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알게 하라 (1)
조병배가 내민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던 민준호가 설명을 하라는 듯 그를 쏘아봤다.
사진 속 상대는 잊으려고 해 봤지만 꿈에서도 잊지 못한 여인이었으니.
“지난달 말에 이탈리아에서 입국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동안 이탈리아에 있었던 건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식장에서 날 그렇게 물 먹여 놓고 지는 두 발 뻗고 편히 잘 잔 얼굴이네.”
민준호는 있는 힘껏 주먹을 쥐어 사진을 구겨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최영윤을 손에 쥐고 구겨 버리고 싶었을 정도였다.
그날, 결혼식장에서 최영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그 창피와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하루에도 몇 번씩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마지막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후계자에서 완전히 밀린 것도 모자라 눈칫밥 먹는 신세로 전락했으니 민준호는 그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리고 있었다.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지. 안 그러면 호구되는 거잖아, 안 그래?”
“어떻게 할까요, 전무님?”
“당분간은 놔 둬. 그쪽에서도 조심할 테니까. 사람이라면 당연히 내가 이를 갈고 있다는 것쯤은 예상하지 않겠어? 최 회장 성격에 분명 경호원이라도 붙여 놓을 것 같단 말이지.”
“알겠습니다.”
“그러다 내가 저한테 관심이 아예 떠났다는 생각이 들 때쯤, 완전히 방심하고 있을 때 눈에 안 띄는 선수들 몇 붙여 놔. 어디서 뭘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어디를 가는지, 내가 언제 물어도 스케줄 술술 불 수 있을 정도로. 알았어?”
“네, 전무님.”
“완전히 다 끝났다고 생각하겠지? 다시 만날 땐 어떤 얼굴을 해야 할까? 벌써부터 기대되는데.”
“…….”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으니 그런 민준호의 얼굴이 조금은 기이해 보였다.
* * *
시간은 참 빨리도 흘러 이 공개된 지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국내외 매체들의 인터뷰에 시달려야 했던 경우는 오히려 드라마를 찍을 때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새어 나오는 하품을 막을 수 없었으니.
“흐아암.”
“그러다 입 찢어지겠어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경우가 입을 가리며 황급히 돌아봤다. 그곳엔 송지현이 서 있었다.
“작가님. 작업실에서 두문불출하시더니 회사까진 어쩐 일이세요?”
“회사에 일이 있어서 나오지 그냥 나오기야 했겠어요?”
“아, 드라마 일정 때문에 오셨군요. 방송 날짜가 잡혔다죠?”
“네, 3분기에 SBC에서 방송하기로 했어요.”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하네요.”
“이게 다 민 작가 때문이잖아요. 민 작가가 너무 활약을 하니까 배가 아파서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죠.”
“에이,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작가님 그렇게 무모하신 분 아니잖아요. 진짜 무슨 사정이 있는 거예요?”
“그게…… 저쪽에서 사정사정 하더라고요. 3분기에 편성받은 드라마 하나가 펑크 났거든요. 땜빵으로 떼울 작품이 들어가면 좋은데 생각보다 여의치 않나 봐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는 능력이 되니까 결국 편성을 앞당긴 거죠.”
“그렇죠. 작가님 아니면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 내죠. ……그래서 누구래요? 펑크 낸 작가가?”
“원래 호기심이 명을 단축한다는 소리 못 들어 봤어요? 그냥 들어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른 척하세요.”
“그 전에 궁금해서 죽을 지도 모르는데요?”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죠. 크흠, 그럼 어디 가서 떠벌리지 말고 민 작가만 알고 있어요. 그게 누구냐면…… 김준원 작가요.”
“예? 김준원 작가님이요? 아니, 어쩌다……?”
한때 SBC 편성 대결에서 경우를 밀어 버릴 정도로 김준원은 시청률 잘 나오는 작가로 통했다. 그 덕에 경우는 S&Media를 인수했으니 결과는 좋게 끝났지만 그의 예상치 못한 소식에 경우는 의아했다.
