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21화 (221/250)

#221. 경계를 넘어 (1)

드디어 웹플릭스와 함께 하는 드라마의 트리트먼트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고 대본 작업에 들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생각에 잠긴 경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트리트먼트에 대본 작업까지 몰입해 있어서 정작 중요한 걸 잊고 있었어요.”

“중요한 거라니요?”

“우리 드라마 스탭이요. 아직 정하지 않았잖아요.”

“그거야 PD님이 같이 일할 사람을 꾸리시니까…… 아!”

그제야 신도현은 경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이 드라마의 연출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PD를 정하지 않은 거였다.

그동안은 대부분 방송국에 소속된 PD들과 작업했다. 아무래도 방송국과의 관계도 있었으니 PD는 방송국 쪽 사람이어야 일을 진행하는데도 무리가 없었다. 해서 경우는 여의치 않으면 스튜디오 글로리에 소속된 PD와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최우선으로 방송국 소속 PD와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방송국과 일을 하는 게 아니었다. 웹플릭스 측은 창작의 자유를 존중한다며 드라마 제작 전반에 관한 건 전부 스튜디오 글로리로 넘겨 버린 상태였다. 덕분에 하나부터 열까지 경우에게 지워진 책임이 막중했다.

그동안 대본 작업만 해 놓으면 PD가 다른 자잘한 일은 신경을 써 준 덕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니 뒤늦게 터진 사태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럴 땐 경험 많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가장 좋죠. 대표님께 물어봐야겠어요.”

“저기, 작가님. 너무 바쁘셔서 잊으신 거 같은데요…….”

머뭇거리는 신도현의 모습에 경우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 대표님 지금 장기 휴가 가셨잖아요.”

“아!”

그동안 회사를 위해 휴가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일만 해 온 김종수를 위해 경우는 거절하지 못하도록 부부 동반 크루즈 여행을 보내드렸다. 그 덕에 김종수는 한 달 간 세계 곳곳을 돌며 쉬다 올 예정이었다.

“제가 진짜 정신이 없나 봐요.”

“작가들이 다 그렇죠. 드라마 시작하면 드라마 말고 다른 건 아예 생각조차 못하잖아요.”

“역시 내 마음 알아주는 건 신 작가밖에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안청모 PD님은 안 될까요?”

“그건 어렵죠. 예전이라며 모를까 지금은 스튜디오 글로리 소속이 아니라 S&Media소속이잖아요.”

“그런가요? 그럼 나상재 감독님은요?”

두 사람이 같이 작업했던 드라마 <뫼비우스>의 연출을 맡은 나상재와 꽤 호흡이 좋았음을 떠올린 신도현은 일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뫼비우스>가 끝난 이후 영화 한 편을 제작했던 나상재는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고 현재는 쉬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영화 제작을 하지 않았던 것일 뿐 작가실에 나와 작품 구상을 하는 건 여전했으니.

“참, 요즘도 나 감독님 작가실에 나오세요?”

“그러고 보니 지난달부터 작가실에 통 나오지 않으셨어요.”

경우는 일도 일이지만 작가실에 나오지 않았다는 신도현의 말에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 * *

학창 시절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충무로에 들어온 이후 만들었던 영화가 전부 흥행에 실패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구겨진 나상재가 도피했던 곳이 바로 처가에서 하는 식당이었다. 영화를 아예 접고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며 숨어 살던 그를 찾아온 일이 새삼 어제 일처럼 떠오른 경우는 감회가 새로웠다.

1층으로 된 허름한 식당은 어느새 5층짜리 건물로 변해 있었으니 식당의 입구에서부터 나상재가 만든 영화 포스터는 물론 경우, 신도현과 함께 작업했던 드라마 포스터까지 걸려 있어 처가에서 달라진 그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도 잘되고 드라마도 잘되면서 가장 좋아하는 게 아내보다 장인, 장모님이었다며 고마워하던 그의 말을 떠올렸다. 신기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그를 향해 한 남자가 말했다.

“몇 분이세요?”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에 이상하다 싶어 황급히 돌아본 경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감독님이 여기 웬일이세요? 설마 영국에서 퇴출당한 건 아니죠?”

“퇴출이라니! 퇴출이라니! 너는 내가 그런 인간으로 보여?”

나상재가 있을 거란 예상을 깨고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박종연이 경우가 한 말에 씩씩대고 있었다.

