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경계를 넘어 (5)
어느덧 8월이 되자 연일 37도를 육박하는 찌는 듯한 더위에 사람들은 지쳐 갔다.
천막을 쳐 놓은 그늘 아래 경우는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으나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때 임시찬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여름은 이래서 문제야. 도대체 야외 촬영을 할 수가 없어요.”
“힘드시죠? 조금 있으면 시원한 간식, 도착할 겁니다.”
“남들은 삼복 더위에 입맛이 없어 살이 쭉쭉 빠진다고 하더니 요즘 너무 잘 먹어서 오히려 허리 사이즈가 늘었어요.”
“날도 더워서 고생하는데 먹는 거라도 든든해야죠.”
“요즘 보면 내가 일하려고 이직을 했는지 먹으려고 이직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하여간 우리 회사는 먹는 복지 하나는 끝내줍니다.”
임시찬의 너스레에 경우는 웃었다.
그게 지친 자신을 위로하는 그만의 방법임을 경우는 알고 있었다.
곧이어 시원한 커피와 아이스크림이 도착하자 배우들은 물론 스탭들도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벌써 촬영, 절반은 했죠?”
“네. 생각보다 속도가 빠른 거 같아요. 이대로면 가을쯤 촬영 끝내고 편집하면 연내에도 완성될 것 같은데요?”
“다들 열심히 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나저나 난 어떻게 될지 그게 궁금해요. 어쨌든 새로운 환경에서 공개하는 거잖아요.”
“감독님이 보시기엔 어떠세요? 흥행할까요?”
“방송으로 나왔으면 당연히 시청률 기록 세우죠. QVN에서 방송해도 지상파 씹어 먹을 텐데 이게 방송국이 아니니…….”
드라마 촬영이 쌓여 갈수록 높은 완성도를 느낀 스탭들은 이 드라마가 방송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임시찬이 그렇듯 누구라도 드라마의 흥행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 였으니까.
촘촘한 구성의 대본은 물론 연기자들의 호연과 스탭들의 살신성인이 어우러져 자부심이 생길 정도로 완성되고 있었으니 더욱 아쉬워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방송이 아니더라도 분명 좋은 반응을 얻을 테니.”
이런 상황에서 초연해질 수 있는 건 경우밖에 없었다.
“자, 다들 쉰 거 같은데 촬영 재개하시죠.”
“그럽시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오랜만에 자신의 정치적 동지인 최중원을 만난 한서홍은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선 한서홍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졌으니 방안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손님이 있는 탓이었다.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선 스티븐 리가 다가와 한서홍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총리님. 아니, 권한 대행 각하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대답도 하지 않은 한서홍이 함께 온 최중원에게 질책의 눈빛을 보냈다.
“자네, 저녁이나 한끼 하자고 하더니!”
“제가 부탁드린 겁니다. 최 의원님껜 뭐라 하지 마세요. 각하를 뵙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어서요.”
어쩔 수 없었다는 최중원의 눈빛을 읽은 한서홍이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 들었는데 언제 왔나?”
“저 같은 장사치는 돈 벌 곳이 있다면 그 어디든 가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 말은 지금 대한민국에 자네 돈벌이가 있다는 말로 들리는 구먼.”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사경을 헤매고 있고 그 자리를 각하가 대신하고 있는데 제가 당연히 와 봐야죠.”
“입조심하게!”
“각하의 입장도 생각했어야 하는데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각하라는 호칭도 집어치우게. 듣기 거북하구만.”
“알겠습니다.”
스티븐 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웃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검은 머리의 외국인이었다.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후 미국 시민권을 얻은 한국계 미국인.
처음엔 자신의 고향인 한국의 정치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다면서 한서홍에게 접근했다. 미국에서 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그는 당을 위해 거액의 후원금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가 알고 있는 미국의 인맥들을 한서홍에게 소개해 주었다. 결국 당 대표의 자리에 오르고 대통령 후보에까지 오른 건 어느 정도 스티븐 리의 도움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독이 든 사과였음을 너무 늦게 알았다. 미국에서 유명한 로비스트였던 그의 손아귀에 빠진 한서홍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마리오네트가 된 기분이었다.
