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15화 (215/250)
  • #215. 공수래공수거 (8)

    내일 프로덕션의 제작사 협회 탈퇴는 생각보다 파장이 있었다. 유니언 스튜디오나 스튜디오 글로리에 밀리긴 했으나 드라마 제작사 중에 오래되기도 했고 정명도 대표와 관계가 있는 이들이 많은 탓이었다.

    그가 처음 드라마판으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주먹구구식으로 드라마를 만들었으니 어떤 체계랄 게 없었다. 지금의 체계를 구축해 왔던 게 그의 아버지. 그 역시 그런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며 오랫동안 제작 PD로 일해 왔으니 드라마판에서 그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상당했다.

    거기다 MBS에서 오연옥 작가의 새 드라마가 방송될 예정이었으니 새 드라마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제작사 협회의 문제 또한 거론될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그 문제에 사람들의 관심이 향하니 박현호 역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오연옥, 그 여자도 마음에 안 들지만 그 정 대표라는 사람도 마음에 안 들어.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뭐 하자는 거야?”

    “오연옥 작가의 유명세 때문에 사람들이 더 관심을 쏟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이슈는 다른 이슈로 묻어야 하는데 말이죠…….”

    김 대리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박현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현재 오연옥을 누를 수 있는 건 역시나 경우. 하지만 지난번 경고에 혼쭐이 난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

    “<태양의 제국>, 언제 끝나지?”

    “다음 주가 마지막회입니다.”

    “한 일주일 남은 거네? ……어떻게든 사람들 관심이 정명도가 아니라 민경우한테 쏠릴 수 있도록 해 봐.”

    “그러다 민 작가님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시려고요? 전에도 그것 때문에 계약서에 도장 못 찍었다면서요?”

    “구두계약도 엄연한 계약이야. 이미 우리랑 한다고 소문까지 난 마당에 지가 어쩔 거야? 그리고 내가 언제까지 그놈 눈치를 봐야 하는 건데?”

    박현호의 짜증에 김 대리는 결국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으니 그동안 사 놓은 채널 DBN과 유니언 스튜디오의 주식을 이번에야말로 팔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드디어 드라마가 끝이 나자 민 회장은 TV를 꺼버렸다. 한숨을 쉰 그가 옆자리에 앉은 아내를 돌아봤다.

    “이제 우리 아들 드라마도 끝났는데 앞으로 무슨 낙으로 살지?”

    시무룩한 남편의 얼굴에 윤정숙은 웃고 말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취향에 맞는 드라마나 만화 같은 게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걸 정주행이라고 한다나?”

    “이미 봤는데 또 본다고?”

    “그만큼 재미있다는 이야기겠죠. 정 볼 게 없어 우울하다면 당신도 한 번 해 봐요. 처음 봤을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걸 찾아낼 수도 있으니까.”

    아내의 말에 민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것도 기력이 있을 때나 하는 소리지. 가만히 앉아 드라마 보는 것도 쉽지 않구만.”

    “아들 드라마라서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없는 탓에 더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런가?”

    “네.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면 되는 일도 힘들다면 저세상으로 가야죠.”

    “당신, 농담이 너무 살벌한 거 아니야?”

    민 회장의 투정에 웃던 윤정숙은 민 회장의 얼굴에 내려 앉은 그림자를 읽었으니.

    “왜요? 결말이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그렇게 날 수밖에 없는 결말이었잖아.”

    처음 복수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이찬수는 최솔미를 통해 자신이 증오하던 사람들과 닮아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바꿔 먹는다. 자신은 다른 복수를 하겠다고 결심한 이찬수는 삼촌에게 배운 대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대하고 그의 그런 진심으로 사람들은 이찬수에게 마음은 연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이찬수는 악행을 저지르는 이복 누나 이화영의 비리를 수집할 수 있었으니 결국 이화영을 감옥으로 보내는 것은 물론 자신을 이용하려 한 비서실장 최경식 역시 회사를 떠나게 만든다.