자타공인 상업성과 작품성을 모두 겸비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 감독이 바로 박종연이었다. 경우의 단막극 <시체가 나타났다>를 리메이크, 영화로 제작해 흥행에 성공했던 그는 그 뒤 영국으로 진출했다. 그가 평소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에드 슐먼의 작품 을 드라마화하는데 감독으로 제안을 받은 거였다.

한국의 감독으로서 해외 진출은 감개무량한 일이었지만 영화만 연출해 왔던 그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그것도 영국의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을까 고민이 무척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가의 작품을 드라마화하는데 결국 마음이 흔들렸으니 그는 그렇게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랬던 그가 영국도 아닌 이곳 한국에서, 그것도 나상재 감독의 처가에서 하는 식당의 카운터를 보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당연히 영국에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계시니까 그렇죠. 어쨌든 감독님 만나서 반갑네요.”

배시시 웃는 경우의 모습에 박종연의 화도 푸시식 식고 말았다. 두 사람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방 쪽에서 나상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민 작가 왔어요?”

“감독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자세한 건 종연이한테 들어요. 내가 지금 좀 바빠서.”

그렇게 인사만 한 나상재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대답을 해 달라는 경우의 눈빛에 박종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재 장인어른이 쓰러지셨다나봐.”

“네? 어쩌다. 많이 안 좋으신 거예요?”

“다행히 발견이 빨랐고 병원으로 빨리 옮길 수 있어서 수술을 잘 마쳤다고 하더라고.”

“몰랐어요.”

“당연하지. 상재, 저놈이 어디 그런 이야기를 떠벌릴 놈이야? 어쨌든 장인어른이 병원에 입원해 계시니 장모님이 간병하신다고 병원으로 가셨어. 근데 장인어른이 가게 쉬면 안 된다고, 문 닫으면 손님 떨어진다며 장모님을 자꾸 보내려 한 대. 그래서 장인 마음 편하게 해드리려고 상재 저놈이 나선 거 아냐.”

“그래도 식당 일이 보통이 아닐 텐데요.”

“저놈, 영화 계속 실패할 때마다 장인어른이 영화로 밥 벌어먹긴 힘들지 싶어 식당일을 자주 돕게 했다나 봐. 생각보다 잘해.”

“그럼 나 감독님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 있냐? 요리라고는 라면하고 밥밖에 할 줄 모르는 놈인데. 요리는 제수씨가 하고 저놈은 설거지 담당.”

“근데 감독님은 어쩌다 여기 계신 거예요?”

“영국에서 일 끝나고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가 친구 얼굴 좀 보고 겸사겸사 밥도 먹을 겸 왔다가 붙잡혔다. 식당은 커졌는데 책임자 두 분이 자리를 비우니까 감당이 돼야지. 금방 사람 구한다니까 그동안 도와줘야지 별 수 있냐?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이럴 때 돕고 그러는 거지.”

“혼자보기 아깝다. 이거 SNS에 올리면 진짜 난리 나겠는데요?”

경우의 말에 박종연이 기겁했다.

“야, 행여나 그런 짓 하기만 해 봐. 지금도 손님 몰려올까 겁난다. 네가 안 해 봐서 모르는 모양인데 점심 때 되니까 손님들이 물밀 듯이 몰려오더라. 나 웬만해선 겁 안 내는데 손님 몰리는 거 보고 진짜 오금이 저리더라니까.”

엄살을 부리는 그의 모습에 경우는 웃고 말았다. 60년 전통 해장국집에서 일했던 경력이 얼만데. 매일 점심시간이 땡하면 근처 직장인들이 몰려와 순식간에 테이블이 가득 차는 건 물론 밖에 놔둔 의자까지 대기줄이 생길 정도로 많은 손님을 상대했던 그였다. 겨우 이 정도? 경우의 눈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일이 끝났다고 하신 거면 드라마가 아예 방송까지 끝난 거예요? 어떻게, 잘 됐어요?”

“내가 누구야? 박종연 아니냐? 당연히 잘했지. 일일이 말하고 다니는 것도 힘들다.”

“외국 드라마라고 아무렇게나 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왜? 어차피 인터넷 쳐 보면 금방 나오는 거 거짓말을 할 필요가 뭐 있어? 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뿐이야.”

“그럼 드라마 끝나자마자 오신 거예요?”

