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19화 (219/250)
  • #219. D-Day (4)

    웹플릭스에서 방송될 새 드라마의 트리트먼트를 위해 경우와 신도현은 며칠째 머리를 맞대는 중이었다. 술술 풀렸던 초반과 달리 이야기는 금세 벽에 막혔으니 처음으로 되돌아가 전면 수정한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이게 괜찮다 싶으면 저게 걸리고 저게 괜찮다 싶으면 또 다른 게 문제였다.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은 탓에 스트레스가 쌓인 신도현이 뻐근해진 어깨를 주물렀다.

    “힘들죠?”

    “이번 작품, 생각보다 어렵네요.”

    “돌이켜보면 그동안 너무 순탄했던 거죠. 처음 방송일 시작했을 때부터 잘 풀린 건 사실이잖아요. 작가님이나 저나 둘 다 단막극 경험 없이 미니시리즈부터 쓰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가? 요즘엔 단막극 경험이 없는 게 꼭 좋은 건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요.”

    “사람마다 다른 것뿐이죠. 이쪽 일에 정석 같은 건 없어요.”

    “네. 근데 일정은 괜찮은 거예요? 보통 방송국에선 방송될 날짜가 있으니까 거기에 맞춰 모든 일정을 짜잖아요. 근데 이번엔 그런 게 없으니까 좀 이상해서요.”

    “아무래도 방송국하고는 다르죠. 편성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시기 조율을 하기는 할 테지만 우리 쪽 편의를 봐준다고 하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그게 아니라 오히려 마감이 없으니까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진다고 할까? 시간 충분하니까 생각할 시간도 많아지는 건 좋긴 한데, 그래서 긴장감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정 그러시다면 마감이야 만들면 되죠. 좋습니다, 그 부분은 더 생각해 보기로 하죠.”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회의실 유리 벽 너머로 안쪽을 들여다보는 김강철의 모습에 신도현이 미소 지었다.

    “요즘 드라마 말고 무슨 바쁜 일이 있으신가 봐요.”

    “미안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트리트먼트는 제가 더 생각해 볼게요.”

    “그래 주시면 고맙구요.”

    신도현을 내버려 둔 채 경우가 회의실을 나가자 김강철이 따라붙었다.

    “내 방으로 가자.”

    그렇게 경우 방으로 자리를 옮긴 뒤 김강철은 가지고 온 사진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몰래 찍은 한 남자의 사진이 테이블 위에 가득했다. 남자가 오은채를 만나는 사진도 여러 장 있었다.

    사진 중 하나를 집어 자세히 보던 경우는 잊었던 옛 기억을 떠올렸다. 얼핏 봤던 뉴스 화면 속 그 남자가 분명했다. 임효곤.

    이전 생,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큰 이슈가 터졌다. 삼선에 도전 중인 한 국회의원의 비서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인터뷰를 한 거였다. 인터뷰가 알려지자 사건은 일파만파 퍼지고 말았으니 해당 국회의원이 바로 한석인이었다.

    모함과 음모라고 항변했지만 그의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들으려 하지 않았다.

    흙수저 기자 출신이었으나 재벌 버금가는 처가, 거기다 국회의원. 남의 성공에 배 아파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한 남자의 몰락을 즐겼으니 온갖 거짓 뉴스와 사람들의 비난에 결국 그는 당의 종용에 못 이겨 후보를 사퇴하게 된다. 그 뒤 사건은 결국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다만 결백했던 한석인은 끝까지 무고를 주장해 결국 소송을 진행하고 무죄판결을 받지만 그의 무죄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화제성이 사라진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한석인은 강제적으로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때 피해를 당했다는 비서의 변호를 맡은 이가 바로 임효곤이었다. 비교적 수려한 외모에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는 피해자를 대신해 언론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그 이후로도 뉴스나 시사 프로에 종종 나와 얼굴을 알렸다. 그 결과 차기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 대표로 의원직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모두가 윈윈이 된 선거였다.

    단 한 사람, 아무 죄 없는 한석인만 빼고.

