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경계를 넘어 (2)
처음엔 박종연의 제안이 말도 안 되는 거라 생각했다.
내가 무슨 감독?
그런데 한번 생각에 사로잡히자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거기다 박종연의 강권에 못 이겨 <시체가 나타났다>에서 일했던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무척 힘들었지만 수많은 스탭들과 호흡했던 일이 그에겐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늘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서 글을 쓰다 회의실에서 여러 작가들과 의견을 나누는 것도 좋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생생함은 영화에 문외한인 사람들의 심장도 두근거리게 만들 정도로 뭔가가 있었다. 경우는 다른 것보다 그때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 느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미 그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고.”
이렇게 된 이상 함께 대본 작업을 하고 있는 신도현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왕이면 제작을 맡을 모기범도 같이 의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두 사람을 불러 박종연과 만났을 때 당시의 일을 상세히 알렸다.
경우의 이야기에 신도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모기범마저 신도현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음……..”
“작가님이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찾아보면 우리 드라마에 적당한 감독님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 지금도 이렇게 정신 없는데 작가님이 연출까지 맡을 수 있을지 전 그게 걱정인데요?”
“예? 제가 못 미더운 게 아니라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평소에 작가님 일하는 거 보면 알죠. 거기다 혼자서 하신다면 걱정이 되기도 한데 박종연 감독님이 도와주신다면서요? 그럼 걱정할 것도 없죠.”
“저도 찬성이요.”
“제가 작가님만큼 경험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일해 보면서 느낀 건데 연출자는 무엇보다 작가의 의도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면에 있어서라면 우리 작품에서 작가님보다 더 어울리는 연출자를 찾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모기범이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동안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한 드라마들은 거의 사전 제작이 70퍼센트 이상은 된 상태에서 방송이 되었잖아요. 근데 이 드라마는 제작이 다 끝난 상태에서 전편이 한꺼번에 공개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괜찮을 거라 생각돼요. 찍어 놓고 영 아니다 싶으면 어차피 작가님이 본인 사비를 털어서라도 다시 찍지 않겠어요?”
“맞아, 맞아.”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해결된 것 같아 조금 걱정하고 있던 경우는 약간 김이 새고 말았다.
“너무 쉽게 결정하시는 거 아니에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드리려고 했는데…….”
“이런 거 오래 고민해 봤자 별로 달라지는 거 없어요. 괜히 고민한답시고 대본 쓸 시간만 빼앗기는 거라고요.”
“전 제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린 건데요? 지난번 드라마에서 작가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가까이서 지켜봤잖아요.”
“어땠는데요?”
“아, 신 작가님은 모르시겠구나. 촬영하는 중간에 보조 출연자가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 촬영 못 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거든요. 다른 보조 출연자 찾기도 힘든 상황이었구요. 그때 대본 수정해서 촬영을 매끄럽게 잘 끝냈거든요.”
“작가님은 원래 임기응변에 강하시니까요.”
“그것만이 아니에요. 첫방송을 앞두고 편집된 드라마에 소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예? 그런 일도 있었어요?”
“진짜 난리가 났죠. 그걸 작가님이 조연출하고 편집만으로 장면을 살렸다니까요. 그 일이 있은 후로 아예 편집실에 붙잡혀서 하도 도와 달라는 통에 작가님이 편집에도 참여하셨잖아요.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편집에 작가님 이름 넣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 얘기도 있었는데 결국 작가님이 반대하셔서 그만뒀죠.”
바로 앞에서 저런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경우는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모기범의 이야기에 신도현은 더욱 눈빛을 빛냈으니.
“작가님, 우리 드라마 잘 찍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거하고 이건 좀 다른데…….”
“믿습니다!”
“사람 너무 믿는 거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작가님이라면 믿어야죠.”
신도현의 말에 모기범이 고개를 끄덕였으니 경우는 그만 웃고 말았다.
