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23화 (223/250)
  • #223. 경계를 넘어 (3)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 기념행사를 위해 이른 새벽부터 광화문 광장이 모두 통제되었다. 곳곳에 경찰이 있었지만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이제 막 경축식 행사를 마치고 나온 대통령 내외가 SJ문화회관 밖으로 나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느라 예상했던 시간보다 지체되었다.

    무사히 행사를 마칠 수 있어 안도하는 사람들 사이에 경호실장은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으니, 망원경까지 들고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바로 그 순간, 탕 하는 총성이 들리고 대통령 바로 옆에 서 있던 경호원이 총에 맞고 쓰러졌다. 가슴에 번지는 피를 본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는 사람들로 일대는 혼란에 휩싸였다. 경호원들은 일제히 대통령을 보호하며 서둘러 차량으로 이동했다.

    “쳇!”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스나이퍼가 스코프를 통해 조준하고 있는 목표물은 대통령. 열심히 대통령을 쫓던 그때 스코프를 통해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망원경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경호실장이었다. 스코프와 망원경을 통해 서로를 보고 있는 두 사람!

    경호실장이 무전기로 저격수의 위치를 알리는 사이, 침착해진 스나이퍼는 다시 대통령을 겨누고, 마침내 빈틈을 발견하는 순간, 방아쇠를 당긴다.

    탕!

    짧은 순간, 위기를 직감한 경호실장이 대통령을 향해 몸을 날리지만 한발 늦었다. 가슴에 총을 맞은 대통령이 쓰러졌다.

    살기 위해 도망치는 사람들로 현장은 지옥을 방불케 했으니 미션을 완수한 스나이퍼는 재빨리 현장을 벗어났다. 경호실장은 대통령을 서둘러 병원으로 옮기는 동시에 부하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 건물 지금 당장 봉쇄하고 그 누구도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알겠습니다.”

    뉴스는 앞다퉈 이 사건을 보도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 모두 큰 충격에 빠졌다. 긴급히 수술을 마쳤지만 현재 대통령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에 대한민국은 혼란에 휩싸였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정부는 헌법 71조에 따라 대통령을 대신해 국무총리가 그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 * *

    의 촬영을 위해 광화문 광장을 통째로 빌린 스튜디오 글로리는 이른 아침부터 촬영 준비를 하느라 거의 모든 직원이 나와 있을 정도로 분주했다.

    드라마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씬인 데다가 광복절을 기념해 경찰 병력은 물론 광복절 분위기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엑스트라로 동원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탭들은 하나같이 초긴장 상태였다. 그중 감독으로 첫 데뷔를 하게 된 경우가 제일 많이 긴장해 있었다.

    경우가 배우들에게 동선을 알려 주며 디렉팅을 하는 동안 촬영 감독을 맡은 임시찬이 스탭들을 모아 놓고 주위를 기울였다.

    “자, 오늘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오늘 여기에 쏟아부은 비용이 얼만 줄 알아? 이 씬 하나에 2회 비용이 다 들어갔어. 니들도 알지? 광장만 빌린 게 아냐. 여기 문화회관에 저기 대기하고 있는 엑스트라까지 다 돈인 거. 아무리 우리 돈 들어가는 거 아니라지만 그래도 이 고생을 했는데 오늘 안으로 끝내야 하지 않겠냐?”

    임시찬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스케일이 크다는 건 스탭들 역시 알고 있었으나 스탭들 중 최고참인 임시찬이 나서자 그 무게감이 다른 탓이었다.

    “지난번에 광화문에서 촬영했다는 그 드라마, 봤나, 못 봤냐?”

    “봤습니다. 장면 처음 시작할 땐 한낮이었는데 장면 몇 번 전환하니까 금방 어두워지던데요.”

    “내 말이. 초 단위로 따져야 할 긴박한 장면이었는데 잠깐 동안 해가 졌어. 그게 무슨 말이야? 시간 안에 촬영 못 해서 해가 진 거 아냐? 그거 보고 무슨 생각이 들든?”

    “폭발씬이 꽤 괜찮게 나와서 장면 자체는 나쁘지 않긴 했는데…… 그림이 아쉽기는 하더라고요.”

    “그게 왜 그런 거겠어? 하루 더 촬영을 못 하니까 그런 거 아냐? 광화문 통째로 빌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안 된다는 거 겨우겨우 설득해서 오늘 딱 하루 빌린 거니까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 오늘만 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해 떠 있는 동안 촬영 제대로 해서 끝내는 거다. 알았냐?”

