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D-Day (2)
불러 놓고도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한 아버지 탓에 박현호는 벌써 1시간 가까이 입도 뻥끗 해 보지 못했다. 그저 아버지와 형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는 수밖에.
두 사람은 곧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당원들한테 보낸 문자 메시지 비용이 1억 7천만원, 2번의 여론조사에 5천 4백만 원, 선거 벽보 제작과 경선 홍보물 인쇄비 등으로 4천 7백만 원을 썼습니다. 그밖에도 사무실 임대료, 식대, 차량 렌트비, 홈페이지 비용 등이 3억 가까이 들었습니다.”
“제대로 된 선거 운동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억이 깨지는구먼. 이제부턴 일일이 그렇게 보고할 필요 없다. 이왕 시작하기로 한 거 돈 아끼지 말고 제대로 지원하고. 대신, 들어간 비용은 전부 꼼꼼하게 기록해.”
“물론이죠.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요? 이자까지 쳐서 두둑하게 받아 낼 생각이니 걱정 마시죠, 회장님.”
큰아들 박상우의 넉살에 흡족하다는 듯 박본규가 웃었다. 그 바람에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박현호는 더욱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진일보 박본규 회장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면 자식들을 불러다 앉혀 놓고 자기 일을 하기에 바빴다. 듣는 것도 다 공부고 교육이라 생각했을 테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그렇지 못했다.
언제 불호령이 내려질지 모르니 더욱 마음 졸일 수밖에. 거기다 중요한 이야기에서 소외되다 보니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 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 회장은 큰아들과의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부사장이 보기엔 어때? 봉민철이 그 친구, 당선 되겠어?”
“한석인 의원이 쉬운 상대는 아니죠. 원래 고정시가 양당 접전지역이었잖아요. 그러던 걸 한석인 의원이 당선되면서부터 야당 쪽으로 판세가 기운 모양셉니다.”
“한석인이 이번이 세 번째라고 했나? 일을 생각보다 잘하는 모양이야? 아니면 쇼맨십이 좋던지?”
“확실히 방송국 기자 출신이라 아무래도 얼굴이 알려진 게 컸죠. 그래서 친근한 이미지로 전략을 세운 모양이더라고요. 듣기론 처음 당선되자마자 사무실을 개방한 뒤로 민원 처리에 적극적이랍니다. 그 덕에 지지율이 유지되는 거고요.”
“난 한석인 그 친구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들어. 사람 운이라는 거 무시 못 한다고 말이야. 초년에 고생을 좀 했다고 들었는데 기자일 하면서 인기도 얻고 결혼도 잘하고 그 덕에 국회의원까지 승승장구했잖아, 안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한석인 의원의 경우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그럼?”
“처음 한석인 의원이 국회의원 나올 때만 해도 처가 덕 본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하여간 그놈의 놀부 심보.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더니 그걸 또 고깝게 보는 인간들이 있었구먼. 그럼 뭐야, 결국 한석인이 당선이 되었던 건 순전히 본인의 능력이었다, 이건가?”
“그렇게 분석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죠.”
어떻게든 자신의 손으로 국회의원을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있던 장남 박상우는 두 번의 여론 조사로 지금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상황임을 깨달았다. 이변이 없는 한 한석인의 당선은 유력했다.
거액의 돈을 뿌려서 얻은 자리였다. 당 대표가 선심 쓰듯 안겨 준 전략 공천이라는 말에 넘어갔는데 이런 상황임을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판을 엎어 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얻은 기횐데 그럴 순 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선거를 하는 게 중요했다. 어려운 판세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자신한 그는 힘든 상황임을 적당히 어필한 후 전세를 뒤엎어 최대한 자신이 돋보이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어쩐지 쉽게 간다 싶더니. 그래서 전략은 세웠고?”
“그럼요. 원래 국회의원은 연예인같이 이미지로 먹고사는 거 아닙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석인의 이미지를 부셔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미 방법까지도 생각해 낸 모양이구나.”
“네. 작전 짜 놨고 작업할 사람들 섭외해 놨습니다. 조금 있으면 결과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우리 장남이 일은 참 잘해. 하하하.”
그렇게 웃던 박본규의 시선이 마침내 차남 박현호에게로 향했다. 웃던 아버지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이 사라지는 걸 본 박현호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제 형의 반만 따라갔어도 좋으련만. 쯧쯧쯧.”
“그런 말씀 마세요. 그래도 현호가 채널 DBN을 키우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요. 이번 일만 해도 그렇잖아요. 결과가 좋지 않게 되었지만 다 회사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원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형이 자신을 위하는 척하는 모습이 박현호는 끔찍했다. 솔직히 자신을 보는 형의 눈빛은 조소 그 자체였으니 가증스러운 형의 가식을 완전히 벗겨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곧이어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그는 달아난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현호야, 옛말에 그런 말이 있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 회사를 생각했다는 네 형의 말, 나도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야. 확실하지 않은 일을 그렇게 떠벌린다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란다. 알았니?”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라고 한 소리가 아니야. 요즘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한다지? 안 좋은 일도 사람들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떠벌린다는데 좋은 일이야 당연히 자랑하고 싶었겠지.”
“…….”
“하지만 중요한 일일수록 입이 무거워져야 하는 법이다. 너는 예전부터 과시하는 걸 좋아했어. 공부도 잘 했고 주목을 받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고깝게 생각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걸 기억하려므나.”
이야기를 듣던 박현호는 그게 형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지 못한 박 회장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래. 남 잘되면 괜히 배가 아프고 안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지. 생각만 하면 좋은데 개중에는 일을 망치려고 행동에 나서는 인간들도 많단다. 그러니 확실해 지기 전엔 나서지 않는 게 좋아, 알겠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거고…… 그 기사가 났던 그 작가 말이다. 같이 일하는 건 완전히 넘어간 건가? 듣자 하니 실력은 있는 놈이라며? 하여간 요즘 것들은 조금만 추켜세워도 저 잘난 줄 알고 콧대가 높아지지. 잘 안 될 것 같으면 이참에 확 밟아 버려!”