“내 비위가 좋지 않아서 자네와 함께 식사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용건만 말하게. 미국에서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용건이 있을 테니.”
“뭐가 그렇게 급하십니까?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숨 좀 돌리시죠. 그리고…… 저 혼자 드릴 말씀이 아니거든요.”
“누가 또 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는 대답 대신 웃었다.
잠시 후, 前 주한미군 사령관 에드워드와 와카마쓰 그룹의 실세 다이코지 아키호가 함께했으니 한서홍은 이 조합이 뭘 뜻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평범한 인사말이 오가고 에드워드가 용건을 꺼내자 스티븐 리가 곧바로 통역해 주었다. 물론 그 전에 대강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던 한서홍의 얼굴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곧 있으면 방위비 분담금 문제로 미국 대통령의 전화가 올 거랍니다. 미국 대통령이 원하는 건 딱 하나! 한국의 국방력 강화를 위해 무기를 더 많이 사 달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국방력을 강화하면 한국에도 손해는 아니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자리에 다이코지 아키호 사장이 함께 할 이유는 더더욱 아닌 것 같은데.”
“총리께서 모르시는 것 같아 추천드리려고요. 일본의 항공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런 항공 기술력을 집약해 만든 공격 헬기를 우리 해군의 작전 헬기로 도입한다면 해군 전력이 더욱 강해지지 않겠습니까?”
무기 강매도 모자라 일본의 헬기까지 끼워 팔려는 스티븐 리의 속내에 어이가 없었으니.
“그럼 지금 나보고 일본의 헬기를 들여 우리 해군에 배치하라 이건가? 국적까지 바꿨다고 우리 국민의 정서도 잊어버린 모양이군. 그게 가능할 것 같은가?”
“모를 리야 있겠습니까? 일본과의 오랜 갈등이야 미국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동맹국인 일본과 한국이 서로 손을 잡고 사이좋게 지내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총리께서 뭘 걱정하시는지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어차피 국민들은 모르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보고 국민들을 속이라는 건가?”
“속이다니요. 그럴 리가요. 서류 상으론 와카마쓰가 아닌 이스라엘에서 만든 헬기라고 표기할 겁니다. 그럼 아무도 모릅니다. 어차피 무기에 관한 건 국가 기밀이지 않습니까?”
“…….”
“아마 대통령은 임기 내에 깨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러게 그렇게 말씀드렸을 때 들으셨으면 좋았을 것을.”
안 됐다는 듯 혀를 차는 스티븐 리는 이내 한서홍을 향해 눈빛을 반짝였다.
“그럼 남은 임기는 총리님의 몫이 되겠군요. 아,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한 분이라면서 여론 몰이 중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정치에 입문한 이래로 지지율이 최고라고 하죠? 권한 대행 총리에 이어 차기 대통령까지 차지한다면 역사에 기록으로 남지 않겠습니까?”
‘설마……?’
탐욕스러운 스티븐 리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원하는 건 어떻게든 이뤄 내고야 마는 무서운 집념을 본 것 같아 한서홍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한 나라를 책임지는 총리로서 국가의 이득이 우선인지 개인의 이득이 우선인지 그는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 판단을 내리기엔 대한민국은 아직 힘이 없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 * *
반지하의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허름한 사무실, 기성현은 정원철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격수가 여자일 수도 있다니요? 분명 키가 180 이상 된다고 했으니까 남자일 거라고…….”
“아무래도 대통령과 관련된 사건이다 보니 극도로 비밀리에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 공개하지 않은 게 몇 가지가 있거든요.”
그 중의 하나가 범인이 입었을 거라 의심되는 점프 슈트였다. 한쪽에 버려진 탓에 스프링클러의 물줄기가 닫지 않는 곳에 있어 다행히 초연반응을 볼 수 있었다.
“그럼 그 점프 슈트도 조작된 겁니까?”
“아니요. 범인이 입은 게 맞다고 봤습니다.”
“그런데요?”
“그 점프 슈트로 범인이 키를 추정했는데 그게 함정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요. 소매나 바짓단을 걷으면 키가 더 작은 사람도 입을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180 이상 되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도 충분히 가능하죠. 실은 그때―.”