    민 회장은 이찬수가 후계자로 태양 그룹을 이끌어 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경우가 생각한 결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바로 오너 일가 모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는 것.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 혹시나 경우가 제 누나와 형한테 하는 소리가 아닌가 싶어서.”

    “그건 아닐 거예요. 드라마 속에선 능력도 없는데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우리 자식들은 능력은 있어요.”

    “팔은 안으로 굽는 거잖아. 당신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우리 자식들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경우가 그런 마음은 아닐 거예요. 그랬다면 제 누나를 그렇게 돕지도 않았을 거고.”

    “그럼 경우가 생각하기에 지선이 우리 새명을 이끌어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금은요. 근데 정현이나 준호가 지선이보다 더 능력을 보여 준다면 경우도 마음을 바꿀 거예요.”

    “참 쉽지 않아.”

    “당연하죠. 앞으로의 새명을 맡기는 일이에요. 새명에 딸린 식구들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지금껏 지어왔던 무거운 짐을 물려주는 일인데 쉽게 생각하면 안 되죠.”

    아내와 이런 이야기를 마음 터놓고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민 회장은 감회가 새로웠다.

    한편, <태양의 제국> 마지막회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본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가뜩이나 정명도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던 박현호는 드디어 드라마가 끝이 났다는 생각에 그동안의 시름을 벗을 수 있었다.

    “이제 드라마도 끝났겠다, 더는 뭐라 하지 않겠지?”

    <태양의 제국> 마지막회가 끝난 다음날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한 박현호는 경우와 만나 계약서에 사인할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사인만 하면 이놈을 몰아붙여 올해가 가기 전 드라마 한 편을 무조건 뽑아낼 작정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겪은 마음고생에 비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을 하며 고소해하고 있던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깜짝이야! 김 대리는 노크도 할 줄 몰라?”

    “죄, 죄송합니다. 사안이 너무 급박하다보니.”

    “급박할 게 뭐 있는데? 왜? 송사리가 회사 그만 둔대?”

    “그게 아니라…….”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벌컥 열어젖히던 것과 달리 우물쭈물 못하고 있는 김 대리의 모습에 답답한 박현호는 짜증이 났다.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저, 그게…… 민 작가 차기작에 대한 소식이 벌써 인터넷에 퍼지는 바람에.”

    “뭐야? 우리 쪽에서 준비하려고 했더니 경우가 벌써 손을 쓴 거야? 하여간 아닌 척해도 저도 걱정되었던 모양이야.”

    “…….”

    뭐라도 대꾸를 해야 할 김 대리가 잠자코 눈치만 살펴보자 박현호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는데?”

    “그게…… 민 작가가 차기작으로 하기로 한 곳이 우리가 아니랍니다.”

    “무슨 소리야? 우리랑 하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해 놓고서. 우리가 아니면 어딘데?”

    “그…… 웹플릭스라고…….”

    올 1월,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와 드라마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웹플릭스가 드디어 한국에서도 서비스를 시작했다. 아직은 초반이라 가입자 수가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으나 그 성장세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거기다 몇 년 전부터는 시청자들의 취향을 철저히 고려한 드라마를 자체 제작하고 있었으니.

    그런 웹플릭스와 스튜디오 글로리가 손을 잡고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소식에 방송가는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이 드라마 판도를 어떻게 바꿀지 주목하는 건 당연한 거였다.

    “설마 전에 민경우 그 자식이 말했던 새로운 환경이라는 게 우리 채널 DBN이 아니라 웹플릭스였단 말이야?”

    “그, 이번 드라마에 신도현 작가님도 함께 참여하기로 해서 관심을 더 쏠리는 것 같습니다.”

    “내 이 자식을 그냥!”

    인터넷으로 관련 소식을 보던 박현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으니 김 대리는 서둘러 이 상황을 김강철에게 문자로 전달했다.

    * * *

    “야, 민경우! 민경우 어딨어?”