    “새시대 정치 연구소라고, 왜 그런 거 있잖아. 선거 때 되면 전문적으로 후보 케어해 주고 선거 전략 짜 주는 그런 곳. 거기에서 꽤 유능한 직원이라고 하더라. 그 사무실에서 현재 밀고 있는 후보가 봉민철이래. 근데 갑자기 이 사람은 왜? 혹시 한석인 의원 때문이야?”

    “…….”

    한석인도 걱정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봉민철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봉민철이 발의한 법안은 선정적, 폭력적 영상물들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땐 종편을 위한 것들이었다.

    이름도 생소한 참사랑 부모회라는 시민 단체와 손을 잡아 TV 프로그램을 검열할 기구를 만들었으니 사전에 대본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촬영된 결과물이 검열된 대본과 내용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방송이 불가하도록 만들었다.

    수많은 스탭들과 열심히 만든 드라마가 대본 수정을 이유로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으니 제작진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편집을 해야 했고 그 결과 프로그램의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검열 기구가 내세운 기준이 종편엔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그 탓에 종편 시청률이 오르는 결과를 만들어 냈고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느껴지는 종편으로 유명 작가와 PD들이 몰리는 기현상을 만들어 냈다.

    훗날 법이 개정될 때까지 종편을 제외한 지상파, 케이블 방송은 그야말로 암흑기를 걷게 되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는 이상 경우는 똑같이 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거기다 국회의원이기 이전에 한 남자로서 한석인이 억울한 일을 당하도록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전에 지시한 건 그대로 다 처리했는데.”

    “모든 이야기엔 말이다, 위기의 순간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야.”

    “뜬금없이 이야기 소리는 왜 하는데?”

    “잘 들어 봐. 주인공에게 처한 위기의 순간이 있어야 그 다음에 오는 클라이막스에 카타르시스가 커질 거 아냐?”

    그러면서 경우는 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을 차근히 알려 줬다.

    두 사람이 한참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작가님, 저…… 손님이 오셨는데요?”

    어쩐지 떨떠름한 모기범의 얼굴에 경우는 의아했다. 도대체 누가 왔는데 저런 얼굴이지 싶은 그때 모기범의 뒤로 얼굴을 내민 건 다름 아닌 박현호였다.

    “네가 여긴 또 왜?”

    모기범은 물론이고 박현호가 어떤 난동을 부렸는지 알고 있었던 김강철 역시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괜히 긴장감만 고조되던 그때 경우가 툭 치며 그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눈치를 챈 김강철이 서둘러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임효곤의 사진을 빠르게 치우기 시작했다.

    “모 PD님, 바쁘신데 고맙습니다. 가셔서 일 보세요.”

    “괜찮을…… 까요?”

    “걱정해야 할 건 이쪽이 아니라 저쪽―, 윽!”

    사진을 치우며 궁시렁거리는 김강철의 옆구리를 치자 움찔한 김강철은 여전히 경계 중이던 모기범을 챙겨 방을 빠져나갔다. 드디어 둘만 남자 박현호가 투덜댔다.

    “너네 직원들은 다 왜 저래? 손님 접대를 어떻게 하는지 제대로 교육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 손님이 지난번에 내 멱살을 잡아서 그런 걸거야, 아마. 이유 없이 사람을 막대하진 않거든.”

    “오호, 충성심이 대단한 직원들인가 봐?”

    “충성심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믿음, 의리라고 해야 할까? 너야 평생 모를 테지만.”

    한마디를 지지 않고 대꾸하는 경우의 모습에 짜증이 난 박현호가 머리를 헝클었다.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는 듯.

    “됐으니까 여기까지 온 용건이나 말해. 설마하니 지난번에 드라마 문제 때문에 아직까지 꽁해 있는 건 아니겠지?”

    “거기에 대해서도 내가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만 어쩌겠어? 아량 넓은 내가 참아야지. 원래 안 될 일엔 포기가 빠른 법이거든.”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난 또 네가 울고불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 매달리면 어떡하나, 그땐 정말 같이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했었거든.”

    “진짜? 진짜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면 해 줄 거야?”

