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14화 (214/250)
  • #214. 공수래공수거 (7)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경우는 어딘가로 전화부터 걸었다.

    “어, 난데. 이번에 고정시에 나올 국회의원 후보들 누가 있나 알아봐 줘. ……그래, 부탁해.”

    전화를 끊고 나서도 경우는 한동안 사무실 안을 서성거렸다. 뭔가 중요한 문제를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달리 한석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박현호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게 했으니.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자꾸만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때 마침 그의 사무실을 찾아온 이들 탓에 경우의 얼굴은 더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 * *

    “차라리 좀 쉬지. 피곤에 절어 있으면서 무슨 드라마야? 당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드라마를 봤다고?”

    새명 자동차 사장으로 발령이 난 이후 민정현은 아내의 말마따나 이 모든 게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가 시험하고 있단 생각에 더욱 열심히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물산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업무 탓에 그는 수능 과외를 받듯 그렇게 업무를 익혔다.

    덕분에 매일 이어지는 야근으로 갈수록 해쓱하지는 남편의 모습에 아내 배예원의 걱정 또한 늘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가 모처럼 일찍 들어와서 하는 것이 동생의 드라마 <태양의 제국>을 몰아 보는 거였으니 차라리 일찍 잠이라도 자지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 아내 배예원은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내가 뭐 드라마가 보고 싶어서 보는 거겠어?”

    “그럼?”

    “준호가 보라고 하더라고. 드라마 속 상황이 지금 우리 상황하고 많이 비슷하다나 뭐라나.”

    “그래서 보고 있는 거야? 드라마가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궁금해서?”

    “그것도 그거고, 경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거든.”

    “그래서? 답은 찾았어?”

    “아니. 근데 한 가지는 알겠네.”

    “뭘?”

    “경우가 참 순진하다는 거.”

    “순진? 도련님이 순진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어.”

    “왜?”

    “막내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한테는 기회가 안 올 걸 알았잖아. 그래서 회사에 손 떼고 자기 갈 길 가는 거잖아. 근데 아예 손 떼긴 아쉬우니까 아가씨 이용해서 한 발 걸쳐 있는 거고. 머리가 좋아도 보통으로 좋은 게 아니야. 그런 사람이 순진? 말도 안 되지.”

    말을 하면서 열을 내는 아내의 모습에 민정현은 그저 웃고 말았다.

    사실 경우가 순진하다고 생각했던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드라마 속에 표현된 사람에 대한 동생의 생각이 순진하다고 느꼈던 것일 뿐.

    “그게 아니라 경우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거든.”

    마침 드라마 속에선 주인공 이찬수가 태양 바이오에서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겨우 완성한 신약 기술을 이화영의 계략으로 인해 태양 바이오의 빼앗기고 절망에 빠진 이들은 더는 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죽음까지도 불사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알아줄 테니까.

    그렇게 갈 곳 없는 이들을 이찬수는 있는 힘을 다해 설득한다. 자신이 돕겠다고, 자신을 믿어 달라고.

    결국 그의 진심에 그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어 보기로 한다. 하지만 시위를 끝내고 내려오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불법 시위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출동한 경찰들. 결국 현행범으로 체포되자 이찬수를 믿었던 믿음은 배신감으로 바뀌게 된다.

    이찬수는 이런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그들을 구명하기 위해 열심히 뛴다. 어떻게 보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들이었지만 그들을 위해 이찬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사람 마음 얻는 거야 당연히 중요하지. 그런데 저런 사람들 백날 도와 봐야 아무 소용없어. 이왕이면 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지. 회장도 갈아 치울 수 있는 주주들의 마음. 안 그래?”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던 건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으니 그게 현실이었다면 다윗은 절대로 골리앗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경우를 순진하다고 할 수밖에.

    “저렇게 백날 도와줘도 결국엔 부족하다고 손내밀겠지.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했단 말이 괜히 생긴 말이겠어? 지금이야 고맙다고 하지만 금방 다른 문제가 생기면 뭘 해 보지도 않고 도와 달라고 매달리는 게 사람 본성이야.”

    하지만 두 사람은 몰랐다.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사람들의 마음이 결국 회사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주주들의 결정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 * *

    바로 그 시각, 경우는 누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갑자기 귓속이 간지러워졌다. 그런데 눈앞의 사람들 눈치 탓에 귀를 팔 수도 없고 간지럼을 참으며 그들이 하는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경우를 찾아온 건 얼마 전 드라마 제작사 협회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한 소규모 제작사 대표들이었으니.

    “정말 이러다가 저희 방송국에 완전히 찍혀서 방송도 못 하고 그러면 어떡합니까?”

    “그럼 정말 저희는 망하는 거예요!”

    “저희는 민 대표님 말만 믿고 일을 시작했는데 이건 아니죠.”

    경우는 그동안 김강철을 시켜 드라마 제작사 협회에 가입된 제작사들 중 협회에 반감을 가진 이들을 모아 새로운 협회를 만드는 일을 추진해 오고 있었다. 주로 이제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이나 대형 제작사에 치였던 소규모 제작사들이 같이 하겠다고 합류했다.

    하지만 성명 발표를 하고 난 뒤 협회에 가입된 다른 제작사들의 압박을 받으니 덜컥 겁이 났던 이들은 모든 책임을 경우에게 돌리며 해결해 달라 찾아온 거였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방송국에서 드라마 전부를 자체 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드라마 제작사가 많다고는 하지만 케이블에 종편까지 방송국도 늘어난 상황이라 제작사를 가릴 형편이 못 됩니다. 거기다 앞으로 더 많은 제작사들이 우리 쪽에 합류하면 방송국도 눈치를 보겠죠.”

