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28화 (228/250)
  • #228.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알게 하라 (2)

    내일 프로덕션의 대표이면서 드라마 제작사 협회장도 겸임하고 있는 정명도는 처음 아버지 밑에 들어와 제작 PD로 일할 때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주로 오전엔 내일 프로덕션으로, 오후엔 협회로 출근을 해 업무를 처리했다.

    최근 방송국들이 상암동 DMC로 몰리면서 새로 생긴 제작사들은 거의 대부분 그쪽에 자리를 잡았다. 스튜디오 글로리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내일 프로덕션은 여의도 시대에 만들어진 터라 여의도에 있었으니 양쪽으로 출근을 해야 하는 그의 고생을 생각해 경우는 협회 사무실을 여의도에 차리는 게 어떻겠냐며 먼저 제안했다.

    원래 이런 곳에선 목소리 큰 사람이 주도권을 가져간다고 후원금도 다른 회원사에 비해 많이 내는 스튜디오 글로리였으니 다른 회원사들도 아무 말하지 못했다. 어차피 협회의 위치가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오늘도 내일 프로덕션에 들렸다 협회에 출근한 그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해도 지금까지 해 왔던 환경을 바꾼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방송사와 제작사 사이의 입장을 잘 조율하는 것도 일이었다. 골머리를 앓고 있던 그때, 경우가 협회를 방문했다.

    “민 작가, 어서 와요.”

    “사무실 문 연 지가 언젠데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죄송합니다.”

    “바쁘니까 나한테 협회 떠밀어 놓고 잊어버린 줄 알았잖아요. 어쨌든 이제라도 와 줘서 고마워요.”

    직접 커피를 내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협회로 가입 문의 전화가 오는 거 알아요? 다 민 작가 덕분이에요. 민 작가가 극본에 연출까지 맡은 드라마가 흥행한 덕분에 우리 쪽 협회에 가입하겠다는 제작사가 늘었어요.”

    “괜히 일만 늘어난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뭐, 그렇긴 한데, 회원사가 늘어나면 아무래도 목소리에 힘이 생기니까 결과적으론 좋은 거죠.”

    “그나마 다행이네요.”

    “덕분에 제작 환경을 개선하려고 노력하고는 있는데 그게 생각보다 어렵네요.”

    “하나하나 차근히 해 나가면 되죠. 참, 저 며칠 전에 북양주 다녀왔어요.”

    “아, 종합 촬영소요. 민속 마을이 전소됐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촬영소가 팔렸다는 소식 듣고 마음이 안 좋았는데 그런 일까지 생겼으니…….”

    “근데 북양주 종합 촬영소 말인데요? 정부 방침 때문에 이전하는 거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정부기관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죠.”

    “그랬어요? 전 잘 몰랐어요.”

    “영부위라고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영화부흥위원회라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정부에서 영화 산업을 육성하려고 지원을 하는 거죠. 처음 영부위가 생기고 나서 필요한 걸 찾다보니 영화 촬영에 필요한 인프라가 전반적으로 부족하다 판단해 지금의 종합 촬영소가 만들어진 거죠.”

    “그랬군요.”

    “외신들이 한 번씩 한류 열풍에 대해 소개할 때 정부가 지원해 줬다는 이야기하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따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그거 아예 없는 말은 아니에요. 북양주 종합 촬영소가 생겨난 게 결국은 정부 정책 덕분이었으니까요. 북양주에서 찍은 영화, 드라마 다 합치면 2,000편이 넘을 걸요. 그만큼 우리나라 영화 산업에 많은 도움이 됐죠.”

    “그 많은 영화, 드라마들 북양주가 없었다면 힘들었겠네요.”

    “그렇죠. 근데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따라다니기 마련이죠. 정부 정책이니까 정책이 바뀔 때마다 사정 생각은 안 하고 이딴 식으로 추진해 버리는 거죠. 우리는 결정했으니 니들은 따라라. 어차피 우리 지원받는 거 아니냐? 이런 식이죠. 관계자 한 사람만 불러다 물어봤어도 이런 결정 내렸을까 싶네요.”

    “그래서 제가 생각이란 걸 좀 해 봤는데 말이죠.”

    “나 왜 민 작가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겁나죠?”

    “왜 다들 저만 가지고 그러시는 건지…… 제가 뭘 어쨌다고요?”

    “전적이 있잖아요. 나한테 이렇게 일거리를 떠맡긴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그거야 하늘이 내린 협회장님이시라니까 그러시네요.”