    “왜 이래?”

    진지한 그의 얼굴에 경우는 어쩐지 그가 진짜로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면 어쩌나 싶어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박현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쫄긴. 걱정 마. 이젠 내가 싫으니까.”

    “다행이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데 너랑 같이 일하는 것보다 네가 망하길 기도하는 게 더 빠르다고 생각하거든. 지금이야 인기 많은 작가라는 거 인정해. 하지만 그 인기가 언제까지 갈까? 너도 별수 없는 날이 올거야. 머지 않아.”

    생각보다 살벌한 말이라 경우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그래,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서론은 대충 거기까지면 된 거 같은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여긴 왜 왔어?”

    “그냥 경고를 좀 하려고.”

    “경고? 무슨?”

    “너는 아닌 척 했지만 한석인 의원, 꽤 친한 거지?”

    “…….”

    순간 임효곤을 미행한 사실을 들킨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경우의 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그렇게 볼 거 없어.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이득을 위해서라도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거 당연한 거 아냐?”

    “그래서?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데?”

    “그렇게 볼 거 없다니까 그러네. 내가 말했지. 경고라고. 그렇다는 건 조심하라는 거잖아.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거.”

    “……!”

    설마 이 녀석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해 주려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도대체 난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거든?”

    “나는 말이야, 내가 너를 참 싫어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꼭 그런 건 아니더라고. 너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어.”

    “그게 누군데?”

    “우리 형.”

    그러고 보니 대진일보의 차기 주인이라 불리는 황태자가 있었다. 박본규 회장이 애지중지한다는 장남 박상우. 박현호 역시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해 미국 유학이 소위 말해 있는 집 자식들의 도피성 유학 같은 건 아니라고 들었다. 뉴욕대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 그보다 한수 위라고 평가되던 게 바로 박상우 부사장이었다.

    경우는 어쩐지 그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서로 더 많은 것을 차지하게 위해 싸워야 하는 형제간의 우애가 눈물겨울 정도로.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형이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어. 한석인, 그 사람한테 꽤나 치명타가 될 거야.”

    “그래서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우리 형 물 먹이는 거. 네가 잘만 해 준다면 지난번 나한테 했던 짓, 쿨하게 넘어가 줄게.”

    “거절한다면 어쩔 건데?”

    경우의 도발에 박현호가 피식 웃었다.

    “사람이 어디까지 추잡스러워질 수 있는지 볼 수 있을 거야. 궁금하면 가만히 있든가?”

    어쩐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보다 이쪽이 더 그럴 듯하게 느껴졌으니 경우는 대답 대신 미소로 답했다.

    * * *

    후보자 등록 신청이 끝나고 2주간의 본격적인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다. 후보자의 연설이 녹음된 차량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곳곳에 걸린 현수막하며 각 당을 상징하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기 후보를 뽑아 달라 명함을 돌리기 일수였다.

    손톱의 거스러미를 쥐어뜯던 박상우는 서랍 한쪽에 넣어 둔 손톱 용 사포를 꺼내 문지르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잘 정돈된 손톱을 보니 오늘도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걸리적거리는 건 뭐든 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게 사람이든 뭐든.

    그는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한석인에게 해명할 기회도 없이, 그를 대체할 다른 인물이 등장할 새가 없도록.

    국민을 위해 일할 일꾼을 뽑는다는 건 교과서에나 나오는 사람들의 희망 사항일 뿐 선거를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은 그랬다. 차악을 뽑는 것.

    한석인의 문제가 터지면 자연히 봉민철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석인보다는 낫겠지라는 생각이면 충분하니까.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동안 준비해 왔던 것들이 결실을 맺을 날이었다. 약간 들뜬 마음에 콧노래를 부르던 그는 밖의 소란스러움이 들리는 듯 했다.

    마침내 TV를 켠 그의 얼굴은 그러나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같은 시각, 대진일보 본사에서 멀지 않은 채널 DBN의 신사옥에서도 뉴스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하여간 민경우, 솜씨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박현호는 TV 뉴스에 보도된 특종을 보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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