    “그러니까 스튜디오 글로리는 왜 참여하지 않는 겁니까?”

    “전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아직은 시기상조―.”

    “도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민 대표의 장단에 놀아나야 한다는 겁니까?”

    “그래서 앞으로 어쩌시겠다는 거냐고요?”

    강요는 없었다. 그들 역시 방송사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협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선택한 일이었다.

    하지만 위기감이 느껴지자 마치 경우가 선택을 강요했다는 듯 태도를 바꿨다. 일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선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창 실랑이를 한 끝에 그들은 겨우 돌아갈 수 있었다.

    한바탕 난리가 난 뒤 경우는 소파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마침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던 신도현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작가님, 괜찮으세요? 피곤하시면 다음에 올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아까 보니까 그 사람들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는데.”

    “오래도록 고정된 무언가를 바꾸는 데는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잖아요. 거기에 밥그릇이 걸려 있으면 누구든 사나워질 수밖에 없는 거고요.”

    잔뜩 피곤에 절여 있는 경우의 모습에 모든 일에 완벽하게만 느껴졌던 그가 처음으로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뭔지 모르겠지만 잘 될 거예요.”

    “그럼요. 당연하죠.”

    신도현의 위로 덕분에 힘을 얻은 경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작가님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보니까 준비를 꽤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이대로 사람들의 관심도 못 받은 채 아예 묻혀 버릴 수도 있어요.”

    그러자 신도현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잘 알아요. 근데 저도 생각 많이 했거든요. 저는 혹시나 작가님이 숟가락 얹지 말라고 하시진 않을까 걱정했어요.”

    “제가요? 오히려 전 작가님께서 같이 해 보자고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데요. 솔직히 요즘 일을 많이 벌여 놔서 머릿속이 복합했거든요. 작가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땡큐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작가님 도움 받아서 새로운 세계를 뚫어 보고 싶거든요.”

    솔직히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경우는 자신이 할 일이 그렇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도현의 입장에선 다를 거라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으나 그의 의지가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우는 그동안 신도현이 작성해 온 드라마 기획서부터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이제 이 드라마는 신도현만의 드라마가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써 나갈 새로운 드라마가 될 예정이었다.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환경에서 방송될 첫 번째 드라마가 될 예정이었다.

    기존의 틀은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새롭게 첨가될 부분을 열심히 의논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복선을 쌓아 가며 어느 정도 형태를 만들고 있던 그때 경우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슬쩍 문자를 확인한 경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잠깐 쉬었다 할까요?”

    “네.”

    신도현이 잠시 나간 사이 경우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거기엔 한 남자의 사진과 함께 그에 대한 이력이 꽤 상세히 쓰여 있었다.

    다름 아닌 대진일보 편집 부장 출신이며 현재 여당 미디어 본부장을 맡고 있는 봉민철이었으니 경우는 그가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석인과 함께 고정시의 하나뿐인 국회의원 자리를 차지하게 위해 다툴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하면 으레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안경을 쓴 샤프한 인상의 봉민철을 보던 경우는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던 잊었던 기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으니 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엔 그렇게 안 당하지.”

    * * *

    얼마 전 내일 프로덕션에 새롭게 합류하게 된 오연옥 작가는 신작 드라마 홍보차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 바로 옆에서 정명도 대표가 지켜보는 중이었다.

    “시청률 보증 수표 오연옥 작가님의 새 드라마, 정말 기대가 됩니다.”

    “말로만 기대된다고 하지 마시고 본방 사수 부탁드릴게요.”

    “그럼요. 끝으로 오연옥 작가님 하면 여러 드라마 제작사에서 탐내는 작가분일 것 같은데요, 러브콜을 보낸 수많은 제작사들을 뒤로 하고 내일 프로덕션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내일 프로덕션의 역사가 참 길죠. 제가 처음 드라마 작가로 데뷔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데요, 다른 제작사들이 생겨나면서 과거에 비해 명성이 못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 너무 직설적으로 말씀하셔서 정 대표님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거 같은데요?”

    “아닙니다. 맞는 말씀 하셨는데요.”

    “이젠 대표님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하시는지 알 것 같네요. 제가 여기서 그만 말하길 원하실 테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네요. 저한테 부족한 부분을 정 대표님이 채워 주셨던 것처럼 저로 인해 내일 프로덕션이 과거의 명성을 되찾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보니 두 분이 서로 꽤 신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물론이죠. 저도 이번에 대표님의 진심을 제대로 알게 되었거든요.”

    “진심이라 하시면……?”

    “그건 정 대표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게 어떨까요?”

    인터뷰 내용을 미리 고지했던 인터뷰어는 예정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건 지면 인터뷰라는 점이었으니 들어 보고 나중에 이 부분은 삭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희 내일 프로덕션이 드라마 제작을 해 온 지 꽤 오래 되었는데요, 최근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고요.”

    “결단이라 하시면……?”

    “우리 내일 프로덕션은 기존 드라마 제작사 협회를 탈퇴하고 새로운 제작사 협회에 합류할 예정입니다.”

    소규모 제작사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유명무실한 협회에 내일 프로덕션이 합류한다는 것은 더 이상 유명무실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오연옥이라는 날개를 달았으니 이 소식은 화제를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그 탓에 박현호도 이번만큼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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