    스튜디오 글로리 사무실로 처 들어온 박현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무슨 일인가 싶었던 사람들이 나와 구경하기 시작했다.

    미리 소식을 전해 들은 경우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박현호는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너 이 자식, 뭐하자는 수작인데?”

    “이거 놓고 말씀하시죠?”

    소란에 뛰어나온 모기범이 그를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내 방에 들어가지. 보는 사람도 많은데?”

    “왜? 쪽팔린 줄은 아냐?”

    “내가 아니라 너. 너야말로 괜찮겠어?”

    어느새 사람들이 카메라까지 들고 찍고 있는 모습에 박현호는 하는 수 없이 잡은 멱살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다.

    경우가 괜찮다며 상황을 수습한 후 자신의 방으로 박현호를 데리고 들어갔다.

    “자, 마셔.”

    “내가 지금 이런 게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아? 도대체 뭐 하자는 수작인데? 차기작은 우리랑 하기로 했잖아? 근데 웹플릭스? 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냐? 나 물먹이려고!”

    “내가 왜? 장난질 친 거 네가 먼저였잖아. 주가 띄울 욕심에 우리 사정을 고려하지도 않고 막 나간 건 너잖아.”

    “그거야―.”

    “왜? 본의 아니었다고? 너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가 새 나간 거라고? 그럼 지난번 그때도 그랬냐? 내일 프로덕션이 협회 탈퇴한다고 했을 때?”

    “그건…….”

    “난 분명 너랑 만났을 때 내 사정까지 이야기하면서 부탁했는데 너 우리 이용했잖아. 안 그래도 신뢰가 바닥인 마당에 이런 사소한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한 너랑 어떻게 일을 같이 하겠어? 의리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드라마 끝나자마자 말 나온 거 보면 너도 그쪽이랑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거잖아? 나한테는 곧 도장 찍을 것처럼 말하더니 뒤로는 딴짓하고 있었던 거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막말로 계약서에 사인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우리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그리고 협회까지 완전 반토막 나서 너와 일하는 메리트도 없어진 마당에 이렇게 될 거라는 거 예상했어야지. 안 그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민경우 효과로 올랐던 주가가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놈의 멱살을 잡아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면 모를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그는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 온다, 어서 받아?”

    아까부터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는 마치 그를 위한 장송곡처럼 들렸으니 발신자를 확인한 박현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아, 아버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돌아서는 박현호의 모습에 경우는 살짝 불쌍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제 무덤을 판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

    “그러게. 사람은 평소에 덕을 쌓고 살았어야지.”

    경우는 안 됐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로부터 며칠 후 스튜디오 글로리가 새로운 드라마 제작사 협회에 합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기존 드라마 제작사 협회와 구별하기 위해 ‘참 드라마 제작사 협회’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내걸었으니 스튜디오 글로리의 합류로 기존 협회에서 참 협회로 합류한 제작사가 더 늘어나게 되었다.

    협회가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자 경우는 초대 협회장으로 내일 프로덕션의 정명도 대표를 적극 추천했다.

    “언감생심, 제가 협회장이라니요? 차라리 이번 기회에 민 작가가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전 드라마 작가가 더 어울리죠. 정 대표님은 제작사에서 오랫동안 일해 오셨잖아요. 이번에 새로 합류한 제작사들 중에 정 대표님 보고 오신 분들도 많은데 대표님 말고는 적임자가 없습니다. 사양하지 말아 주세요.”

    경우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정명도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저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언론사를 손에 쥐고 있잖습니까? 듣자 하니 협회가 반토막 난 책임을 우리 쪽에 물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걱정 마세요. 우리 변호사가 다 대비하고 있거든요.”

    “변호사요?”

    “사실에 맞지 않는 말을 진실인 양 떠들어 대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죠. 펜으로 흥한 자, 펜으로 망할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줄 생각입니다.”

    복잡했던 일이 정리가 되자 경우는 자연스레 달력으로 시선을 갔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 선거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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