“<블랙리스트>가 초반에 시청률 잘 나왔던 것에 비해 갈수록 시청률이 떨어졌잖아요. 그 뒤에 한 작품도 시청률이 잘 안 나왔거든요. 그래서 슬럼프가 온 모양이더라고요. 도저히 대본을 못 쓰겠다고 그랬다나 봐요.”
“아, 스트레스가 슬럼프의 가장 큰 원인이라던데, 그런 이야기 들으면 남 일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그놈의 시청률이 뭔지.”
경쟁자이기 이전에 같은 길을 걷는 동료였기에 그런 김준원의 소식에 두 사람은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병원도 다니고 그런다나 봐요. 약 잘 먹고, 잘 쉬고, 그러다 보면 털어 내지 않겠어요? 명색이 김준원인데?”
“혹시 제가 뭐라도 도움―.”
“쓰읍, 내가 말했죠. 아는 척도 말라고. 민 작가가 나서면 김준원 작가 수치사 할지도 몰라요. 가뜩이나 지금 잘 나가다 못해 날아다니는데 그런 사람이 힘내라고 한다고 도움이 되겠어요?”
“그럴까요?”
“당연하죠. 절대 아는 척도 말고 신경도 쓰지 말아요. 오히려 이럴 땐 관심도 부담이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뭘 명심하시는데요?”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란 두 사람이 돌아보자 모기범이 웃으며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PD님 깜짝 놀랐잖아요.”
“죄송해요. 두 분이 너무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셔서요.”
“어디까지 들으셨는데요?”
“네? 별 얘기 못 들었는데…… 왜요? 두 분 무슨 비밀 얘기라도 나누셨어요?”
“아휴, 비밀은 무슨. 그런 거 없어요. 준비 다 된 거죠? 그럼 출발해 볼까요?”
“네.”
두 사람이 일어서는 모습에 경우 역시 따라 일어섰다.
“어디 가세요?”
“드라마 세트장이요.”
“세트장이요?”
아직 촬영 날짜가 잡힌 것도 아니고 캐스팅은 물론 촬영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세트장을 간다는 말에 경우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송지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번에 할 드라마가 크게 보면 일종의 타임 슬립물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타임 슬립이요?”
“참, 그러고 보니 타임 슬립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 내 앞에 계셨네.”
“일가견은 무슨, 그런 말씀 마세요. 누가 들으면 웃어요.”
경우의 두 번째 드라마 <역전의 정수>가 시간의 터널을 이용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내용으로 타임 슬립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한 번도 안 해 본 나보단 낫겠죠. 시간 괜찮으면 같이 갈래요? 물어볼 것도 많을 것 같은데.”
“네, 그러세요.”
안 그래도 인터뷰며, 드라마 연출 제의가 많이 들어오던 차라 머리가 무거웠던 경우는 기꺼이 송지현의 제안에 따랐다.
모기범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근데, 난 이요, 그렇게 결말을 맺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어요. 확실히 도은철 선배가 한 방이 있어요. 이번 드라마의 최대 수혜자는 도은철 선배 아니에요?”
“안 그래도 할리우드에서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진짜요? 하긴 그 정도 연기력이면 할리우드도 탐낼 만하죠. 난 솔직히 국무총리가 빌런인 줄 알았거든요. 말 안 듣는 대통령 치워 버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줄 알았다고요. 근데 자기가 다 껴안고 자폭하니까 좀 멋있던데요? 지도자는 그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선배님의 연기가 설득력이 있죠.”
“그래도 다음엔 그런 거 쓰지 마요. 나 솔직히 드라마 보는 내내 너무 힘들었어. 기업에서 주는 뇌물은 그러려니 하는데 해외 자본까지 들어가니까, 내 나라가 남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건 아닌가 싶어 얼마나 열불이 터지던지. 근데 그게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잖아요?”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일 뿐입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뭐, 끝난 드라마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시고 작가님 드라마 이야기 좀 해 주세요. 타임 슬립이면 지금까지 작가님이 해 오셨던 스타일하곤 다른데요?”
경우의 물음에 송지현이 웃으며 답했다.
“옛날이야기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물건이 오래되면 도깨비가 된다. 혹시 들어 봤어요?”
“아, 도깨비가 빗자루로 변신하는 거요?”
