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18화 (218/250)
  • #218. D-Day (3)

    “의원님?”

    잠이 든 건 아니었다. 그저 생각할 게 많았을 뿐.

    집에 도착했는데도 꼼짝도 않은 그의 모습에 걱정스레 보던 기사가 물었다.

    “혹시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니,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린 그가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 경우를 만나 나누었던 대화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던 그는 요즘 들어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어디다 하소연할 데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거실로 들어서는데 TV를 틀어 놓은 채 잠들어 있는 아내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이미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는 소파에 잠들어 있는 아내 곁으로 다가갔다.

    “여보, 들어가서 자지 않고?”

    “이제 왔어요? 나 또 잠들었나 봐. 요즘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쏟아지는 건지. 당신 기다리고 있었는데…….”

    “피곤하니까 그러잖아. 오늘도 봉사 활동 다녀왔다면서? 들어가서 자지 그랬어?”

    “당신이 안 들어왔는데 혼자 자고 있기 그렇잖아요.”

    “괜찮아. 나 때문에 당신까지 피곤하게 해서 미안한데. 앞으론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그거야 내 마음이죠.”

    잠이 가득한 눈으로 웃고 있는 아내의 모습에 한석인은 그날 경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의원님. 청소를 하기 위해선 내가 더러워지는 것도 감수해야 하는 겁니다.’

    ‘이 바닥에선 선의가 언제나 선의로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요.’

    ‘저는 의원님 같은 분이 국회에 오래 계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아내가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일은 무슨.”

    “얼굴이 안 좋은데?”

    “피곤한 모양이지.”

    “그럼 욕조에 물 받아 놓을게요. 씻고 나면 개운해질 거야.”

    “고마워.”

    “별소릴 다 해.”

    아내를 향해 미소 지은 그는 경우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혼자만 깨끗하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 사람들, 나를 위해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 손이 더러워지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네거티브를 쓸 거라곤 생각했지만 봉민철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같은 기자 출신에 현장에서 마주한 것도 여러 번, 한창 일할 땐 밤늦도록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시절도 있었건만…….

    결국 목적을 위해선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는 조금 서글퍼졌다.

    * * *

    귀가 간지러운지 긁적이던 봉민철이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예의와 서열을 중시하는 아버지 앞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봉민철의 모습에 박현호는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두 눈을 의심했으나 정작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앞으로 국회의원이 되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사이였으니 박본규는 그를 자신의 두 아들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했다. 어렸을 때 집으로 찾아와 몇 번 본 기억은 있었으나 어쨌든 사업 파트너로서 첫 상견례였던 셈이다.

    “그나저나 형님, 형님은 좋으시겠수다. 이렇게 든든한 아드님이 두 분이나 뒤를 받쳐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왜, 부럽냐? 딸 자랑할 때는 언제고?”

    “딸이 키우는 맛은 있죠. 그렇긴 한데 요즘 같은 땐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절실하더라 이 말입니다. 선거운동 다닐 때 데리고 다니면 폼 나잖아요!”

    “폼 나려고 아들 낳는다는 사람은 살다 살다 처음 본다.”

    성향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의외로 말이 통하는 두 사람을 보며 박현호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술을 잔뜩 마신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걸 떠올렸다. 대학 동문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또라이라 마음에 들었다나 뭐라나. 그게 봉민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꽤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하여간 다 형님 때문입니다. 형님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해외로 돌면서 독자들한테 사인을 해 주고 있을 사람은 이홍구가 아니라 나였을 거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홍구 그놈이나 되니까 그 긴 무명도 견딘 거지. 어차피 넌 내가 아니었어도 진작 소설은 때려치웠을 걸. 너는 생각이 얕아. 단순한데 야심은 크고.”

    “그래도 글은 홍구보다 내가 더 잘 썼다 이겁니다.”

    “어릴 때 잘 쓰면 뭐 해? 좀 있으면 뽀록날 실력인데.”

    “오늘 나 왜 부른 거요? 자식들 앞에서 면박 주려고 불렀수? 하여간 그렇게 오래 봐 왔으면서 좋은 말 해 주는 꼴을 못 봤어, 내가.”

    “아무한테나 그러겠냐? 너니까 그런 거 아냐. 너는 들판에 잡초 같은 놈이라 밟아야 독기를 품거든.”

    “그래서 나 생각하셔서 그랬다는 거요? 하이고, 눈물 날 정도로 고맙네.”

    술을 곁들인 식사 자리, 앞에 놓인 잔을 비운 봉민철이 실없는 웃음을 거두자 제법 사나운 눈빛이 반짝였다.

    “그나저나 큰아드님이 이번에 부사장 자리에 오르셨다면서요? 처음 입사하자마자 뉴욕으로 나가 계시느라 같이 일은 못 해 봤는데 실력은 어떠시려나?”

    “걱정 마, 일은 잘하는 놈이니까.”

    “형님이야 자식이니까 그렇게 느끼시겠죠. 하지만 난 아니에요. 형님한테 떠밀려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도 밀려나면 더 오라는 데도 없어요.”

    “오라는 데가 왜 없어? 여의도에 당당히 입성하는 거지.”

    “낙관하기엔 얼마 전에 한 여론 조사가 마음에 걸리는데요? 알다시피 내가 좀 현실적이라서.”

    “우리 아우님, 언제부터 그렇게 간이 콩알만 해졌나? 우리 큰애가 다 알아서 준비할 거라고 걱정 말라고 했잖아?”