“어. 집 비운 지도 오래고.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영국 음식…… 진짜 그 사람들은 뭘 먹고 사나 몰라? 하다못해 프랑스나 이탈리아만 가도 맛있는 거 많잖아. 근데 미각이 다른 나라랑 다른가? 마른 빵만 씹다 오니까 국물 생각이 간절하더라. 그래서 여기 온 거기도 하고.”

“감독님이 연출한 드라마는 어떨지 궁금하네요.”

“궁금해하지 말고 보면 되잖아. 나 그쪽이랑 계약서에 도장 찍자마자 너네 회사에서 수입하기로 했다며?”

“아! 그랬지.”

“젊은 애가 왜 그렇게 정신이 없어? 그리고 여긴 웬일인데?”

박종연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경우는 아무래도 나상재가 현재 자신들과 함께 일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대신 그의 앞에 새로운 대상이 있었으니.

“감독님, 상의드릴 게 있는데요.”

“야, 왜 웃고 그래? 겁나게. 너 그렇게 웃을 때마다 겁나는 거 아냐?”

“제가 뭐 그렇게 나쁜 짓 한 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뭐가 문젠데?”

“그…… 영국 드라마 하는 건 어떠셨어요? 가시기 전에 드라마는 안 해 봐서 걱정을 좀 하셨잖아요.”

“그렇긴 했는데 드라마나 영화나 호흡이 다른 것만 빼고는 나쁘지 않았어. 좀 긴 영화를 시리즈로 찍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영국 드라마도 섭렵하셨으니 한국 드라마도 문제 없으시겠네요?”

“그렇지. 한국 드라마 그까짓 것…… 야, 너 설마.”

“저희랑 드라마 같이 해 보실 생각 없으세요?”

눈빛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의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박종연은 자초지종부터 듣기로 했다.

“사정은 알겠는데 나 작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못 쉬었다. 너도 알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충전의 시간이 필요한 거. 거기다 드라마는 영화보다 호흡이 길어서 시간도 오래 걸리잖아.”

“그러니까 지금 감독님 말씀은 어렵다, 그거죠?”

“오케이 못 해서 미안하게 됐다.”

“어쩔 수 없죠. 대신에 마땅한 사람 좀 추천해 주세요. 그래도 같이 일해 보셨으니까 제 스타일 알잖아요. 저희 드라마를 잘 맡아 줄 감독님만 추천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거절한 게 미안하기도 해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던 박종연은 알고 있는 연출자들 중에 알맞은 사람을 찾으려 고민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생각나는 사람이 없냐? 딱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없네. 우리나라에 이렇게 인재가 없었나?”

“그러지 마시고 잘 생각해 보세요. 이왕이면 연출자가 정해져야 대본 작업을 할 때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다고요.”

“네가 좀 까다로워야 말이지. 아니, 깐깐하고 실력 있는 놈한테 웬만한 사람 붙여줘 봐야 성에 안 찰 거 아냐?”

“그렇긴 하죠.”

박종연은 휴대폰 속 지인 명단을 살펴보던 중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민 작가, 이럴 게 아니라 차라리 네가 연출을 맡아보는 건 어때?”

“예? 제가요? 말도 안 돼요. 드라마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제가 어떻게…….”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너한텐 충분한 능력이 있어. 그때 같이 작업했었잖아. 난 그때 너 알아봤다니까.”

“그거야 스크립터였잖아요. 물론 보통의 스트립터가 했던 일의 범주를 넘어서긴 했지만―.”

“내가 왜 그렇게까지 널 부려 먹었는데. 너한테 연출의 재능이 보였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

“그래, 좋다. 만약에 네가 연출을 맡는다고 하면 내가 도와주마. 어떠냐?”

“저, 정말이세요? 정말로 저 도와주실 거예요?”

“아까는 절대 안 된다고 하더니 금방 말이 바뀐다. 너?”

“그거야 처음엔 혼자 다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감독님이 도와주신다면 그게 아니니까 그렇죠.”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돼. 대본은 작가 한 사람이 쓰는 거지만 현장에선 모두와 협업을 하거든. 넌 연출 경험이 없으니까 연출을 맡으면 현장에서 네가 모든 걸 다 감당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조연출도 있고 촬영감독도 있고 수많은 스탭들이 있잖아. 그 사람들과 협업하는 게 드라마야.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경우야.”

박종연의 말 덕분이었는지 처음엔 영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도 그렇게 불가능한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 좀 해 볼게요.”

경우는 졸지에 혹 떼러 왔다가 혹 하나 더 붙이고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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