    “네!”

    “알아들었으면 각자 위치로 가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임시찬의 지시에 스탭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최고참이 나선 탓에 다들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었으니 이 기운으로 무사히 촬영이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경우의 첫 드라마 <셀룰러 메모리>를 할 때 함께했던 MBS 소속 임시찬은 경우가 고명희를 퇴출시킬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이였다. MBS를 고집하던 그는 마음을 바꿔 작년 가을, 스튜디오 글로리로 둥지를 옮겼다.

    어쨌든 스탭들에게 큰소리 치긴 했으나 이렇게 큰 규모로 첫 촬영을 시작하기란 그 역시 처음이라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 배우들과의 이야기를 마친 경우가 그를 향해 돌아봤다. 긴장해 있으면서도 밝은 그의 얼굴에 임시찬 역시 미소를 지었다.

    은 대통령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저격수의 총에 맞은 이후 벌어지는 일을 다룬 드라마였다.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112치안종합상황실로 들어왔던 이상한 신고가 혹시 이번 사건에 대한 예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종로경찰서의 기성현 경장은 저격수가 있었던 서울 텔레콤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또 한 사람.

    사건 발생 직후 서울 텔레콤을 봉쇄했지만 범인이 벗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옷만 발견되었을 뿐, 스프링 클러 오작동으로 초연반응이 소용없게 되자 결국 범인을 특정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범인을 놓치고 만 대통령 경호실장 정원철이 기성현과 손을 잡고 범인을 추적하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거기에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국무총리의 의심스러운 행동은 물론, 북한과 미군, 일본과의 민감한 관계까지 다루고 있었으니 박종연이 정치 스릴러에 첩보 액션을 첨가했다는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드디어 슬레이트를 든 연출부 막내가 카메라 앞에 섰다. 슬레이트를 탁 소리 나게 내려치며 말했다.

    “씬 5, 1에 1.”

    막내가 카메라 밖으로 나가고 경우가 외쳤다.

    “액션!”

    경우의 구호에 배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누군가 내지른 비명 소리와 타이밍 좋게 터진 축포 소리에 사람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 패닉에 빠졌다. 마치 지금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이.

    어떻게든 현장을 벗어나려는 사람들로 광장은 일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어린 딸과 함께 광화문을 찾았던 한 여인은 딸의 손을 잡고 살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그때 발을 헛디딘 딸이 넘어지고 두 사람이 꼭 잡고 있던 손이 그만 떨어졌다. 황급히 돌아보는 엄마, 엎어진 채 엄마를 향해 울부짖는 딸. 딸에게 돌아가려 하지만 밀려드는 사람들에 떠밀렸다.

    안간힘을 쓰던 그때 현장을 통제하느라 차출 나온 주인공 기성현이 아이를 안아 들고 달렸다. 무사히 엄마의 품으로 아이를 안겨 주면.

    “컷, 오케이!”

    첫 오케이 사인을 내린 경우의 표정이 밝았다. 아슬아슬 위태로운 장면은 물론, 모녀의 곁에서 몸을 구르는 스턴트맨의 활약에 이보다 더 좋은 장면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혹시나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건 아니었을까 싶었던 경우가 임시찬을 돌아봤다. 경우의 시선을 느낀 그가 말없이 엄지를 내밀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첫 장면이 단번에 오케이가 나오자 경우는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이후 혼란의 휩싸인 광장의 시민들 모습을 여러 각도에 촬영하는 것은 물론 드론으로 항공 촬영까지 끝내고 나자 광화문 광장의 군중 씬이 드디어 끝이 났다. 가장 기뻐한 건 역시나 촬영 감독 임시찬이었다.

    “아휴, 나도 늙는지 이거 두 번 하라면 못 하겠어요.”

    “그래도 감독님 덕분에 쉽게 끝났네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아까 스탭들 불러 놓고 군기 잡으시는 거 봤습니다. 원래 군기는 상병들이 잡는 건데 대대장쯤 되시는 분이 그러고 계시니까 제가 다 죄송하더라고요.”

    “현장에서 계급이고 뭐고 어딨습니까? 급하면 누구라도 나서야죠.”

    “군중씬이 빨리 끝나긴 했는데 아무래도 회관 앞 씬은 시간 안에 다 못하겠죠?”