“네. 근데 지방에 따라서는 단순히 빗자루가 오래되면 도깨비가 되는 게 아니라 오래된 빗자루에 피가 묻으면 도깨비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래서 시골에선 오래된 빗자루를 벽에 세워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확실히 피 묻은 빗자루가 서 있으면 무섭기는 하겠네요. 그래서 차기작이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예요?”
“아니요. 시대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해 보려고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그런 사랑 이야기.”
“재밌겠네요.”
“그럼요, 누가 쓰는 건데. 그래서 삼국 시대도 잠깐 나올 거고 조선 시대도 나올 거거든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그동안 제가 쓴 드라마의 배경 중에 제일 많이 등장한 게 압구정이더라고요.”
“살고 있는 동네니까 익숙하셔서 그런 거죠.”
“압구정 집, 여의도 작업실 아니면 가는 데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안 쓰던 걸 쓰려니 진도가 나가야죠. 방은 어떻게 생겼는지 전체적인 구조는 어떤지 두 눈으로 직접 봐야 드라마 쓰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모 PD님께 부탁했죠. 바쁘신데 시간도 내주시고 얼마나 고마운데요. 보너스 좀 팍팍 주세요.”
“이미 보너스 잘 받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송지현의 능청에 모기범이 웃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요? 용인? 아니면 북양주?”
“북양주요. 용인은 아무래도 드라마 촬영지라는 느낌보다 관광지 같은 느낌이 더 있거든요. 그리고 드라마에 하도 많이 나와서 굳이 가지 않아도 이미 여러 번 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잘 됐네요. 저도 북양주는 한 번도 안 가 봤는데.”
“그래요? 거기 생각보다 볼거리 많아요. 제일 유명한 건 아무래도 판문점 세트장? 아, 생각만 해도 설렌다. 이왕 가는 거 구경 실컷 하고 오죠.”
드라마 집필을 위해 답사를 가는 건지 놀러를 가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들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북양주의 현실은 참담했다.
“이, 이게…… 어떡해…….”
“위험합니다. 여기 계시면 안 돼요.”
여러 대의 소방차가 세트장 입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촬영장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혹시나 자신들 때문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일행은 장소를 옮겼다.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남아 있던 모기범이 나중에 합류했다.
“어떻게 됐어요?”
“그게…… 민속 마을 세트 쪽에서 불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촬영장 안 길이 좁아서 소방차가 안으로 못 들어가는 바람에 화재 진압이 어려웠다고 전소…… 했답니다.”
“아……!”
경우는 물론 모기범도 송지현의 눈치를 살폈다. 안 그래도 어두운 그녀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어째서 이런 일이…….”
“전소했으면 이제 어떻게 될까요? 다시 지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죠?”
“다시 안 지어요.”
“예? 그게 무슨……?”
송지현의 말에 경우가 의아한 듯 물었다.
“실은 전부터 부산으로 촬영소를 옮긴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공공 기관은 지방으로 이전한다는 정책이라나 뭐라나. 벌써 건설 회사에 촬영소가 팔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촬영도 못해요. 그나마 당분간은 관람객만 받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부산이라니…… 부산에 촬영소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는데요?”
“당연하죠. 아직 삽도 안 떴으니까.”
“예? 아무것도 없는데 기껏 있는 촬영소를 넘겼다 이 말이에요? 무슨 일을 그렇게 한 대요?”
침울하던 송지현은 열이 받았는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 말이요! 다른 공공 기관이라면 모를까 영화 촬영장은 아니죠. 이게 현실성에 맞아야 하는 거지 정책이 그러니까 가라고 하면 그만인가? 그럴 거면 방송국부터 죄다 지방으로 옮겼어야죠.”
“이런 말 정말 하기 싫은데 공무원들 하는 일이 그렇네요. 탁상행정의 전형.”
“촬영소에서 이제 촬영도 못하면 사극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용인에서 찍을까요?”
“나주랑 문경, 평창에도 사극 세트장이 있어요. 거기서 찍겠죠. 근데 말이 쉽지 서울에서 먼 지방에서 촬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촬영장에 불이 났다는 것도 그랬지만 지금 당장 촬영할 장소 또한 마땅치 않은 현실에 경우는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