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경계를 넘어 (6)
이 웹플릭스에 공개된 이후 스튜디오 글로리 내부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작가들은 여전히 작가실로 출근해 언젠간 제작할 드라마 집필에 몰두했고 제작부는 새로 제작할 드라마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의 시작.
원래 태풍은 그 중심에 있을 때보다 밖에 있을 때 그 위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법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라운지로 들어선 박종연은 그곳에 모여 잠시 수다를 떨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호들갑을 떨며 다가갔다.
“다들 여기서 뭐해? 일 안 하고 땡땡이 치는 거야?”
“어? 감독님!”
“드라마 끝나서 여행 가신다고 하시더니 아직 안 가셨어요?”
“내가 지금 이 판국에 여행 가게 생겼어?”
“왜요?”
“뭐야, 다들 모르는 거야?”
“무슨 일 생겼어요?”
“전쟁이라도 났대요?”
눈만 동그랗게 뜨고 끔뻑끔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박종연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아니, 다른 데서는 다 난리가 났는데, 정작 난리 나야 할 데는 모르고 있으면 어떡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으니 박종연은 긴말을 하는 대신 TV를 틀었다. 여러 번 채널을 돌리다 마침내 멈춰 선 어느 뉴스에선 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웹플릭스에서 자체 제작한 우리나라 드라마 이 공개된 지 일주일 만에 아시아 전 지역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입니다. 강대현 기잡니다.”
그들에겐 익숙한 드라마의 장면 위로 기자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광복절 기념행사가 끝난 뒤 광화문 광장, 두 발의 총성이 울리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쓰러집니다. 기다렸다는 듯 미사일을 쏘며 도발하는 북한과 민감한 시기에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는 미국, 거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일본까지. 현재 한국이 놓인 상황과 주변국들 간의 미묘한 신경전을 실감 나게 표현했다는 외신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인공을 시시때때로 위협하는 정체불명의 사람들과 벌이는 액션씬까지 한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평이 많습니다. 지난 17일에 공개된 이후 아시아 전 지역에서 1위를 휩쓸며 돌풍을 일으키는 은 이제 아시아를 넘어 서구권 시장도 장악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MHTV 강대현이었습니다.”
뉴스가 끝나고 의기양양해진 박종연이 사람들을 돌아봤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듯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으니.
그리고 잠시 뒤, 사무실에 모든 전화가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서 뉴스를 보던 이들이 놀란 마음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이래?”
당황해하는 이들을 보며 웃던 박종연이 마침내 물었다.
“민 작가는 어디 있어?”
* * *
심각한 얼굴의 박현호가 TV뉴스에 출연한 경우의 인터뷰를 보는 중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내가 보고 싶은 콘텐츠를 기다림 없이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게 OTT의 큰 이점이죠. 갈수록 TV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겁니다.”
”그럼 각 가정에 TV가 사라지는 일도 올까요?”
“그건 아니죠. TV로 방송만 보는 건 아니잖아요. 앞으로 방송이 차지하는 부분을 OTT로 대체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의 요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미디어를 이끌어 왔던 방송이 도태될 수 있단 뜻입니다.”
“스튜디오 글로리에서는 글로벌 OTT 기업들이 들어오기 전, 올웨이즈라는 해외 드라마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올웨이즈를 보면 국내 드라마도 있지만 해외, 특히 미국 드라마가 압도적으로 많은데요, OTT산업이 발전할수록 해외 콘텐츠의 접근성이 쉬워지면서 국내 제작 프로그램들이 잠식될 거란 위기감이 돌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오래전, 일본 문화 전면 개방을 앞두고 앞으로 일어날 거라 예상한 가상 뉴스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우리 문화가 일본에 유행하며 문화적 열풍이 불고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는데요. 당시만 해도 일본을 문화 선진국이라 일컬으면서 일본 대중문화에 우리의 방송 시장이 잠식되는 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있었거든요. 근데 지금 어떻죠?”
“정확히 그 가상 뉴스처럼 되었네요. 일본 내에서 한류가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되었죠.”