    경우의 너스레에 정명도는 웃고 말았다.

    “어쨌든 이 모든 게 북양주 종합 촬영소가 공공 기관이나 다름없으니 그쪽 뜻에 따라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럼 정부가 아니라 우리 협회 소유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안 됩니다, 안 돼요.”

    “아니, 왜요?”

    “최근 회원사가 늘었다고 해도 북양주를 매입할 만한 여력이 안 됩니다. 아마 회원사에 이런 의견을 내면 당장 협회를 탈퇴할 겁니다.”

    “에휴, 참 별 걱정을 다하십니다. 제가 그런 대책도 없이 제안드렸을라고요.”

    “그럼……?”

    “스튜디오 글로리가 투자하는 형식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

    “인수해서 지금처럼 운영하다 보면 수익도 나지 않겠어요? 그 중 일부를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가 가져가는 거죠. 물론 나머지 수익은 시설 확충하는데 쓰고요.”

    “그런 거라면 당연히 좋지만……. 근데 지금도 협회가 스튜디오 글로리에 큰 도움을 받고 있는데 그렇게까지 하시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하죠. 다행히 저희 제작사에서 제작한 드라마, 영화가 다 잘 돼서 돈 좀 벌었거든요. 그렇게 번 돈 드라마 제작 환경을 위해 사회에 환원한다고 생각하죠.”

    지금도 도움을 준 게 많은데 이렇게까지 나서 주는 경우가 정명도는 고마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입구에 업적을 크게 새겨 넣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래서 말인데요, 북양주 종합 촬영소를 매입했다는 건설사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알아보니까 아직은 공개할 사항이 아니라고 안 가르쳐 주더라고요.”

    “안 그래도 지금 촬영소가 매각됐다는 소식에 여러 제작사 쪽에서 반발이 있었거든요. 혹시라도 항의할까 싶어서 그러는 거겠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더니 정명도는 열심히 전화를 돌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경우가 초조히 기다렸다.

    * * *

    협회를 나오는 경우의 얼굴은 기가 차 자꾸 헛웃음만 나왔으니.

    ‘그게…… 새명 건설이라고 하는데요?’

    하필 다른 곳도 아니고 형이 그곳을 사들인 것인지 경우는 자신이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솔직히 정명도 얼굴 보기가 민망했다. 회사일이니 일일이 알지 못했을 거라며 위로했지만 경우는 그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이 안 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더니 왜 하필…….”

    경우는 심란한 마음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렇다고 한 번 마음먹은 일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으니 호랑이를 잡기 위해 제 발로 호랑이 소굴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 * *

    “네가 웬일이냐?”

    가뜩이나 바쁜데 그닥 반갑지 않은 동생의 방문에 민준호는 심드렁했다. 생각해 보니 경우가 호텔이나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은 있어도 회사로 직접 찾아온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웬일은. 형 잘 지내나 싶기도 하고, 생각해 보니까 형 일하는 모습, 한 번도 안 본 것 같아서 말이야.”

    “어디서 약을 팔아? 네가 그럴 위인이야?”

    “형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무리 우리 사이가 예전만 같지 않다고 해도 내가 너를 몰라? 처음에 아버지가 너 여기로 발령 냈는데 일하기 싫다고 출근도 안 하고 토꼈잖아. 그 바람에 아버지한테 단단히 찍혀서 엄청 깨졌을 때도 결국 안 나타났지. 그만큼 여길 싫어하던 놈이 와 보고 싶었다고 하면 오냐 하리?”

    “…….”

    “또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용건이 있어서 왔으면 용건이나 이야기해. 나는 아직 너처럼 사장이 아니라 한가하지 않거든.”

    씨알도 안 먹힐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타격이 좀 있었다. 그래도 예전엔 예의상 몇 마디 안부를 묻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 민준호와의 관계는 완전히 되돌릴 수 없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물론 형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진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런 형의 반응이 못내 아쉬웠다.

    잠시 민준호의 눈치를 본 경우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북양주 촬영소, 형이 샀다며? 왜 산거야?”

    갑자기 찾아와선 북양주 촬영소에 대해 묻는 경우의 모습에 서류에 시선을 박고 있던 민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말없이 자신을 보던 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자 경우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거긴 웬 관심?”

    “어, 아니, 그냥. 지난번에 거기 구경 갔던 날 불이 났었거든.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알아보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새명 건설에서 사들였다고 하더라고. 다른 데라면 모를까 형이 샀다고 하니 좀 궁금해서.”