    “아버지 말씀대롭니다. 지금 저희 쪽에서 작업하고 있으니 다음 여론조사 땐 지금과 다른 결과를 얻으실 겁니다.”

    시계를 보던 박상우가 살짝 미소 지었다.

    “지금쯤이면 아마 이야기가 상당히 진행되었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거야?

    당사자가 있는 이 자리에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형의 모습에 무슨 일을 꾸미느라 이렇게 조심하는지 박현호는 궁금했다. 원래 별일 아닌데도 꽁꽁 숨기면 더 궁금해지기 마련. 대충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았으면 좋으련만.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형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형이 두고 간 휴대폰에 진동이 울리면서 화면이 밝아졌다가 이내 어두워졌다. 본능적으로 휴대폰에 시선이 간 박현호는 화면에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문자 메시지에 눈빛이 흔들렸다.

    * * *

    솔직히 그에게 전화를 건 것은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정치 연구소 같은 곳에서 국회의원이나 보좌관이 아닌 비서인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것 자체가 신기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오은채의 생각과 달리 새시대 정치 연구소의 연구원이라며 자기를 소개한 남자는 오은채에게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밀며 전혀 의외의 부탁을 하고 있었다.

    “이게 뭔가요?”

    “보시면 아실 테지만 돈입니다.”

    “네? 그걸 저한테 왜?”

    “오은채 씨한테 부탁할 일이 있거든요.”

    “부탁이라면…….”

    그는 오은채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오은채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지금 나보고 의원님을 모함하라 이겁니까?”

    “어차피 이념이 같은 것도 아니고 주영규 보좌관처럼 그의 밑에서 일하다 공천을 받을 꿈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개인적인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사람을 모함해야 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오은채 씨를 스카우트하는 거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그래서 멀쩡한 사람을 성추행범으로 몰아요? 좋아요, 한다고 칩시다. 근데 그렇게 했다간 의원님만 끝나는 거 아니에요. 의원님보다 더 큰 치명상을 입는 건 바로 나라고요!”

    “그렇겠죠.”

    “그렇겠죠? 이봐, 자기 일 아니라고 막하지. 에휴, 내가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일어서려는 그녀를 남자가 붙잡았다.

    “이야기는 끝까지 듣고 가시죠?”

    “들으나 마나죠.”

    “오은채 씨 말이 맞습니다. 아마 일이 터지만 한동안 사람들한테 시달릴 겁니다. 오은채 씨 학창 시절 생기부는 물론 SNS, 인터넷 게시글에 단 댓글까지 모조리 털릴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입니다. 선거 끝나면 오은채 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과거에 물의를 일으켰던 사람 중에 얼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

    “없죠? 새로운 사건이 계속 터지니까요.”

    “그래서 이까짓 푼돈 가지고 날 이용할 생각인가 본데―.”

    “착수금일 뿐입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돈의 10배를 더 드리겠습니다.”

    “여, 여, 열 배요?”

    “그만한 수고를 하는데 그 정도는 받아야죠. 아, 주위 이목이 정 신경 쓰인다면 소란이 있는 동안 외국으로 출국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겁니다. 물론 오은채 씨가 승낙만 하면 준비는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평생 개미처럼 일해도 벌 수 없는 돈을 얼굴 한 번 팔리고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 않습니까?”

    그녀는 자연히 테이블 위에 놓인 돈 봉투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개처럼 일해도 만져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돈이었다. 눈 한번 딱 감으면 거액의 돈이 내 차지가 된다는데 가슴이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성은 안 된다고 하고 있었으나 단박에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란 오은채의 시선이 그와 함께 움직였다.

    “그럼 일주일 후에 연락드리죠. 충분히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세요.”

    “이봐요, 이 돈은 가지고 가셔야지요! 이봐요!’

    뒤늦게 돈 봉투를 챙겨 쫓아갔지만 남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결국 그녀는 돈을 챙겨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온 그녀는 문은 물론 창문까지 꼭꼭 걸어 잠그고 커튼까지 친 뒤 검은색 비닐봉지에 겹겹이 쌓아 냉동실에 돈을 넣어 둘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집에 저런 거금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혹시 누군가 본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괜히 도둑이라도 들지 않을지.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 포근한 자신의 집이 그녀는 두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박상우의 계략이었으니.

    ‘언감생심, 처음엔 남의 돈 잠깐 맡아 두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아예 남한테 빌리는 것하곤 다르잖아. 마음만 바꿔 먹으면 내 돈이 될 수 있는 돈이거든. 그런 돈 앞에서 눈 돌아가는 거야 당연한 거고. 막상 닥치면 돌려주기가 아까워질걸. 이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을 테니까. 결국 우리 손을 잡을 수밖에 없어.’

    박상우의 말처럼 앞으로 일주일간 오은채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하게 될 터였다. 그렇게 한참 오은채의 집 주변을 돌며 지켜보던 남자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지않아 그녀가 다시 연락을 할 거라 그는 확신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으니 그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

    김강철은 그가 떠나자 조용히 그의 뒤를 쫓으며 경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복마전도 이런 복마전이 없다. 뭐냐, 이게? 이게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인 거냐?”

    [뭐래? 됐으니까 그 자식이 누군지나 알아 와.]

    그렇게 뚝 끊기는 전화.

    “하여간 이런 건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겠구먼, 꼭 나를 부려 먹어야 직성이 풀리지.”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경우의 말에 홀랑 넘어간 김강철은 뒤늦게 후회를 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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