“맞습니다. OTT산업의 성장으로 미국이나 유럽 등 다른 나라 콘텐츠를 지금보다 더 쉽게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그건 반대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시아에 국한된 게 아니라 더 넓은 시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죠.”
“그럼 작가님은 OTT산업의 전망을 좋게 보시는 군요.”
“좋은 콘텐츠엔 국경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드라마가 아시아나 소수만 즐기는 문화가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구 시장에서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주류 문화로 자리매김하였으면 싶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현호가 리모컨을 집어 TV를 껐다.
벌써 며칠째 과 관련된 뉴스가 쏟아지고 있었으니 박현호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 탓에 그 앞에 앉은 김 대리가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눈동자를 열심히 굴렸지만 어쩐지 박현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침묵을 견디다 못한 김 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전무님?”
“왜 항상 이런 일엔 민경우 저 자식이 있는 걸까?”
“네?”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 할 정도의 엄청난 스케일은 물론 확실한 재미를 보장한다는 사람들의 후기가 잇따르면서 을 보기 위해 웹플릭스에 가입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었다.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도 관심을 쏟고 있단 소식에 연일 과 관련된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고 유행을 선도하는 건 우리가 될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현실은 언제는 S&Media나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시작하고 있었으니…… 뭐 하러 그렇게 공부했나 몰라?”
“전무님…….”
“요즘 S&Media는 어때?”
“전체적인 TV프로그램의 시청률 파이가 축소됐다고는 하는데 그런 거에 비해 S&Media의 거의 모든 채널 시청률이 과거에 비해 많이 올랐습니다.”
“지상파는 떨어졌는데 그쪽은 올랐으면 이제 지상파하고 붙어도 싸움이 된다는 거네? 하아, 진짜 짜증 나게!”
이마를 짚는 박현호의 손짓 하나에도 김 대리는 괜히 움찔했다.
“전에 오연옥 작가가 그런 말을 했더라고. 내가 드라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나 뭐라나. 처음엔 그냥 우리랑 재계약하지 않으려는 핑계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그 말이 자꾸 떠올라. 이봐, 김 대리. 김 대리는 드라마가 뭐라고 생각해?”
“드라마요? 배우들이 나와서 대사와 행동으로 연기하는 극 예술―.”
“그런 사전적인 대답 말고.”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행이야. 김 대리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음 조금 억울할 뻔했어. 어쨌든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유행이라며? 믿보스드?”
“믿고 보는 스튜디오 글로리 드라마요?”
“그래. 한때는 드라마 하면 우리 유니언 스튜디오가 먼저 떠오르던 때가 있었지. 작가들이 같이 일하고 싶어 하던 제작사가 우리였는데…….”
“지금도 스튜디오 글로리를 제외하면 유니언 스튜디오가 그나마 다른 제작사에 비해―.”
김 대리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위로한답시고 꺼낸 말이었으나 본인 입으로 유니언 스튜디오가 스튜디오 글로리에 밀린다는 걸 인정한 꼴이었다. 어떤 불호령이 내려질까 싶어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의외로 박현호는 잠잠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도 김 대리 의견에 동의해. 이번 건 완전히 우리의 패배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졌어.”
‘이번 거? 원래도 이긴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나저나 드라마 속 배우가 할 법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박현호의 모습에 김 대리는 오글거렸다.
“졌다고 좌절하고 있으면 안 되지. 자고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안 그래?”
“네? 그, 그렇죠.”
“이번 주말까지 김 대리는 스튜디오 글로리의 성공 요인을 분석해서 보고서 작성해.”
“보, 보고서요?”
“김 대리가 말했잖아. 유니언 스튜디오도 괜찮은 제작사라고. 카운터 맞았다고 뻗어 있을 때가 아냐! 지금까지는 유명 작가나 PD들을 불러 모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방향을 새로 잡아야 할 거 아냐?”
“예. 보고서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그만 나가 봐.”
보고서를 작성할 필요도 없이 스튜디오 글로리를 따라잡는다고 헛발질만 하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스튜디오 글로리를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김 대리는 굳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 말 같은 건 듣지 않을 작자였으니까.