    “그래? 근데 난 오히려 불이 나서 다행이라 생각해.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까?”

    “아니, 왜?”

    “거기 매입할 때 영부위랑 조건이 있었거든 당분간은 관람객들한테 공개하기로. 거기 영화나 드라마도 찍지만 관람객도 많이 오거든. 하루 아침에 문을 닫는다면 아쉬워한다고 두 달 정도 시간을 달라고 하더라. 근데 너도 알다시피 건설사에서 두 달은 상당히 긴 시간이야, 안 그래?”

    “글쎄, 나야 그쪽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

    “모르겠음 기억해. 두 달은 꽤 긴 시간이라는 거. 어쨌든 불이 나서 안전상에 문제가 있다고 관람객도 막았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싹 다 밀어 버릴 명분이 생겼다는 거 아니겠어?”

    “뭐?”

    “왜 그렇게 놀라? 눈앞에 일거리가 있는데 그냥 보고만 있는 것도 그렇잖아. 너는 잘 모르니까 하는 얘기다만, 우리는 미적거리는 걸 싫어해. 일이 있으면 빨리 해치우는 편이지.”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아 경우는 당황했다. 이런 모습 보이지 말았어야 했지만 처음부터 경우는 형의 페이스에 말리고 말았다.

    “거기 어차피 촬영소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시골인데 왜 하필 거기야?”

    “네 말마따나 다른 게 없어서. 요즘 도시에서 뭐 하나 지으려면 얼마나 개고생인 줄 아냐? 가끔 머리 쓰는 놈들 중에 알박기 해서 그깟 얼마 되지도 않는 땅 몇 평 가지고 한몫 챙기려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근데 거긴 그런 거 없잖아. 얼마든지 밀어 버리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고.”

    “아파트라도 짓게? 그런 시골로 누가 살러 올까? 그러다 미분양이라도 되면―.”

    “우리 동생이 형을 그렇게 걱정하는 줄 몰랐네. 미분양돼서 시멘트 값도 못 건질까 봐 걱정이야? 근데 어쩌지? 이번엔 아파트를 지을 게 아닐 거거든.”

    “그럼?”

    “리조트를 지을 거야. 골프장이랑 같이.”

    “…….”

    “경치 좋은 곳에서 골프는 치고 싶은데 그런 곳은 서울에서 멀잖아? 근데 북양주면 서울에서도 멀지 않고 주변에 다른 거 없으니까 골프장으로 안성맞춤이지. 리조트도 최고급으로 지을 거야. 이탈리아에서 직접 수입한 최고급 내장재에 가구도 명품으로 꾸밀 거거든. 그럼 돈 많은 사람들이 회원권 사겠다고 달려들지 않겠어? 돈이 막 들어오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다.”

    생각보다 구체적인 계획에 경우는 당황했다. 평소와 달리 차근차근 말하는 형의 모습이 마치 네 생각을 이미 알고 있으니 절대 너한테 넘기지 않을 거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거 경우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형! 촬영소, 나한테 팔면 안돼?”

    “그렇지. 네가 용건 없이 왔을 리도 없고 기껏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왔어?”

    “어차피 골프장이 꼭 거기 있어서 할 필요는 없잖아. 찾아보면 더 괜찮은 부지도 많을 거고. 근데 우리는 그 촬영소가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나한테…… 아니, 우리 쪽으로 넘겨.”

    “내가 왜? 나를 인도로 쫓아내서 6년이나 처박히게 만든 네가 뭐가 좋아서?”

    “그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 그치만―.”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해. 내가 널 몰라? 미안하기는. 그깟 입에 발린 소리 믿을 거 같아? 차라리 무릎이라도 꿇지 그래. 그래,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사과하면 생각해 볼게. 왜? 못 하겠어?”

    진짜 치사하게 이렇게까지 나올 일인가 싶었던 경우는 그까짓 무릎, 촬영소를 얻을 수 있다면 눈 질끈 감고 꿇을 의향이 있었다. 결국 자리에 일어선 그가 무릎을 꿇으려던 바로 그 순간.

    “그래, 좋아. 너한테 팔게.”

    의외로 순순히 넘긴다는 소리에 형이 드디어 철이 들어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대신 그냥 줄 순 없고…… 거길 넘기면 넌 나한테 뭘 해 줄래?”

    그럼 그렇지.

    민준호가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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