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24화 (224/250)
  • #224. 경계를 넘어 (4)

    보고를 마친 윤 부장이 민정현의 눈치를 살폈다. 답답하다는 듯 넥타이를 당겨 느슨하게 푼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빛에 윤 부장은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벌써 이번에 몇 번쨉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자는 이야기 듣자는 게 아니잖아요? 무슨 돈 먹는 하마도 아니고 연구비를 그만큼 가져다 썼으면 지금쯤 뭐라도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실력에 있어서는 실리콘밸리 내 최고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민정현의 꾸짖음에 윤 부장은 그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새명 물산에서 민정현의 직속 부하 직원이었던 윤 부장은 회장 직무 대행 시절 성과를 내고 싶어 한 민정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회사를 인수 합병하는 데 큰 힘을 쏟았다. 그 공로로 민정현이 새명 자동차 사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그 역시 옮겨왔다.

    오래 일해 왔던 새명 물산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그 역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으나 자율 주행 문제를 해결하기만 한다면 새명 그룹의 차기 회장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민정현의 야심에 마음을 움직였으니 두 사람은 새명 물산으로 금의환향할 날만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벌써 여러 번, 방해물이 등장했을 때 멈추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고 급기야 시험 운행 중 사람까지 다치는 일이 생기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지고 있었다. 윗선이 그 모양이니 당연히 그 아래에 있는 직원들도 마음 편할 수 없었다. 급기야 민정현이 온 이후 회사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오류를 잡아내도록 하세요. 기회가 무한정하지 않다는 것도 못 박아 두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 보세요.”

    사장실을 나온 윤 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회사 생활, 쉽지 않구만.”

    입사한 이후 순탄한 길을 걸어왔던 그는 자신이 그만한 실력이 있어 보상을 받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으니 나이가 들어 실력이 한계에 부딪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가진 것에 만족을 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탓에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새명 물산의 경영 기획 본부에서 같이 일했을 때만 해도 민정현이 저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가 웃는 걸 본 게 언젠지 꾸중을 듣지 않은 날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새삼 자신의 현실을 실감한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으니.

    “하아……. 이거 줄을 잘못 선 거 아니야?”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떻게든 사장님이 만족해하실 만한 결과물을 얻어야겠다는 생각뿐.

    사실 윤 부장 만큼 민정현 역시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씨랩스를 인수한 게 벌써 지난해였다.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한 채 반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돈만 끊임없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사이 동생 지선이 운영하는 새명 유통은 복합 쇼핑몰 덕분에 올 상반기 영업 매출이 최고를 찍었으니 그 덕에 새명 유통의 주가가 연일 상승하는 중이었다.

    새명 물산에 있을 땐 몰랐지만 아예 새명 자동차로 나온 이상 동생과 비교되는 건 당연지사. 이렇게 마냥 씨랩스의 성과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생각에 민정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촬영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경우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박종연의 모습에 씩씩대며 다가갔다.

    “촬영 잘 끝났다면서? 안 그래도 잘 찍었나 보러 왔다.”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거예요? 바쁜 일 있어서 현장에 못 오신다더니 여기서 뭐 하고 계신 건데요?”

    “나도 바빴어. 다들 현장에 나갔더라고. 그래서 내가 사무실 지키고 전화받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뻔했다니까. 사무실로 무슨 전화가 그렇게 많이 오냐? 대부분이 네 드라마 방송 언제 하냐는 그런 전화야. 인터넷 쳐 보면 나오는 걸 왜 여기다 전화하고 그래? 전화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누가 그런 일 하시래요? 급한 일이 끝났으면 현장에 나오셨어야죠! 제가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아세요? 감독님만 믿고 있었는데…….”

    “그러게 나를 믿으면 어떡하냐?”

    “감독님! 이제 와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그래서? 오늘 촬영 망쳤냐? 듣자 하니 잘 찍었다며?”

    “…….”

    “그러면 됐지, 뭘 그래? 명색이 감독 데뷔 첫 촬영인데 나 같은 꼰대가 옆에 있으면 안 되지. 내가 오늘 네 옆에 있었어 봐. 그럼 다들 나 보느라 넌 눈에도 안 들어올걸. 그럼 주객이 전도되는 거야.”