“하여간 상사가 너무 의욕에 넘쳐도 탈이야.”
갑자기 늘어난 업무 탓에 김 대리는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 * *
허름한 중국집 안.
주방으로 이어진 작은 창 너머로 주인아저씨가 커다란 웍에 짜장을 볶고 있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식당 안을 채우는 달짝지근한 냄새가 식욕을 돋웠다. 경우가 잠시 넋을 놓은 채 보고 있는 사이 중국집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의 얼굴을 본 경우가 활짝 웃으며 손을 들었다.
“왔어?”
“미안, 오래 기다렸지?”
“아니.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너 바쁠까 봐 내가 간짜장으로 주문했는데 괜찮지?”
“그럼.”
이은석이 경우를 향해 씩 웃었다.
1년에 한 번 은석의 생일이 되면 할머니는 시장에서 나물을 팔아 모은 쌈짓돈으로 짜장면을 사 주셨다. 민경우로 다시 깨어난 후 생일날 할머니 생각에 이곳에 왔다가 이은석을 만난 경우는 그와 친구가 되었고 가끔 이렇게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때마침 짜장면 두 그릇이 나오자 열심히 비비면서도 두 사람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너 화면발 잘 받더라.”
“봤어?”
“그럼. 노 경사님이랑 다들 같이 봤는데? 노 경사님 내색은 안 하시는데 그래도 뿌듯해하시는 눈치더라.”
“뵌 지 오래됐네. 한번 찾아갔어야 했는데.”
“바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근데 말이야…… 혹시 이번 드라마에 나온 기성현 경장인가? 그 사람, 노 경사님 모델로 한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그렇지? 어쩐지. 딱 보니까 노 경사님 보는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닐까 우리끼리 내기했거든. 저녁 비싼 거 얻어먹어야겠네.”
룰루랄라하는 그의 모습에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아 경우는 안심이었다.
“이제 너도 데이비드 베니오프, 그 양반이랑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야?”
미국 드라마의 상징이라 일컬어지는 왕좌의 게임, 제작자 언급에 경우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래, 짜장면이나 먹어.”
경우의 핀잔에 이은석이 짜장면을 한입 가득 물었다.
“음, 역시 이 맛이지!”
감탄하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던 경우가 살짝 물었다.
“근데 너 드라마 많이 보나 보다? 데이비드 베니오프도 알고.”
“너 때문에. 나 원래 드라마 잘 안 봤거든. 근데 친구가 드라마 만든다고 하니까 저절로 관심이 가더라고.”
“으음.”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성적 같은 거에 연연하지 않고 네 생각대로 드라마 만들었으면 좋겠어.”
“갑자기?”
“네 드라마가 떠서 기사 많이 달린 거 봤거든. 차기작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소리 들으면 아무리 잘해도 부담 느낄 것 같아서. 부담 갖지 말고 네가 원하는 걸 했으면 싶어서.”
뭘 알고 저런 말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은석은 정곡을 찔렀다.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환경에서의 드라마 흥행은 그를 더욱 주목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하는 말 하나,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 때문에 부담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제 앞으로 드라마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던 차에 친구의 진심 어린 말에 경우는 복잡했던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었다.
“오늘 너 만나길 잘한 것 같다.”
“당연하지. 그런 의미로 오늘 짜장면 내가 쏜다!”
“넌 항상 나 보면 뭘 사 주려고 하더라? 남들은 내가 내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데.”
“그러니까. 항상 사 주기만 했을 거 아니야? 그래서 사 주는 거야. 친구한테 얻어먹는 즐거움도 있어야지. 그리고 나도 좋은 일 있거든.”
“좋은 일? 뭔데?”
“드디어 형사과로 옮겼어.”
“야, 진짜 축하한다.”
나쁜 놈 잡는 경찰이 되고 싶었던 이은석이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룬 것 같아 경우는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모습을 할머니가 보시면 뭐라고 하실지 경우는 오늘따라 할머니 생각이 더욱 났다. 분명 대견해하시지 않을까 싶었다. 경우는 늘 그랬지만 새삼 할머니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