    “어쩔 수 없어요. 일단 조명을 있는 대로 따 때려 넣죠. 다행히 회관을 배경으로 찍는 거니까 조명으로 어떻게 하면 해 져도 낮처럼 보일 겁니다.”

    확실히 경험이 풍부한 임시찬은 그동안 촬영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덕분에 몰랐던 사실을 알았던 경우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음 씬을 촬영하기 전 촬영팀이 재정비를 하느라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현장을 둘러보던 경우는 다음 씬 촬영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나온 표재동을 발견하고 그리로 다가갔다.

    “이야, 옷이 날개라더니 멋지신데요?”

    대통령 경호원 중 한 명으로 출연할 예정이었던 표재동은 검은 슈트를 입고 머리까지 매만진 상태였다.

    “제가 원래 꾸며 놓으면 한 인물 하죠. 그나저나 처음이라고 걱정 많이 하시더니 엄살이셨나 봅니다, 감독님. 신인 감독이 아니라 베테랑 감독인 줄 알았습니다.”

    “에이, 저 기죽을까 봐 다들 격려 차원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저 압니다.”

    “이거 들켰네요. 하하.”

    표재동의 너스레에 경우도 웃었다.

    “농담이고 쉽지 않은 촬영이었는데 처음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잘하셨어요.”

    “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아직은 서로 어색한 사이였던 탓에 그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경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심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치를 챈 것인지 표재동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전에 무술을 배우신 적이 있으신가요? 지난번 액션 스쿨 오셨을 때 보니까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던데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 같아 민망합니다. 많이는 아니고 어릴 때 호신술 조금 배우긴 했죠.”

    “호신술 조금 수준이 아니던데요? 저희 같은 사람들은 딱 보면 알거든요. 저 처음 이 일 시작했을 때보다 더 잘하시던걸요?”

    그게 다 민경우의 실전 경험이 쌓여 그렇다는 소리를 하지 못한 경우는 딴소리가 나올까 싶어 서둘러 그쪽으로 화제를 몰아갔다.

    “에이, 엄살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아무렴 감독님보다 나았을라고요.”

    “진짠데……. 무술은커녕 남들 다 하는 태권도도 배워 본 적 없거든요. 그냥 어릴 때 본 영화 속에서 악당을 물리치던 배우에게 마음을 빼앗겼달까? 스턴트맨이 되고 싶어서 성인이 되자마자 액션 스쿨로 무작정 쳐들어갔거든요. 그때 한길수 감독님과 처음 연을 맺었죠.”

    한길수라면 무술 감독 1세대라 할 만큼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무식이 용감하다고 그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몰라요. 안 된다는 거 억지로 밀어붙여서 청소며 빨래며 온갖 궂은일 도맡아 했죠. 그렇게 시작하다 보니 어느새 감독이라 직함 달고 여기까지 왔네요.”

    “무슨 성공 신화 같은 느낌인데요? 감독님 이야기만 가지고도 드라마 한 편 나오겠어요.”

    “에이, 무슨 드라마씩이나. 뭐, 듣기엔 재미있을 수 있겠네요.”

    “그러지 마시고 감독님 이야기 더 들려주세요. 되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을 것 같은데.”

    “누가 작가님 아니랄까 봐, 박종연 감독님이랑 비슷하시네요.”

    “박 감독님이요?”

    분명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해 놓고서 급한 일이 있다며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박종연의 모습에 끓어오르는 화를 삭인 경우가 더 들려 달라는 듯 표재동을 바라봤다.

    “박 감독님 막힐 때면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과거 이야기 들려 달라고 캐고 다니시거든요.”

    “저한텐 안 그러시던데.”

    “그거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서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해서 그럴 거예요. 두 분 인연이 꽤 깊다고 들었는데……?”

    “그렇죠. 그러고 보니까 20년 가까이 된 것 같네요.”

    “그런 거 보면 부러워요. 저도 가끔 어릴 때 생각하거든요. 같이 지내던 애들…… 지금은 어떻게 지내나 싶기도 하고…….”

    혹시 그가 그리워하는 게 자신이 알고 있던 그때가 아닌가 싶어 경우는 더 묻고 싶었다. 하지만.

    “촬영 준비 다 끝났나 봐요. 그만 가시죠.”

    “네.”

    아쉬운 마음에 돌아서는 표재동의 뒷모습을 보며 경우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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