어쨌든 신도현의 동의까지 얻었으니 일은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다.
제작을 맡은 모기범은 일단 스탭을 꾸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경우가 현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의견을 나눌 조연출이나 촬영 감독은 그가 직접 뽑는다고 해도 모든 스탭들을 경우가 일일이 뽑을 필요는 없었다.
해서 모기범은 스튜디오 글로리에 소속되어 있는 스탭들을 대상으로 스케줄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디오감독, 조명감독, 미술감독 등등 각 분야를 맡을 수장을 뽑고 나면 그들이 알아서 자기 팀을 꾸릴 테니 모기범은 현재 그들이 참여하고 있는 드라마 스케줄이 언제 끝나는지 확인했다.
아직 대본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넉넉한 상태라 그때까지 현재 제작 중인 드라마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새 드라마에 투입도 가능할 것 같았다. 스케줄 조정을 하며 각 감독님들의 의견을 물어 차근차근 준비에 들어갔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며칠 후 박종연이 스튜디오 글로리를 찾아왔다. 경우는 그에게 트리트먼트와 그 사이 완성된 1부 대본을 보여 줬다. 평소엔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일을 마주하는 박종연은 눈빛부터 달라졌으니 그가 대본을 다 볼 때까지 경우는 물론 신도현조차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두 작가님은 도대체 어떤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 겁니까?”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그의 질문에 두 사람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참, 분명 전에 나한텐 정치 스릴러라고 하지 않았어? 난 정치 스릴러라길래 선거와 관련해서 주로 테이블에서 일어나는 심리 스릴러 그런 드라만 줄 알았다고. 근데 이건…… 첩보 액션도 포함되어 있는 거잖아!”
“…….”
“솔직히 말해서 내가 드라마 대본을 보고 있는 건지 영화 시나리오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완전 블록버스터급이네. 뭐, 잘만 만들면 영화 뺨치는 드라마 한 편 나왔다고 난리 나겠네.”
너털웃음을 짓는 모습에 그제야 두 사람의 긴장이 풀렸다.
“지금 이렇게 웃을 일이 아니야. 생각했던 것보다 완전 대작이잖아. 이 정도면 제작비도 상당하겠어. 감당이 되겠……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자신만만한 경우의 모습에 박종연은 꼬리를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제작비는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듣자 하니 웹플릭스가 제작비를 아끼는 편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감독님 말씀은 우리 대본 자체는 괜찮다, 그 말씀이시죠?”
“스튜디오 글로리의 대표 작가 두 사람이 힘을 합쳤는데 당연한 거 아냐?”
“감독님의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이거 내가 내 무덤을 판 거 아닌가 모르겠다.”
투덜대는 그의 모습에 경우와 신도현을 눈빛을 마주하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참, 이거 읽어 보니까 내 생각에는 무술 감독이 꽤 중요할 것 같은데 말이야. 액션씬이 상당하잖아.”
“아, 그 생각을 못했네요.”
“글만 쓰던 놈이 뭘 알겠어?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적당한 사람이 있는데 만나 볼래?”
다음날 박종연이 찍어 준 주소로 찾아간 경우는 몸에서 나는 열기가 눈으로 보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언제 찍을지 모를 액션씬을 위해 준비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거의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어느새 도착한 박종연이 경우의 팔을 툭 쳤다.
“왔냐? 어때? 멋지지?”
“네. 진짜 멋있네요. 어릴 때 나도 싸움 같은 거 잘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했거든요.”
“발길질 하나로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건 사내아이들의 로망이니까. 이제 보니 재벌집 아들치고 꿈은 평범했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무술 유단자를 경호원으로 들여.”
“무술을 배우는 게 아니라요?”
“저거 보기에나 멋있어 보이지 내가 하려면 힘들어. 너도 이제 어린 나이 아니잖아. 곧 있으면 뼈 시리고 무릎 시리고 그럴 건데 이 나이에 무술은 무슨. 그냥 몸 잘 쓰는 경호원 옆에 두고 대리 만족이나 해.”