    경우는 그제야 박종연이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일부러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현장에 나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박종연은 이번 드라마의 고문이었을 뿐, 어쨌든 연출을 맡은 건 경우였으니까.

    그런 상황에 박종연이 첫 촬영부터 진두지휘를 하게 된다면 스탭들은 그를 이 드라마의 연출자라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경우의 첫 촬영을 그런 식으로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박종연의 뜻을 경우는 이해할 수 있었으니 그제야 굳어진 경우의 얼굴이 풀어졌다.

    “이제야 알았냐? 이 스승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 말이다.”

    “네, 아주 눈물겹네요.”

    “하여간 고마우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그래서 첫 촬영 한 소감이 어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은 괜찮다는데 내가 나를 못 믿겠는 거 있죠.”

    “나도 그래. 나라고 다 알고 그러겠냐? 이게 맞나, 수십 번도 더 생각할 때 있어. 그래도 모를 때 많아.”

    “그럼 그럴 땐 어떻게 하는데요?”

    “뭘 어떡해? 그냥 고 하는 거지. 인생 뭐 별거 있는 줄 알아? 다 거기서 거기야.”

    “…….”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너랑 이야기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네.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일어나. 늦었어.”

    “늦다니요? 어디 가요?”

    “어,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어.”

    “저 편집하려고 했는데요. 아까 조연출이랑 편집실에서 보자고―.”

    “나중에. 조연출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얼른 일어나. 지금 가야 해.”

    “어딜 가시는데요?”

    “일단 가 보면 안다니까?”

    영문도 모른 채 경우는 박종연이 끌고 가는 데로 따라가야 했다. 도착해 보니 그곳은 의 세트장이었다.

    “갑자기 세트장은 왜? 여긴 내일부터 촬영이라 아마 지금은 아무도 없을 건데요?”

    “그래? 여기서 아까 누가 보자고 했는데?”

    “누가요?”

    “아유, 이거 왜 이렇게 안 열려.”

    “제가 열게요. 저리 비키세요.”

    커다란 미닫이문조차 못 열어 끙끙대는 박종연의 모습에 대신 문고리를 잡은 경우는 힘껏 밀자 생각보다 스르르 열리는 문에 의아했다. 바로 그때.

    펑, 펑, 펑!

    “축하합니다.”

    “감독님, 데뷔 축하드려요.”

    이미 돌아간 줄 알았던 스탭들과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촛불을 켠 케이크를 들고 있었으니 모두 경우의 감독 데뷔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감독 데뷘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

    생각지도 못한 깜짝 선물에 경우는 얼떨떨했다.

    솔직히 우여곡절 끝에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고 처음으로 시청률 1위를 했던 것보다 더 뿌듯했다. 자신의 주변에 자신을 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더 고마웠다.

    촛불을 후 하고 불자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꼭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처음엔 떠밀려서, 그다음엔 반쯤 호기심에 시작한 일이었기에 아직도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시작하길 잘했다는 거.

    “자, 요 앞에 식당 예약해 뒀으니까 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런 날엔 먹고 마셔야죠! 강요는 아니니까 집에 가실 분들은 가고 남으실 분들만 식당으로 가시면 됩니다.”

    박종연의 말에 사람들이 세트장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진짜, 언제 이런 건 다 준비하셨어요?”

    “다른 건 몰라도 데뷘데 평생 기억에 남을 특별한 일이 있으면 좋잖냐. 하루 종일 긴장했을 텐데 편집은 무슨. 이런 날은 한잔하면서 긴장도 풀고 그러는 거야. 몰아붙인다고 다 되는 거 아냐. 쉴 때는 쉬고 할 때는 해야지.”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자, 그럼 우리도 가자.”

    “감독님이 직접 식당 예약까지 하신 거예요?”

    “당연하지. 회식이 인생의 큰 낙인데 회식을 아직도 안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

    “다들 바빠서 스케줄이 안 맞았어요. 다음 주에나 날 잡으려 했죠.”