“여자는 아닙니다.”
단언하듯 말하는 기성현의 모습에 정원철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뭐죠?”
“실은……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상황실로 전화가 왔어요.”
“전화…… 라고요?”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을 기성현은 털어놓기로 마음먹는데.
“저는 그게 이번 사건에 대한 예고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예고라니…….”
“일단 들어 보고 판단하세요. 제가 잘못 생각한 것도 있으니까.”
기성현은 당시 신고된 음성 파일을 따로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걸 들려줬다.
‘네, 112상황실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행사를…… 막아야 합니다.’
‘저기요, 선생님? 무슨 행사 말씀이시죠? 현재 계신 위치를 말씀해 주세요.’
‘사, 사람이 다칠 수도 있어요.’
‘네? 저기요, 선생님? 여보세요?’
그렇게 녹음된 파일이 끝이 났다.
“112로 하루에도 장난 전화가 수없이 걸려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장난 전화라고 신경 쓸 거 없다고 하는데 저는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전화 건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간절했다고 할까?”
정원철이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본 그의 얼굴은 꽤 심각해 보였다.
“저기, 실장님?”
“다시 한 번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수차례 들어 본 정원철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왜 그러세요?”
“아는 사람 목소리 같아서요.”
“예? 지, 진짜요? 누, 누군데요?”
같은 고향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 그래서 수도 없이 들었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으니.
“한서홍 총리.”
“예? 신고한 사람이 한서홍 총리일 것 같다니 그럼 이번 사건 배후에……?”
“아직은 모릅니다. 아직은…….”
정원철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컷, 오케이!”
경우의 마지막 구호를 끝으로 몇 달 간 이어 온 드라마 의 모든 촬영이 끝이 났다.
하지만 촬영이 끝났다고 진짜 끝은 아니었으니 편집이라는 마지막 절차가 남아 있었다. 경우는 조연출은 물론이고 같이 드라마를 쓴 신도현과 함께 편집을 진행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갖게 된 내부 시사회. 떨리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느라 경우의 눈이 바빠졌다. 그런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감독님, 그만 좀 때리세요. 안 그래도 골병든 어깨 부서지겠어요.”
“네가 대견해서 그러지.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고, 내가 너 이렇게 대성할 줄 알았다. 장하다, 정말 장해!”
감격에 차 끌어안는 박종연의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간의 고생을 인정받는 것 같아 경우는 만감이 교차했다.
박종연만이 아니었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 모두 반응이 좋았다. 오히려 QVN에 냈으면 돌풍을 일으켰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야, 60분 분량의 12부작, 이게 신의 한순 거 같다. 원래 16부작으로 구성된 거 아니었어?”
“네, 처음엔 16부작으로 편집을 해 봤는데 편집을 하다 보니 줄이는 편이 훨씬 더 전개가 빨라지니까 집중도가 올라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죠.”
“잘했다, 잘했어. 이러다가 네가 이제 내 자리까지 위협하는 건 아닐까 그 걱정이 들어.”
“감독님도 참.”
“공개는 언제 할 거냐?”
“웹플릭스 쪽하고 상의를 하겠지만 아무래도 연말이 좋겠죠?”
“하긴 연말에 휴가도 있고 그러니까 드라마 몰아서 보기엔 딱 좋지. 그나저나 방송 관계자들이 이 드라마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 아냐?”
“아니요? 왜……?”
“지들도 궁금한 거지. 어쨌든 웹플릭스에서 자체 제작하는 첫 번째 한국 드라마잖아. 앞으로 OTT 산업이 어떻게 발전할 건지 궁금하지 않겠냐? 그래서 너네 드라마를 그 예고편으로 보던데? 은근히 잘 안 되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어.”
“어떻게 될지 두고 보면 알겠죠.”
“자신 있어 보이는 얼굴이다?”
“그럴리가요. 그저 길고 짧은 건 대보면 안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경우라면, 다른 사람도 아닌 경우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을 거라 생각한 박종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상의 끝에 이 공개될 날짜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