그러면서 홍삼스틱을 빨아먹는 박종연의 모습이 좀 안쓰럽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두 사람 앞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으니.
“아, 표 감독. 오랜만이야.”
“한국은 언제 들어오셨어요? 영국 가신다는 소식만 들었지 오셨다는 이야긴 못들었는데.”
“나야, 원래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는 사람 아냐. 오자마자 코가 꿰어도 단단히 잘 못 꿰어서 쉬지도 못하고 일하게 생겼다고.”
“그런 것 치곤 얼굴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그렇게 남자의 시선이 자연스레 경우에게 향했다. 자신을 향해 웃는 남자의 모습에 경우는 그만 잔뜩 얼어붙고 말았으니, 박종연은 그런 경우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남자에게 경우를 소개하기 바빴다.
“인사드려. 이쪽은 무술 감독으로 권위가 높으신 표재동 감독님. 이쪽은 내가 전에 말한 민경우 작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표재동이라도 합니다.”
표재동이 손을 내밀었지만 경우는 눈만 끔뻑끔뻑할 뿐 대꾸가 없었다.
“이 자식, 왜 이래? 민 작가!”
박종연이 툭 치자 최면에 풀린 것처럼 경우의 정신이 돌아왔으니 자신의 앞으로 내민 표재동의 손을 본 그가 다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아, 민경우라고 합니다.”
“이 자식, 아까 들어오면서부터 멋있다고 난리더니 표 감독 보고 얼었나 보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제 사무실로 옮길까요?”
세 사람은 액션 스쿨 안쪽에 있는 표재동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대접할 게 마땅치 않아서요.”
“믹스 커피가 왜? 나 즐겨 먹어.”
“저도요. 감사합니다.”
커피 한 모금을 하던 경우가 표재동의 눈치를 보고 있자 웃으며 그가 말했다.
“뭐,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혹시…… 이름 바꾸지 않으셨어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진짜? 표 감독, 이름 바꿨어?”
갑작스러운 경우의 말에 표재동은 물론 박종연도 놀란 눈치였으니.
“뭐, 어쩌다가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제가 감독님 팬이거든요.”
“저야말로 작가님 드라마 인상 깊게 봤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나는 표 감독이 이름 바꾼 줄 몰랐어.”
“어디서 인터뷰할 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실은 저 스턴트맨 되고 얼마 안 돼서 크게 다친 적이 있었거든요. 꿈에 그리던 일을 시작했는데 하마터면 아예 일 자체를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사주를 봤는데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그래야 다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사연이 있었어? 그래, 원래 이름은 뭐 였는데?”
“표영한이요.”
“생각보다 평범하네. 확실히 표영한보다 표재동이 표 감독한테 딱 맞는 것 같아. 이름 잘 바꿨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괜한 짓 했나 싶기도 했는데 이름 바꾼 뒤론 크게 다친 적도 없고 일도 잘 풀려서 이런 액션 스쿨도 차렸잖아요.”
그는 심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얼굴이 많이 달라졌을 정도였으니 당시의 부상이 꽤 심각했던 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가 웃자 어릴 때 알던 얼굴이 얼핏 보였으니 경우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영한이 형, 이제 못 보는 거예요?’
‘형이 자리 잡으면 자주는 못 와도 가끔 너희들 보러 올게.’
이전 생에 그가 자랐던 보육원에서 함께 있었던 가장 나이 많았던 형이 표영한이었다.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아이들의 군기를 잡고 동생들을 잘 보살펴 준 그가 만 18살이 되어 보육원을 떠났을 때 어린 은석도 많이 울었다. 금방 다시 찾아올 거라던 그는 다시 오지 못했다.
그가 크게 다쳐서 그럴 수 없었다는 사실을 경우는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어쨌든 그를 이렇게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좁았고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