    “기다리다 눈 빠질까 싶어 내가 준비했다.”

    “만날 돈 없다고 하시더니 이러다가 감독님 거덜 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식구들 꽤 잘 먹는데.”

    “응? 무슨 소리야? 돈은 네가 낼 건데.”

    “예? 감독님이 내시는 거 아니에요? 원래 이런 건 기획하는 사람이―.”

    “너도 알다시피 내가 돈이 어딨냐? 원래 이런 건 축하받는 사람이 한턱내는 거다. 얼른 가자. 이러다 술 다 떨어지겠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박종연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어이없어하는 경우에게 손짓했다.

    “얼른 와. 사람들 기다린다!”

    어쩐지 신나 하는 박종연의 모습에 아무렴 어떠나 싶은 경우는 재빨리 박종연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다음 날, 경우의 데뷔를 축하하던 세트장에서 첫 실내 촬영이 시작됐다. 이번엔 드라마의 두 주인공 못지않게 중요 인물인 국무총리가 처음 등장하는 씬이었다. 국무총리 역을 맡은 도은철은 경우와 함께 동선을 살피고 있었다.

    “작가님, 아니지. 이젠 감독님이시지?”

    “작가든 감독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불러 주세요.”

    “작가님이 입에 붙어서요. 여기 이 부분 말입니다.”

    대본을 들이밀며 도은철은 자신이 이해한 감정이 맞는 건지 경우에게 다시 확인을 받고 있었다. 경력으로 따지면 도은철이 이 바닥 한참 선배. 도은철은 비록 신인이었지만 감독인 경우에게 의견을 물었고 될 수 있는 한 그의 의견을 따랐다.

    처음 두 사람이 작품을 했을 때완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으니 감회가 새로운 도은철이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왜요? 어디 이상한 부분이라도……?”

    “아니…… 난 작가님이 나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요.”

    “제가 선배님을요? 왜요?”

    “지금 와서 얘기지만 우리 처음이 좀 그랬잖아요. <셀룰러 메모리> 이후로도 매번 나한테 카메오 출연만 부탁하는 거 보고 이 양반이 날 골탕 먹이나 싶었다니까요.”

    “싫어했으면 아예 출연 제의를 하지도 않았겠죠. 선배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안드렸던 역할들은 분량은 짧아도 다 중요한 역할이었어요. 까다로운 만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잖아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어쨌거나 이번 역할 정말 마음에 듭니다. 나, 진짜 열심히 해 볼랍니다!”

    “나중엔 저 원망하실지도 몰라요. 모르긴 몰라도 조금은 욕을 먹지 않겠어요?”

    “그거야 끝까지 가 봐야 아는 일 아닙니까? 그리고 배우가 연기 잘해서 욕먹는 것만큼 제대로 된 칭찬도 없죠.”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도은철의 모습에 경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서 주인공인 기성현 경장과 정원철 경호실장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도은철이 맡은 국무총리 한서홍이었다.

    국무총리이긴 했지만 그는 대통령의 최대 라이벌이나 다름없었다.

    지지율 2위와 3위로 달리고 있던 두 사람은 이러다 선거에 패배할 거란 생각에 선거 직전 후보 단일화로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 조건이 바로 국무총리.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서홍을 국무총리에 앉히고 책임 총리제를 하겠다며 약속을 했다.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막상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국무총리는 대통령과 갈등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벌어진 대통령 저격 사건.

    드라마 초반 국무총리는 이번 사건의 배후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범인을 찾으려는 두 주인공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며 갈등을 빚을 예정이었다.

    앞에선 선량한 모습이었으나 뒤에선 무언가를 꾸미는 것 같은 이중적인 모습의 한서홍에 도은철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없단 생각에 경우가 적극 추천했다. 어떻게 보면 민경우 사단의 첫 번째 배우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동안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한 드라마에 간간이 출연해 왔으니 이번 역할을 그에게 맡긴 건 그 영향도 없지 않았다.

    마침내 도은철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진짜 열심히 하겠다는 그의 각오만큼 도은철은 한서홍이 현존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역할에 몰입해 있었다. 카메라 너머 한서홍의 모습을 경우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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