호는 혹시나 이 이중장부가 들켰을 상황을 대비해 안정 장치를 하나 마련해 뒀으니 만약 비리가 드러날 경우 이 일을 지시하도록 한 사람이 자신이 아닌 현재 새명 건설의 사장인 강우창이 걸리도록 해 놓은 거였다.

    선대 회장인 민판섭이 있던 시절부터 벽돌이며 시멘트를 직접 어깨에 이고 공사 현장을 누볐던 강우창은 민판섭과 민홍준 부자의 신뢰를 얻어 결국 새명 건설의 사장 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의 경력에 자부심이 있었던 그는 공사판에서 일해 본 적 없는 민준호를 좋게 보지 않았으니 당연히 민준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민준호가 인도에 다녀온 뒤로는 그를 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지만 민준호는 그런 거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형마저 새명 자동차로 쫓겨나 사장이 된 판국에 자신만 사장이 아닌 전무를 달고 있으니 그마저도 강우창의 탓이라 생각했던 것뿐.

    “지금 이 서류들을 들고 당장 강우창 사장님한테 찾아가 사실대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어서 와일드하시다고 들었는데…… 어때? 형은 잘 알지?”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한 민준호는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촬영소 너한테 넘길 게. 그러면 되지?”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가격은 섭섭하지 않게 쳐줄게. 정말 고마워, 형.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이 형 노릇 한 것 같아.”

    “됐으니까 볼일 끝났으면 얼른 꺼져!”

    고개를 끄덕인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려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민준호 앞에 서더니 서류 하나를 더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진짜 선물은 이거. 그래도 형이 순순히 마음을 바꿔 준 덕에 주는 거야.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길 바랄게.”

    그렇게 경우가 나가자 짜증이 있는 대로 난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내 방으로 와, 당장!”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조병배였으니. 자리에서 일어선 민준호가 조병배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아파하던 것도 잠시 조병배는 다시 바른 자세로 섰다. 그런 그를 향해 경우가 건네준 서류를 흔들었으니.

    “일 처리 확실하다며? 들키지 않을 거라며? 이게 확실한 거야? 내가 이런 일을 또 당해야겠어?”

    “죄송합니다.”

    “다시 가서 제대로 처리해. 알았어!”

    조병배가 나가고 나서도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대던 민준호는 테이블 위에 하나 더 남은 서류를 그제야 발견했으니 또 무슨 일로 자신의 속을 뒤집으려 하나 싶은 그는 서류를 열어 봤다.

    그런데.

    서류를 천천히 읽어 보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으니.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더니 진짜 선물이었어?”

    언제 화를 냈냐 싶게 그는 서류를 처음부터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것은 형인 민정현이 인수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씨랩스에 대한 서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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