“그게…… 새명 그룹 막내아들이랍니다.”
“뭐? 새명? 새명이라면…… 그 작가란 놈이 민 회장 막내아들이란 말이야? 민 회장 막내아들이 왜 그런 일을 해?”
“작가일만 하는 게 아니라 드라마 제작사에 케이블 방송사까지 가지고 있는 모양이에요.”
경우에 대해 생각보다 상세히 알고 있는 형의 모습에 박현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언제 저런 것까지 다 파악한 건지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이나 주변에 대해 형이 더 많이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새명에서 방송 쪽에도 진출했다고 하더니 그 아들 놈이었구만.”
새명 그룹이라면 대진일보에 광고비를 많이 내는 기업 중 하나였으니 꼴리는 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박 회장의 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쉽게 넘어갔다고 안도하고 있던 그때였다.
“그나마 이렇게 끝나서 천만다행이야. 민경우 찾아가서 멱살까지 잡은 거 보면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는데, 안 그래?”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말하는 형의 모습에 박현호는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젠 나한테 사람까지 붙였어? 누군데? 이 비서? 김 대리? 아니면 한 과장?”
“누군지가 왜 중요해? 네가 잘하면 되는 일인데. 솔직히 나라고 이러고 싶었겠어? 네가 하도 사고만 치고 다니니까 불안해서 내가 더 그러는 거잖아.”
“…….”
“현호야, 형으로서 부탁 하나만 하자.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 넌 그냥 가만히만 있어. 알았니?”
그렇게 비웃으며 사라지던 형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지 못한 게 아쉬웠다. 자기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박현호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형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저 잘난 줄 아는 형이 된통 당했으면, 자신이 아버지께 당하듯 형도 그렇게 당했으면 싶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것처럼 형에게도…….
그러다 한 가지 생각난 게 있었으니, 박현호는 곧장 김 대리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박현호는 대답 대신 김 대리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과 내통할 만한 사람을 꼽으라면 김 대리 밖에 없었다. 적당한 연차에 업무를 다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의 옆에서 잡다한 일을 다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전무님?”
“김 대리, 나랑 같이 일한 지가 얼마나 됐지?”
“올해로 5년차입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건지?”
“김 대리…… 혹시 딴생각하는 거 아니지?”
“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자신을 떠보려는 듯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 하마터면 그동안 김강철과 있었던 일을 실토할 뻔했다. 하지만 괜히 떠보는 것일 수도 있으니 증거를 들이밀기 전까진 절대 인정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 생각이 유효했는지 박현호는 이내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눈에 힘을 풀었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듯 말을 이었으니.
“혹시나 싶어서 하는 소리야. 나야, 김 대리를 믿고 있는 거 알지? 그만, 나가 봐.”
박현호의 방을 나오고서도 한동안 놀란 가슴은 가라앉지 않았다. 저 인간이 뭘 알고 저러나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 그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으니 직속 부하 직원인 이 비서였다.
“전무님이 뭐라고 하세요?”
“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이 비서는 이 비서 일이나 해.”
퉁명스럽게 돌아온 대답에 이 비서는 입술을 실쭉거렸다.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는 어딘가 바삐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 *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신을 놓은 채 손톱을 물어뜯는 오은채에게 주영규 보좌관이 다가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 된 선거 유세를 위해 동선을 미리 확인하려던 그가 오은채는 보지도 않은 채 손을 내밀며 말했다.
“유세 일정 정리해 놓은 거 있지? 그것 좀 줘 봐.”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니.
“오 비서? 이봐, 오 비서!”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정신을 놓고 있어?”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유세 일정 정리해 놓은 거 달라고.”
“아, 잠시만요.”
오은채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던 서류 속에서 그가 찾던 건 나오지 않은 채 쌓아 놓은 서류가 우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일한 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그런 일조차 제대로 못 해?”
“죄송합니다. 찾으시는 서류, 여기요.”
서류를 챙겨 가는 주영규의 눈빛이 사나웠다. 그 바람에 오은채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으니 이대로 가다간 제 명에 못 살지 싶었다.
억지로라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 그녀는 있는 힘껏 자신의 두 뺨을 때렸다.
바로 그때 안쪽 사무실 문이 열리고 한석인이 나오자 각자 자리에서 일을 하던 식구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괜찮아요. 일일이 일어설 거 없다니까 그러네. 볼일들 봐요.”
“의원님. 어디 나가시는 겁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따라나서려는 주영규를 한석인이 만류했다.
“괜찮아요. 오늘은 김 기사랑 움직일 테니까 주 보좌관은 사무실에 남아서 좀 챙겨 줘요.”
“그래도…….”
“괜찮다니까 그러네. 주 보좌관을 믿으니까 맡기는 거 아니겠어요.”
“알겠습니다, 의원님.”
한석인의 말에 마침내 웃는 주영규의 모습에 오은채는 말없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 * *
식사하라고 기사를 보낸 한석인이 룸으로 되어 있는 고급 한정식집으로 들어갔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유, 민 작가. 혹시 내가 늦은 건 아니죠?”
“그럼요. 제가 일찍 온 겁니다. 일단 이쪽으로 앉으시죠.”
북 콘서트 이후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줄 알았던 한석인은 어쩐지 경우가 평소와는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 다 물리고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니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될 이야기를 좀 할까 해서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긴장이 되네요. 그래, 무슨 이야깁니까?”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한석인 역시 긴장하던 그때 두 사람이 함께 있던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